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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12)화 (112/394)

112화

  

박건호를 떼어 놓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서류부터 바로 확인했다.

“클로에 애스너?”

어딘가 묘하게 낯익은 이름인데. 박건호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꽤 유명한 능력자다. 아테나 길드의 부마스터이기도 하고.”

아테나 길드라. 어비스에서 잠깐 스치듯 나온 길드였다. 제대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저를 보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우서혁이 따로 준비해 준 서류에는 클로에 애스너에 대한 정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입에 담았다.

“SS급 기운 감별사?”

이건 무슨 능력이지? 궁금해하는 내게 민아린이 주방에서 과자 봉지를 가져오며 대답했다.

“기운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에요. 사람마다 기운의 색도 다르고 크기도 천차만별인데, 기운 감별 능력자는 그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 신기하네요.”

“SS급이면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아테나 길드 부마스터 인터뷰는 전부터 여러 번 봤는데, 마스터와 아는 사이라니….”

민아린이 굉장히 의외라는 듯 말하자, 박건호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대며 슬쩍 웃었다.

“뭐, 성격이 워낙에 호탕하기도 하고. 마스터가 어리숙할 때부터 봐 왔으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남다른 무언가가 더 있겠지.”

“어리숙할 때면… 그때 말씀하셨던 길드 세울 때의 마스터 말입니까?”

이전에 박건호가 말해 준 천사연의 과거가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혼자 길드를 키워 오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던가.

“맞아. 클로에 덕분에 쓸 만한 인재를 여럿 데려올 수 있었지. 그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줬고.”

그렇다면 박건호 다음으로 천사연의 과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상대라면 마중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내가 정신계 능력자에게 노려지고 있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승낙했을 텐데. 공항이면 오가는 사람이 워낙에 많은 장소라 불안하기는 했다. 강남 사건처럼 괜히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다음 서류를 보지 않고 한숨을 내쉬자, 박건호가 민아린이 건네주는 과자를 받아 입에 넣으며 물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는데, 마스터가 마중 가는 게 좋을 거라 하지 않았나? 웬만하면 그 제안을 따르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셔도….”

뒷장을 펼쳐 보며 대답하던 나는 말을 끝맺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길드 관리 본부 로고가 하단에 박혀 있는 마지막 장 서류에는 아테나 길드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내용 원문과 함께, 그에 따른 대가가 기재되어 있었다.

아이템이라. 어떤 아이템인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괜찮아 보였다.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쓸모없는 아이템을 계약에 걸어 둘 리는 없으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꽤 끌리는가 본데.”

“…나쁘진 않네요.”

머쓱함에 괜히 헛기침하자, 박건호가 좋다고 웃었다. 내 뒤에서 서류를 살펴보던 권정한이 입가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마스터는 저 아이템이 뭔지 대충 짐작하고 계신 걸까요? 받아들이라는 걸 보면.”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마스터가 그런 말을 허투루 할 리 없으니까.”

으음. 서류를 들여다보며 이마를 툭툭 두드리던 나는 한숨과 함께 서류를 내려놨다.

“전부터 느끼는데, 팀장님은 마스터를 꽤 믿으시나 봅니다.”

내 말에 박건호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오래 봐 왔으니 대충 무슨 의도인지 알긴 하지. 애초에 신뢰하지도 않는 상대 아래에서 일할 생각도 없고.”

“그렇습니까?”

워낙 당한 게 많은 나로서는 천사연을 믿는 게 힘들지만, 오랫동안 천사연과 호흡을 맞춰 온 박건호는 다르긴 하겠지. 그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야말로 전부터 궁금했는데, 한이결. 마스터와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보고 있으면 불편한 것 이상의,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데.”

“…….”

박건호의 질문에 나를 돌아보는 민아린과 권정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김우진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박건호를 노려봤다.

나는 김우진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었다고 대답해도 안 믿으실 것 같은데요.”

“그럼 믿을 수 있도록 좀 더 잘 숨기지 그랬나.”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어차피 전 레퀴엠 소속도 아니라서, 딱히 천사연 마스터를 신뢰할 필요도 없고.”

“그건 그렇긴 하지.”

박건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 건은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군. 위험한 건 맞는데, 마스터도 함께 갈 테니.”

“그렇지 않아도 고민 중입니다. 아이템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천사연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확답을 주기 전에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천사연은 이 아이템이 뭔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클로에라는 여자와 아는 사이기도 하니까.’

