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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14)화 (114/394)
  • 114화

      

    약 1시간가량 이동한 후에 도착한 인천 공항은 이용객과 경호 인력, 미리 대기 중인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항 직원과 경호원들이 관계자 외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주변을 통제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천사연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근데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대길드 부마스터가 오는 건데, 남들하고 같이 비행기를 이용하나? 전세기 그런 거 타지 않고?”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차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서 있는 천사연에게 바싹 붙으며 묻자, 상체를 살짝 숙인 천사연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 크게 일 벌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덕분에 그쪽 길드 마스터는 꽤 전전긍긍하는 것 같다만.”

    마스터와 부부관계라고 했던가? 말뜻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가 좋은가 보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거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시큰둥한 설명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지극히 건조했다. 새삼 천사연의 멀끔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김우진도 그렇지만, 천사연 이놈도 걱정이다. 성격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니… 과연 연애는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해도 성격이 저 지랄이면 여자들이 안 좋아할 텐데.

    “……그 시선은 뭐지?”

    잠시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천사연이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천사연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넌 연애 안 하냐?”

    “뭐?”

    “연애 안 하냐고. 클로에 부마스터는 결혼까지 했다는데.”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천사연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었나.

    “클로에는 34살이니 결혼쯤이야 충분히 할 나이라고 본다만.”

    “…너는 몇 살인데?”

    “나?”

    천사연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려 주기 싫다 이거군. 어차피 나이 정도는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정보 아닌가? 핸드폰을 챙겨 오진 않아서 바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말 안 해 줄 거면 말고.”

    “갑자기 나이를 왜 궁금해하는 거지? 34살이면 나랑 결혼이라도 해 주려고?”

    “…….”

    미친 새끼. 진저리를 치며 노려보자, 천사연이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때마침 줄줄이 들어온 차에서 김우진과 권정한, 박건호와 우서혁이 짝을 맞춰 내렸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네 명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박건호와 우서혁은… 예상했던 대로 아주 좋지 않았다. 오면서 멱살잡이라도 했는지 둘 다 넥타이 부근이 흐트러져 있었고, 표정에서도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풀풀 풍겼다.

    ‘저럴 줄 알았지.’

    역시 내가 우서혁이랑 같이 타고 올 걸 그랬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 뒤로 보이는 김우진의 싸늘한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쟤들도 싸웠나? 그러기엔 권정한이 짓고 있는 웃음은 너무나도 평소와 같았다.

    그래도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 관계가 어느 정도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김우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시무룩하니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어이구, 저런.

    “한이결….”

    김우진이 바싹 붙어 서며 내 팔을 붙잡았다. 그 꼴이 자기를 놓고 간 주인에게 달려와서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았다. 나는 느긋하게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하는 권정한에게 물었다.

    “오다가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음, 제게 무척이나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죠.”

    부드럽게 나온 대답에 김우진이 가증스럽다는 양 권정한을 째려봤다. 어째 천사연을 상대하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김우진 몰래 권정한과 대화를 좀 나눠 봐야겠다. 김우진은 예민해서 그렇게 막 놀리면 안 된다고 말이라도 해 줘야지.

    “음? 마스터.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뒷골목 건달처럼 껄렁껄렁 걸어온 박건호가 아직도 미소 짓고 있는 천사연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권정한 경호의 말처럼 나도 한이결과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그 이상은 더 지껄이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경고를 했지만, 천사연은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한이결이 나와 결혼을 해 준다고 하더군.”

    “뭐라고?”

    “예?”

    다소 뜬금없이 튀어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김우진이 경악했고, 우서혁은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박건호는 별다른 말 없이 휘파람을 불었지만, 의외기는 했는지 눈이 살짝 커졌다.

    “지, 진짜입니까?”

    김우진이 사색이 돼서는 내가 아닌 천사연에게 물었다. 천사연이 또 허튼 말을 하기 전에 급히 끼어들었다.

    “진짜일 리 있냐? 그냥 연애 안 하냐고 물었을 뿐입니다. 클로에 부마스터는 아테나 길드 마스터와 부부 사이라고 들어서요.”

    우서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흠. 호텔에서 꽤 호화롭게 했었지. 그때 길드 대표로 내가 워싱턴까지 갔었거든.”

    팔짱을 끼며 그때를 상기하듯 눈동자를 굴리던 박건호가 이윽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마스터께서 요즘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는 저도 좀 궁금하군요. 재작년까지는 쉴 틈 없이 만나지 않았습니까?”

