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박건호 팀장과 우서혁 비서도 오랜만이에요.”
“어서 오십시오, 클로에.”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뒤에 서 있던 박건호와 포옹을, 우서혁과 악수를 한 클로에가 곧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당신이 한이결 능력자 맞죠? 만나서 반가워요. 아테나 길드의 부마스터를 맡은 클로에 애스너입니다. 편하게 클로에라고 불러 주세요.”
앞으로 내민 클로에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클로에.”
“상황이 좋지 않을 텐데, 제안을 받아 줘서 고마워요. 아무래도 공식적인 방문이라 아이템을 넘기기 위해서는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거든요.”
그제야 아테나에서 내게 보내온 계약의 조건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제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사실 개인적으로 빨리 만나 보고 싶은 욕심도 있긴 했어요. 강남 사건의 영상을 봤거든요. 정말 멋지더군요, 한이결 능력자.”
클로에가 봤다는 영상이 뭔지 짐작이 가는 터라, 어색하게 웃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에요. 이렇게 실제로 보니 더 마음에 드는군요.”
클로에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가려졌던 선명한 녹안이 훤히 드러났다. 가까운 거리에서 클로에의 녹안을 마주한 나는, 그녀의 눈에 기묘한 빛이 서렸다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
뭐지? 워낙에 짧은 순간이었던 터라 제대로 본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고개를 기울이니, 클로에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최미진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레퀴엠 길드에서 계속할까요? 관리 본부가 호텔을 예약해 줬다고 전해 듣긴 했는데, 짐이 많은 게 아니라 들렀다 가고 싶어서요. 그래도 되겠죠, 최미진 센터장?”
“물론입니다.”
최미진의 대답에 클로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선글라스를 넘겨주며 손짓했다.
“좋아요. 한이결 능력자의 안전 문제도 있으니, 빠르게 움직입시다.”
***
관리 본부로 돌아간 최미진을 제외하고 클로에와 함께 레퀴엠으로 돌아온 우리는, 최상층 아래에 있는 넓은 응접실로 모였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준 수행원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클로에가 맞은편에 앉은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남 사건 영상으로 한이결 능력자를 보긴 했지만, 사실 이름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 동생과 만났다고 하던데, 맞나요?”
옆에 앉아 있는 김우진에게 잠깐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전에 신세를 졌습니다.”
클로에의 동생인 에드워드가 아니었다면, 김우진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겠지. 천사연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저를 만나러 와 주셨으니, 저도 그에 맞는 대가를 드려야겠죠.”
클로에가 팔에 차고 있던 팔찌 중앙의 초록빛 보석을 툭툭 두드리자 허공에 자그마한 액세서리 함이 나타났다.
“한이결 능력자에게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액세서리 함을 받아 들고 굳게 닫힌 뚜껑을 열었다. 붉은색 벨벳 사이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건의 정체는 작은 반지였다.
“휘유.”
뒤에 서서 구경하던 박건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꽤 괜찮은 아이템임을 알 수 있었다.
“반지를 끼고 중앙에 박힌 에메랄드를 힘주어 누르면 효과가 발동돼요. S급이고, 상대방의 능력을 무효화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일회용이니 반드시 신중하게 써야 해요.”
무효화 아이템이라니. 괜찮은 아이템을 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 생각 이상이었다.
“어떤 능력이든 상관없이 막아 낼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우리 에디가 직접 만든 아이템이니 효과는 확실할 거예요.”
일회용이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쓸 만한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김우진을 살렸던 아이템 제작자, 에드워드가 만들었다고 하니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정신계 능력자라면 발동 조건이 따로 있을 확률이 높아요. 항상 주변을 조심하고, 수상한 자를 마주친다면 정신계 능력을 쓰기 전에 망설이지 말고 반지를 사용하는 게 좋을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설명을 끝낸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에드워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서로 많이 닮았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문득 한이결의 동생이 떠올랐다. 그 아이도 한이결과 닮았을까.
‘……한이결의 과거를 제대로 알아냈을 때, 동생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겠지.’
지금은 신경 써 봤자 소용없었다. 상념을 몰아낸 나는 반지를 꺼내 들었다. 인벤토리 아이템도 없으니, 아예 지금 껴 두는 편이 나았다. 급한 상황에서 빠르게 누르려면 역시 검지에 끼는 게 좋겠지.
잠시 고민하다, 오른손 검지에 반지를 끼웠다. 살짝 헐렁하던 반지는 손가락 둘레에 맞춰 크기가 줄어들었다.
“참, 천사연 마스터.”
창문을 등진 채로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지켜보던 천사연이 클로에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뭐지?”
“에디가 이틀 후에 한국에 도착할 것 같은데, 함께 놀러 와도 되지? 한이결 능력자와 힐러 한 명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던데.”
“그러든가.”
