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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13)화 (113/394)
  • 113화

    29. 클로에 애스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사연을 노려봤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천사연이 서늘한 손으로 헝클어진 내 앞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귀여운 짓을 하기도 했고.”

    귀여운 짓? 천사연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이템이 쓸 만하다는 것도 이미 눈치챘을 테니까.”

    “진짜… 알려 준다고?”

    “그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려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천사연이 붙잡고 있던 허리를 놔주었다.

    “일단, 네가 마중 나갈 손님에 대해 얘기해 보지.”

    급히 몸을 떼고 일어서자 천사연도 느긋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클로에 애스너. 아테나 길드의 부마스터를 맡고 있고, SS급 기운 감별사로 유명하지.”

    천사연이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쇄골 부근이 드러났다.

    “뭐,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우서혁 비서가 자료 준비해 줬을 테니까.”

    눈치도 빠르네. 딱히 숨길 만한 사항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관계가 중요한데…. 아테나 길드의 마스터와는 오랜 연애 끝에 1년 전에 결혼해서 신혼을 즐기고 있지.”

    “잠깐. 가족 관계가 중요하다고?”

    지위나 능력이 아니라? 서류에는 능력 설명이나 클로에 애스너가 이뤄 낸 업적 등은 상세히 적혀 있었지만,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딱히 적혀 있지 않았다.

    아테나 길드의 마스터와 부마스터가 부부 사이라는 건 의외긴 한데, 그게 대체 아이템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떨떠름한 내 반응에 천사연이 옆에 앉아 있는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봤다.

    “역시 기억을 못 하고 있군. 이렇게 멍청해서야.”

    “…….”

    이 새끼가…. 울컥하는 속을 억누르며 욕설을 삼켜 냈다. 침착하자. 여기서 괜히 덤볐다가 아이템 정보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클로에 동생이 실력 좋은 아이템 제작자야. 덕분에 꽤 쓸 만한 아이템을 많이 갖고 있지.”

    아, 그렇군. 그래서 아이템을 대가로 걸어 둔 건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천사연이 웃으며 내게 물어 왔다.

    “아직도 모르겠나? 예전에 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났다고?”

    내가 지금껏 만난 아이템 제작자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김우진 재각성 때 왔던 제작자를 말하는 거야?”

    “그래.”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천사연이 이름을 소개해 줬었지. 에드워드 애스너.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의 작은 남자아이였다.

    “하아…….”

    이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천사연이 멍청하다고 비난할 만했다. 앉아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천사연이 내가 한숨을 내뱉자 즐겁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디가 알면 슬퍼하겠군. 그쪽은 널 기억하고 있던데.”

    “아니, 그간 워낙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애초에 한번 봤는데 어떻게 바로 알아?”

    반사적으로 변명을 하던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실수한 건 맞지만, 천사연이 너무 재수 없다. 잠시간 천사연을 노려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간다.”

    “음?”

    무슨 아이템을 대가로 받을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에드워드 애스너와 남매 사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믿고 계약을 받아들일 만했다.

    “어딜 가지? 아직 아이템에 대한 건 말하지 않았는데.”

    “됐어. 어차피 너도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확실히 아는 게 아니라며. 그때 김우진을 도와준 제작자와 가족이라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해.”

    솔직히 천사연이랑 더 있고 싶지 않기도 하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한 내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천사연이 내 허리를 낚아채 잡아당겼다. 그대로 천사연의 다리 사이에 앉게 된 나는 어이없어서 뒤를 돌아봤다.

    “뭐 하냐?”

    “아이템 듣고 가.”

    “아니, 필요 없다니까.”

    천사연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 징그러운 자세는 뭐야. 나는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천사연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며 말했다.

    “놓으라고.”

    “가만히 있어.”

    단호한 대답에서 옅은 짜증이 느껴졌다. 이 자식이, 지금 짜증 낼 사람이 누군데.

    “…….”

    차가운 손과 달리, 목덜미에 기대 오는 얼굴은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설마 어디 아픈 건가?

    ‘SS급도 아플 수가 있나?’

    이론상으로 감기 같은 건 등급 관계없이 걸릴 수 있기야 한데, 천사연이 감기라니.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단순하게 자다 깨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됐다. 천사연이 아프든 말든, 내가 뭔 상관이야.’

    상념을 몰아내며 천사연에게 물었다.

    “알겠으니까, 말해 줄 거면 빨리해. 아이템이 뭔데?”

    이럴 때는 천사연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내 질문에 천사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남 사건을 알고 있을 테니…. 아무래도 정신계 능력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아이템을 줄 것 같군.”

    “그게 가능해?”

    “가능은 하지. 다만 일회용일 확률이 높아.”

    여러 번 쓸 수는 없다는 건가.

    “그래도 얻어 두면 좀 편하긴 하겠네.”

    “그렇겠지.”

    그걸 끝으로 대표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이템에 관한 얘기가 끝이 났는데도, 놔줄 생각을 안 하는 천사연 때문에 난감했다. 나랑 뭐 어쩌자는 건지.