    “쉴 틈 없이 만났다고요?”

    충격적인 말에 놀라서 묻자, 박건호뿐만 아니라 우서혁마저 당연하지 않냐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이지. 마스터의 외모와 재력으로 여자를 못 만나는 게 오히려 웃긴 일 아닌가?”

    “말도 안 돼. 얼굴과 돈이 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대개 얼굴도 돈도 없는 이들이 하더군.”

    천사연이 빙글빙글 웃으며 받아쳤다. 꼭 저렇게 본인처럼 재수 없는 말만 한다니까. 짜증 나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우서혁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누구를 만나더라도 한 달을 못 버티고 헤어지셨습니다. 연애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박건호가 보기 드물게 우서혁의 말에 동의했다. 박건호가 이럴 정도면 연애를 얼마나 개판으로 해 온 걸까. 내 의심스러운 눈빛에도 천사연은 연신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대체 왜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연애야 뭐, 마스터께서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든 결혼 얘기가 나올 나이는 아니라는 거지. 어디 보자…. 올해로 29살 아닙니까, 마스터?”

    “뭐라고요?”

    “이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군.”

    기겁한 나를 보며 천사연이 입가를 매만지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29살이라는 경악스러운 나이에 제대로 충격을 받은 나는 제대로 반응조차 해 주지 못했다.

    뭔가 지금, 원치 않게 엄청난 사실을 연달아 계속 듣는데.

    “몰랐어, 한이결?”

    “……몰랐는데.”

    태연한 주변을 보아하니 천사연의 나이를 모르는 건 나 혼자였나 보다. 아니, 당연한가. 이 사람들은 천사연이 길드 마스터고 상사니까.

    천사연의 나이는 어비스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터라, 직접 알아보지 않은 이상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천사연의 나이 따위 찾아볼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그렇지, 29살? 29살에 길드 마스터인 것도 모자라서 저렇게 또라이가 됐다고?’

    이게 말이 돼? 너무 사기 아닌가?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주인공인 하태헌보다 더….

    ‘헉, 잠깐.’

    하태헌이 몇 살이었지? 급히 머릿속을 뒤적여 어비스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에서 서술된 하태헌의 나이는 27살. 그럼… 하태헌과 천사연은 고작 2살 차이라는 거다.

    “미친. 징그러워.”

    매슥거리는 속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즐겁게 구경하던 천사연이 정신 차리라는 듯 목덜미를 가볍게 주물러 왔다.

    “노는 건 이쯤 하고 이동하도록 하지. 이제 곧 도착할 시간이군.”

    천사연이 걸음을 옮기자, 대기 중이던 공항 직원이 앞장서서 안내를 시작했다. 멀찍이 물러서 있던 기자들이 우리가 공항 내부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오셨군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최미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은 검은 정장 차림의 최미진이 천사연을 맞이하며 뒤에 서 있는 내게도 눈인사를 보냈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최미진 센터장.”

    “다른 이도 아니고 클로에 부마스터니, 올 수밖에 없지요.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최미진도 클로에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관리 본부 센터장과도 친분이 있다라. 점점 클로에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비행기는 아까 도착했으니 곧 이쪽으로 나올 겁니다.”

    최미진의 말이 끝나고 얼마 가지 않아, 게이트가 열리며 금발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성이 관계자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우서혁이 준비해 준 서류에서 사진을 봤던 터라 그녀가 클로에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 최미진 센터장. 오랜만이군요.”

    클로에가 선두에 서 있는 최미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통역 아이템을 착용 중인지 그녀는 능숙하게 한국어를 사용했다.

    클로에의 새하얀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악수를 한 최미진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대답했다.

    “당신이 오는데 안 나와 볼 수 없죠.”

    “기뻐라. 길드 본부에서 사람이 마중 나올 줄 알았지만, 최미진 센터장은 워낙에 바쁘니 기대를 안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클로에 부마스터.”

    항상 피곤하고 예민해 보이던 최미진이 저렇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긴, 그동안 최미진을 마주할 때마다 천사연도 옆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네.

    최미진과 인사를 끝낸 클로에가 천사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사연 마스터.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그 말에 천사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까지 보내 놓고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뭔지.”

    “보내도 지금까지는 무시했잖아?”

    천사연의 태도가 섭섭할 만도 할 텐데, 클로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까칠한 고양이를 보듯 웃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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