“어머, 고마워라.”
“거절해 봤자 멋대로 데려올 게 뻔하니…. 그럴 바엔 그냥 허락하는 게 편하지.”
천사연의 시큰둥한 말에 클로에가 순순히 수긍하며 웃었다. 역시 천사연, 박건호와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답다. 사람이 좋아 보여도 호락호락하지는 않군.
“어때요, 한이결 능력자? 시간 괜찮아요?”
“전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드워드를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었다.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좋은 아이템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하는 게 맞겠지.
“이틀 뒤에 에디 꼬맹이가 온다고? 간만에 귀여운 얼굴 좀 보겠군요.”
박건호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클로에가 앞에 놓인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글쎄. 우리 에디는 박건호 팀장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던데.”
“음? 그렇습니까? 만날 때마다 잘 챙겨 줬는데, 이상하군.”
그 말에 가만히 서 있던 우서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박건호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박건호가 그간 에드워드를 어떻게 대했을지 뻔히 보였다. 어지간히도 괴롭혔나 보군.
내 예상이 맞았는지, 클로에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엽다는 이유로 그렇게 놀려 대면 아무리 착한 에디라고 해도 피하죠, 박건호 팀장. 아주 나쁜 버릇이라고요.”
“오해가 있군요, 클로에. 그게 다 제 애정 표현입니다.”
“놀리는 게 애정 표현이라니, 어쩜 그런 천사연 마스터나 할 법한 소리를.”
“그런 말은 하지 말지. 기분 더러우니까.”
천사연이 보기 드물게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속으로 공감하고 있던 나는 극구 부정하는 천사연의 모습에 오히려 어이가 없어졌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천사연이나 박건호나 제정신 아닌 건 똑같은데.’
천사연의 반응에도 상처받은 기색 없이 멀뚱히 눈만 굴리던 박건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마스터도 귀여우면 괜히 건드리고 그러던데, 뭘 아닌 척합니까? 한이결 능력자가 마스터라면 학을 떼는 이유가 그래서인 것 같은데.”
“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구경하던 나는 박건호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갑자기 저는 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죠, 박건호 팀장님.”
“이상한 소리라니, 그렇지 않나? 볼 때마다 마스터가 놀리던데. 아까도 결혼 문제로 놀렸고.”
“어머. 결혼?”
클로에가 흥미로 눈을 반짝 빛냈다. 아니, 이미 끝난 문제를 또 왜 꺼내!
“잠깐, 오해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놀란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천사연이 수줍음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아까 공항에서 한이결이 말하더군. 내가 34살이 되면 결혼을 해 주겠다고.”
“로맨틱해라!”
클로에가 마치 소녀처럼 볼을 붉혔다. 지금 이걸 믿는 거야? 너무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닙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결혼에 꽂힌 클로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오른 표정으로 박건호에게 물었다.
“한국도 동성 혼인이 법제화가 되었나 보네요.”
“아마도요?”
“아마도는 개뿔이 아마도입니까? 법제화 안 됐습니다! 그리고 천사연 마스터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천사연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을 뿐, 장난이었다는 말은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마스터가 싫으면 나는 어떤가, 한이결 능력자? 마침 결혼할 나이도 됐는데.”
뒤에 서 있던 박건호가 내 어깨를 껴안으며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려 댔다. 결혼할 나이? 그 말에 잠시 박건호의 나이를 떠올렸다. 34살이던가.
‘제정신이 아니군.’
한이결보다 10살이나 많잖아. 미간을 찌푸리며 단단한 박건호의 팔을 놓으라는 의미를 담아 찰싹찰싹 때렸다.
“어떻고 뭐고, 남자끼리 무슨 결혼입니까? 싫습니다.”
“이런. 요즘 세상에 그런 꽉 막힌 생각을 하고 있다니.”
고개를 돌려 박건호를 싸늘하게 노려보는데, 김우진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몸을 바싹 붙이고는 칭얼거렸다.
“그만 가자, 한이결. 받을 것도 다 받았잖아.”
“…….”
그렇긴 한데, 클로에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하냐. 앞뒤로 시달리는 내 모습에 우서혁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빨간 머리 친구 말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어차피 에디가 한국 오면 또 볼 텐데. 그렇죠, 한이결 능력자?”
다행히 클로에가 먼저 상황을 끝내는 말을 꺼내 줬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박건호의 무거운 팔을 치워 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이틀 뒤에 계속하기로 해요. 나도 오늘은 이만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겠어.”
어깨로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 넘기며 클로에가 천사연을 돌아봤다.
“천사연 마스터. 따로 만나는 것도 이틀 뒤로 미루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러도록 하지.”
딱히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천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Good.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다들 다음에 또 봐요.”
벗어 뒀던 코트를 든 채로 클로에가 내게 윙크를 보내고는 깔끔하게 응접실을 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