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17)화 (117/394)

117화

30. 안심하셨습니까? 

아침 일찍 찾아온 김우진, 권정한과 함께 아침밥을 먹으려는 와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요리하느라 바쁜 김우진과 식탁을 세팅 중인 권정한을 대신해서 내가 문을 열었다.

“우서혁 씨.”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인사하는 우서혁의 뒤로는 쇼핑백을 든 수행원들이 두 명이나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를 보며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클로에 부마스터를 만나는 날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한데요.”

“마스터께서 보내신 옷입니다.”

아하. 허탈하게 웃으며 우서혁과 수행원을 방으로 들였다. 등 뒤로 건장한 남자들을 줄줄이 달고 들어오자 김우진과 권정한이 급히 거실로 나왔다.

“뭐야?”

낯선 이들의 등장에 김우진이 털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옷 배달이야. 하던 거들 해.”

“저번처럼 마스터가 보내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자 권정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표정이지.

“우서혁 씨.”

쇼핑백을 거실에 내려 둔 수행원들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가려는 우서혁의 소매를 슬쩍 붙잡았다.

“오신 김에 아침 드시고 가세요.”

“…….”

제안이 꽤 갑작스러웠는지, 우서혁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고민 중이군.

“아침 식사하셨어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같이 먹어요.”

우서혁의 소매를 잡아끌고 식탁으로 가자, 김우진이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노려봤다. 하긴. 김우진은 아직 우서혁이 낯설 만하지.

“우서혁 씨도 드시고 가신대.”

“…….”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 방 주인은 나다. 당당하게 말하자, 김우진이 눈썹 끝을 살짝 낮추며 밥그릇 하나를 더 꺼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

“여기 앉으세요.”

우서혁을 올려다보며 내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간 말없이 나와 시선을 맞추던 우서혁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쇼핑백이 저렇게 많은 걸 보면… 혹시 권정한 씨 옷도 있습니까?”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서혁 맞은편에 앉은 권정한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한이결 능력자님 덕분에 좋은 옷이 많이 생기네요.”

“음, 제 덕이라기엔….”

“한이결 능력자님 덕분 맞죠. 마스터 성격에 다른 사람도 이렇게 챙겨 줬을 리는 없으니까.”

이런. 이상한 오해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군.

“두 분이 친하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니까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물을 마셨다.

‘천사연은 나를 챙겨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멋대로 행동할 뿐이고… 오히려 휘둘리는 건 나라고 설명해 봤자 안 믿겠지.’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빙긋 웃고 있는 권정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에 앉은 김우진에게 물었다.

“김우진, 오늘 훈련은 언제 끝나?”

“네 시 전쯤. 끝나면 응접실로 갈게.”

김우진은 오전부터 훈련 일정이 잡혀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는 우서혁을 살폈다. 다행히 김우진의 요리가 입에 맞는지,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서혁이 가져다준 옷을 살펴봤다. 이번에 온 옷은 셔츠와 정장 바지였다. 사이즈를 보아하니 하얀 셔츠는 내 것이고, 그보다 큰 검은 셔츠는 권정한의 몫인 것 같았다.

“우서혁 씨도 같이 가세요?”

옷을 든 채로 묻자, 우서혁이 나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예. 응접실에 마스터께서 자리해 계시니, 저도 그쪽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천사연이 벌써 응접실에 가 있다고? 의아한 표정을 하자, 우서혁이 설명을 덧붙였다.

“클로에 부마스터와 따로 선약이 있으십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클로에가 천사연에게 이틀 뒤에 따로 만나자고 말했었지. 천사연과 클로에가 둘이서 만나 나눌 이야기라….

‘좀 궁금하긴 한데.’

천사연은 무엇을 하든 수상해 보이는 터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지만.

훈련하러 가는 김우진을 배웅한 뒤에 씻고 옷을 갈아입자, 때마침 출근한 민아린이 방으로 찾아왔다. 평소보다 더 깔끔하게 입은 민아린이 내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 왔다.

“이결 씨,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셔츠 소매 단추를 채우며 덧붙여 말했다.

“오늘따라 더 예쁜데요, 민아린 씨.”

“정말요?”

“네.”

슬쩍 거실에 있는 다른 남자들을 둘러봤다. 우서혁은 물론이고, 권정한도 의외로 이런 말은 입에 올리지 않는 성격이라 나 외에는 알아봐 줄 사람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아린은 나를 보며 살짝 수줍게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에 부마스터를 뵈러 가는 자리니까 신경을 좀 써 봤어요. 이결 씨도 오늘 멋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천사연이 보내 주는 옷이 쓸 만하긴 하지. 일단 뭐든 맞춤이니까.