무슨 아이템인지 알아낸다면 선택하기가 더 쉬워질 텐데. 아까 만난 우서혁이 대표실로 갔으니, 길드에 있긴 한가 본데. 가 봐야 하나.

천사연을 만날지 말지 고민하는데, 박건호가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한이결.”

“예?”

“번호 바꿨나?”

아, 맞아. 그러고 보니 민아린과 박건호 번호는 아직 저장을 못 했구나. 나는 핸드폰을 꺼내 박건호에게 내밀었다.

“핸드폰 망가져서 새로 바꿨습니다. 번호가 유출되기도 했고.”

“어쩐지. 그래서 전화를 안 받았군.”

“멀쩡했어도 안 받았을 겁니다.”

박건호의 번호가 저장된 핸드폰을 민아린에게 넘기며 말했다.

“아무튼, 이 번호는 웬만하면 비밀로 해 주십쇼. 또 바꾸고 싶진 않으니까.”

“뭐, 그러도록 하지.”

천사연에게도 비밀로 해 달라는 의미인데, 박건호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눈치챈 것 같긴 한데.

나는 핸드폰을 민아린에게 맡긴 채로 서류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본 민아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결 씨? 어디 가세요?”

“대표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대표실을요?”

“네.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고…. 일단 얘기라도 좀 들어 보게요.”

김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따라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말해 봤자 내가 저번처럼 거절할 거라는 것을 아는 거겠지.

‘아, 싫다. 진짜 가기 싫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내게 민아린이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이결 씨, 부모님께 혼나러 가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네요.”

“…전혀 다릅니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방을 나섰다. 박건호를 내버려 두고 나오는 게 좀 걸렸지만, 민아린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와중에 문득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 찾아가는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이렇게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막 찾아가도 되는 건가? 아무리 나한테는 개자식이라지만, 그래도 한 길드의 마스터잖아.

최악의 경우,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일단 올라온 김에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대표실로 향했다.

“들어가십시오.”

“예?”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날 발견한 수행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나를 문 앞까지 안내했다.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렇게 확인도 안 하고 막 안내해 줘도 되는 건가?

‘뭐지. 내가 찾아올 거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 뒀나? 천사연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긴 한데.’

으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적막이 내려앉은 대표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응?”

앉아서 기다리려고 했던 나는 뒤늦게 소파에 누워 있는 천사연을 발견했다. 기다란 몸을 쭉 펴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설마 지금 자는 거야?’

살다 살다 천사연의 자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서류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조심히 다가갔다. 창백한 뺨과 가지런한 눈썹, 곧게 뻗은 콧날 아래로 살짝 발간 입술을 차근차근 구경하던 나는 조금 젖어 있는 이마를 발견했다.

천사연이 흘린 식은땀이었다. 뭔 꿈을 꾸길래 자면서 식은땀을 이렇게 흘리냐. 남 일 같지 않은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천사연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

놀라서 반사적으로 낮췄던 상체를 뒤로 빼려는데, 그보다 먼저 천사연의 손이 내 팔을 붙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윽, 무슨… 천사연!”

“응.”

천사연이 제 몸 위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를 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어나기 위해 천사연의 가슴팍을 누르며 상체를 들어 올렸지만, 허리가 단단히 잡혀 옴짝달싹 못 했다.

“이 또라이 새끼가. 좀 놔!”

“자는 사람 깨웠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웃기지 마. 너 안 자고 있었잖아.”

“자긴 했지. 한 5분.”

한참을 낑낑거렸지만 도통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네 멋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내가 반항을 멈춘 것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천사연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걸까. 내 귀한 협력자.”

두 번 귀하다간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네. 속으로 비웃으며 테이블에 올려 둔 서류를 대충 손으로 가리켰다.

“준다는 아이템이 뭐야? 넌 알고 있을 거 아냐.”

“뭐… 짐작하고 있긴 하지.”

“그러니까. 뭐냐고, 그게.”

천사연이 대답 대신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무슨 의미가 담긴 웃음인지 바로 감이 왔다.

“또 거래니 뭐니 개소리하려는 거냐?”

“눈치가 좀 빨라졌네, 한이결.”

“미친놈….”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입술을 깨물며 천사연을 어떻게 구슬릴지 고민했다. 최소한 힌트라도 얻으면 좋겠는데.

천사연이 미소를 띤 채로 가슴팍에 엎드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등을 살살 쓰다듬다, 문득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알려 줄까?”

“…지금 뭐라고 했어?”

“알려 준다고.”

이렇게 순순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사연이 그럴 리가 없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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