    전부터 느꼈는데, 천사연은 보기와 다르게 스킨십을 꽤 좋아했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한다는 게 문제지만. 오늘 같은 행동은 어딘가 김우진의 분신이 떠오르기도 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자주 치근덕거린단 말이지.’

    치근덕거리는 거야 상관없지만, 슬슬 놔줬으면 좋겠다. 여기서 더 할 것도 없는데.

    “……공항에는.”

    아무 말 없이 안겨 있는 것도 잠시, 천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를 데려갈 거지?”

    “딱히 생각해 둔 사람은 없는데.”

    “경호원은 데려가야 하지 않나. 그러려고 뽑은 건데. 어차피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위험하지는 않겠다만.”

    “정말 내가 가도 되는 거야? 공항이면 사람도 많을 텐데. 만약 문제가 생기면 강남보다 더….”

    “괜찮아.”

    “…….”

    뭔데 이렇게 당당하게 괜찮다고 하는 건지. 믿어도 되는 건가, 이거. 천사연을 의심하며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했다. 클로에 애스너가 한국에 오는 날짜는 앞으로 일주일 뒤. 천사연의 말대로 별일 없이 아이템만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름 예의를 갖춰야 할 테니, 옷을 새로 보내 주도록 하지.”

    “그러시든가.”

    어차피 거절해도 막무가내로 보내올 테니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그게 퍽 마음에 드는지, 천사연이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웬일로 거절하지 않고?”

    “닥치고 주는 대로 받으라고 말한 건 그쪽인데.”

    “하하,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지.”

    비꼬는 말에도 천사연은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를 놔준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 봐. 옷은 내일쯤 사람을 통해서 보내도록 하지.”

    옷을 받겠다는 확답을 얻자마자 놔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붙잡고 있을 리가 없지. 고개를 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

    천사연이 보내 준 옷은 셔츠 대신 검은 목 티가 포함된 세미 정장이었다. 투 버튼 형식의 남색 정장 재킷을 걸치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잘 어울리세요, 한이결 능력자님.”

    “권정한 씨도 잘 어울립니다.”

    거실에는 나처럼 깔끔한 스타일로 갖춰 입은 권정한과 김우진이 서 있었다. 권정한은 경호원이라는 위치에 맞게 검은 정장에 더불어 검은 넥타이를 맸고, 김우진은 흰 티에 짙은 와인색 정장을 입었다.

    원래는 권정한만 데려가려고 했는데, 일정이 없는 김우진이 자신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천사연은 그걸 또 예상했는지 김우진의 옷까지 준비해서 보내 줬고. 덕분에 양옆으로 줄줄이 달고 마중 나가게 생겼다.

    “슬슬 가죠.”

    천사연이 보내 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나는 권정한, 김우진과 함께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길드 로비로 내려오자, 여러 명의 수행원 사이에 서 있는 천사연과 우서혁, 그리고 정장을 입은 박건호가 보였다.

    “……?”

    박건호는 여길 왜?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를 발견한 박건호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Good morning, 한이결.”

    “한이결 씨.”

    박건호의 말에 시선을 돌린 우서혁이 날 향해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며 눈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우서혁 씨.”

    “나한테는 인사 안 해 주나?”

    나와 우서혁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던 박건호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름 익숙해진 박건호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며 팔을 쳐 냈다.

    “박건호 팀장님이 여긴 무슨 일입니까?”

    “할 일도 없겠다, 같이 가려고 왔지.”

    같이 간다고? 그래서 정장을 입은 건가. 저번에 박건호가 했던 말을 떠올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클로에 부마스터와 아는 사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래. 간만에 얼굴 보는 거니 마중 정도는 나가야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친한가 보다. 천사연에 이어 박건호와 좋은 관계라니. 클로에 애스너에 대해 궁금증이 한층 커졌다.

    “한이결.”

    수행원에게 보고와 함께 서류를 건네받은 천사연이 내게 손짓했다. 권정한과 김우진을 데리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손에 든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가면서 읽어. 공항 내부 지도와 동선, 주변에 배치될 공항 직원의 정보다.”

    천사연의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펼쳤다. 첫 장에 있는 공항 내부 지도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깔끔했다.

    “한이결, 네 근처에는 길드원 외에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을 거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권정한과 김우진이 막을 거고. 알겠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주변에서 알아서 할 테니, 나서지 말라는 뜻이군. 나도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던 터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변 눈을 생각해서 얌전히 대답하자, 빙긋 웃은 천사연이 몸을 돌렸다.

    “출발하지.”

    길드 입구에는 검은 차량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천사연의 등장에 대기 중이던 수행원이 차 문을 열었다.

    천사연과 내가 같은 차를 타고, 김우진과 권정한이 바로 뒤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던 나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천사연에게 물었다.

    “근데 우서혁 씨와 박건호 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둘은 세 번째 차에 타던 것 같은데.”

    “둘이서만?”

    “둘이서만.”

    “…….”

    운전기사가 따로 있긴 하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쌍한 우서혁. 나는 우서혁이 별 탈 없이 공항에 도착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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