“슬슬 시간이 됐는데, 올라갈까요?”

“안내하겠습니다.”

약속까지 15분 남았으니 출발해도 괜찮아 보였다. 내 말에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권정한이 몸을 일으켰다.

“어떡하죠. 저 조금 떨려요.”

방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동하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민아린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막상 만나 보면 편하게 대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클로에 부마스터도 민아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은데요.”

일부러 가볍게 웃어 주며 말하자, 민아린이 한결 안심하며 마주 웃었다.

***

찻잔을 든 채로 따듯한 온기가 감도는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던 클로에가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창백하게 느껴질 만큼 새하얀 피부가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놓게 만드는 아름다운 미모를 마주한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렇게 봐도 나는 더 해 줄 말 없어. 이상한 점이 없는 걸 어떡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길게 뻗은 다리를 꼰 천사연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영상을 봤다고 하지 않았나.”

“봤지.”

“그런데도 이상한 점이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에 클로에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영상을 보고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네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국까지 온 거고.”

공중에 떠오른 거대한 파편과 잔해들을 바람으로 막아 낸 A급 능력자, 한이결. 처음 강남 사건 영상을 보고 클로에가 느낀 감정은 바로 혼란이었다.

‘겨우 A급 능력자가, 이만한 기운을 갖고 있다고?’

물론 그 즉시 각혈하고 기절했지만, 그렇다 해도 평범한 A급이 도저히 이뤄 낼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각성 후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의 기운을 직접 두 눈으로 봐 온 터라, 한이결이 남다르다는 것을 손쉽게 알아챘다. 그래서 한이결의 기운을 직접 보기 위해 남편의 징징거림도 외면하고 한국까지 와 본 거였는데….

“정말 없다니까.”

그렇게 만나게 된 한이결은, 당황스러울 만큼 평범했다. 나름 기대했는데.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클로에가 덧붙여 말했다.

“내가 두 번이나 능력을 써서 확인해 본 거, 이미 눈치챘잖아.”

선글라스를 낀 상태에서 한 번, 선글라스를 벗고 한 번 더. 두 번이나 한이결의 기운을 확인했다. 남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푸른빛과 평균적인 A급이 가질 기운의 크기까지.

“남들과 다른 점은 없어. 강남 사건은, 글쎄. 가끔 사람은 본인이 가진 역량 이상의 힘을 발휘할 때도 있으니까.”

아무런 대답 없이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있던 천사연이 곧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계속 살펴봐.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게.”

“…그렇게까지 하라고?”

클로에가 반듯한 미간을 찌푸리며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한이결 능력자에게서 뭘 얻고 싶은 거야? 여태까지는 이런 일에 관심 둔 적 없었잖아.”

“재미있어 보이니까.”

“재미라니, 무슨… 하아.”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 클로에가 불안함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난 한이결 능력자보다 천사연 마스터, 네가 더 신경 쓰여.”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작년 3월쯤이니까, 대충 1년 만에 만난 거잖아. 그런데 너는 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클로에의 눈동자와 천사연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부딪혔다.

“기운의 색도, 힘의 크기도… 1년 전과 너무 달라. 이렇게까지 달라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대체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줄 수 없어?”

클로에의 질문을 끝으로 응접실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말없이 앉아 있던 천사연이 이내 그린 듯한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천사연 마스터.”

“뭘 말해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간 얄밉다니까. 팔짱을 낀 클로에가 천사연을 노려봤다.

“이렇게 나오면 나도 치사해지는 수밖에 없어.”

“쓸데없는 일에 힘쓰지 말고 본래 목적이나 생각하지. 한이결, 놓치지 말고 계속 체크해. 분명 뭔가 다른 게 있을 테니까.”

그놈의 한이결. 이쯤 되니 한이결이라는 남자의 어떤 점을 저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던 클로에는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왔나 보군.”

어느새 약속한 시각이었다. 한이결이 왔다는 것을 눈치챈 천사연이 몸을 일으켰다. 흐지부지 끝나 버린 대화에 클로에가 김샌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내려뜨렸다.

“으, 깜짝이야. 뭡니까?”

천사연이 문을 열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코앞에서 천사연과 마주친 한이결이 질색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별걸 다 놀라는군.”

“놀랄 수도 있죠.”

심드렁한 대꾸에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며 즐거운 듯 웃었다. 그 꼴을 보던 클로에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상해졌다니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