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엄청 한가해 보이시네요.”
어깨를 감싸 안은 박건호를 떼어 내며 묻자, 그가 히죽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한번 쓰다듬었다.
“해외 출장까지 갔다 왔는데, 이 정도 휴가는 받아야지.”
“잠깐. 왜 멋대로 앉으세요?”
박건호가 뻔뻔하게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냥 인사만 하고 갈 줄 알았는데, 아예 우리랑 시간을 보내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어이없어하는 날 보며 앞에 놓인 커피까지 제 것처럼 가져가서 한 모금 마신다. 이 자식이.
“너무 매정하게 구는 것 아닌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만난 김에 같이 좋은 시간을 좀 보낼 수도 있지.”
“말은 잘하시네요.”
“다른 잘하는 것도 알려 줄까?”
싸늘하게 노려보자 킥킥거리던 박건호가 권정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권정한. 짚어 줄 부분이 있는데.”
“예?”
박건호가 커피를 한 입 더 마셨다. 내 커피인데.
“재밌어 보이길래 구경했는데, 문제가 좀 보이더군.”
“문제요?”
“한이결에게 접근한 직원을 왜 막지 않았지?”
그 말에 권정한이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 이내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방심했습니다.”
“…뭡니까?”
대화를 따라갈 수 없어서 박건호에게 묻자, 그가 팔짱을 끼며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아무리 같은 길드원이라 해도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일 수 있다는 거지.”
“헉, 그렇군요.”
덧붙여진 설명에 민아린이 깜짝 놀라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확실히 나도 방심하고 있던 부분이라 미간을 찌푸렸다.
“뭐. 다행히 방금 그 직원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다음 사람도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길드원을 포함해서 외부 노출이 잦은 이들은 조심해야지.”
“맞는 말씀인 건 인정합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곁에 그 누구도 둘 수 없습니다.”
나를 노리는 자가 어떤 방식으로 정신 지배 능력을 사용하는지 밝혀내지 못한 지금은,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최소한이라는 게 있지 않나. 낯선 사람의 접촉은 될 수 있으면 경계해야지.”
“맞습니다, 한이결 능력자님. 제 실수입니다. 경호원인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권정한이 깔끔한 태도로 사과했다. 이러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박건호가 좋은 지적을 해 준 것도 사실이고. 한숨을 내쉬며 권정한을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심했으니까요. 팀장님도, 이번 일은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밥이라도 같이?”
“그건 나중에요. 나중에.”
계속 미뤄서 미안하긴 한데, 천사연의 과거보다는 한이결의 과거가 급선무였다.
“아, 박건호 팀장님. 그 소식 들으셨나요?”
턱을 괴고 나와 박건호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민아린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신다는 거요! 듣기로는 마스터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맞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이죠.”
박건호에게서 커피를 다시 뺏어 오며 귀를 쫑긋 세웠다. 천사연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역시 그렇네요! 팀장님은 길드에 오래 계셨으니까 알 것 같았어요.”
“성격도 좋고, 능력도 뛰어난 분입니다. 마스터가 인정한 능력자이기도 하고. 다들 알다시피 마스터 성격에 누구 인정하는 모습을 보는 게 쉬운 건 아니라서.”
게다가 천사연이 인정한 사람이라고?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누군데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묻자, 박건호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알려 주면 뭐 해 줄 건데?”
“…그거 알려 주는 게 뭐 어렵다고 치사하게 이럽니까?”
“뭐든 대가가 있는 법이지.”
“아, 됐습니다.”
더러워서 진짜. 내가 직접 알아보고 말지. 짜증이 담긴 내 눈빛을 보며 히죽거리던 박건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우리 유명하신 A급 용병과 밥 한번 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팀장님이랑 밥을 어떻게 먹습니까?”
“집에 초대해 줄 테니 오는 건 어때? 안전 하나는 보장하지. 혼자 오는 거로.”
“그쪽이 제일 위험한데요.”
박건호가 말하면 말할수록 김우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나도 저 변태 같은 헛소리를 더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던 터라,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죠, 민아린 씨.”
“네에.”
“매정하게 떠나가는군…….”
박건호가 짐짓 우는 척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가관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테이블을 치우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데, 뒤에서 커다란 덩치가 졸졸 따라왔다.
“…왜 쫓아옵니까?”
“23층으로 가는 거 아닌가?”
“맞는데요.”
내 대답에 박건호가 뭐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말했다.
“나도 가려고. 23층.”
“댁이 23층에는 왜 오십니까?”
거기는 내 방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글쎄. 왜일까?”
“꺼져요.”
결국 내 방에 놀러 오겠다 이거잖아. 단호하게 몸을 돌리자, 박건호가 히죽거리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러지 말고. 진짜 심심해서 그래.”
“치워.”
김우진이 박건호의 팔을 감정을 실어 거칠게 쳐 냈다. 대신 치워 줘서 고맙네.
“한가하신 거 알겠는데, 그렇다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
“한이결 씨.”
날 바라보던 박건호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담백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처럼 검은 정장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우서혁이 서 있었다.
“잘 쉬고 계십니까.”
내 뒤에 있는 민아린에게 눈인사를 보낸 우서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서로를 무시하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살펴보다, 일단 인사부터 받았다.
“그럼요. 우서혁 씨는 여전히 바빠 보이네요.”
“평소와 같습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우서혁이 들고 있던 서류들 사이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일주일 뒤에 한국을 방문하는 중요한 손님이 한 분 계시는데, 혹시 아십니까?”
중요한 손님이라면… 카페에서 민아린이 박건호에게 물었던 그 사람 말하는 건가? 천사연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예, 대충 알기는 합니다.”
“그쪽에서 한이결 씨를 만나 보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 왔습니다.”
“네?”
나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당황해서 박건호를 돌아보니, 그도 처음 듣는 사실인지 입가를 매만지며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그 사람 이름도 모르는데요.”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니, 우서혁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것 같아, 서류에 관련 정보도 추가해 뒀습니다. 한번 천천히 훑어보십시오.”
그 부분은 우서혁이 따로 준비해 준 모양이다. 감사 인사를 하려던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생각에 급히 우서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 우서혁 씨.”
“…예.”
우서혁의 시선이 소매를 잡은 내 손을 잠시간 향했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혹시 천사연 마스터가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계십니다.”
역시 그렇네. 모를 리가 없지, 젠장.
“서류를 보시면 알겠지만… 만남을 수락할 시, 입국 날짜에 맞춰 공항으로 마중 나가셔야 합니다.”
“뭐라고요?”
공항으로 마중까지 가야 한다고? 길드 내 카페에서 만난 직원도 경계해야 할 지금 상황에서?
“제가요? 직접?”
“예. 강요는 아닙니다. 다만.”
우서혁이 잠시 설명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마스터께서는 마중 가는 쪽이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
머뭇거린 이유를 알겠다.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는 나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인 우서혁이 뒤늦게 덧붙였다.
“서류를 보고 나면 한이결 씨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대체 서류에 뭔 내용이 적혀 있길래 그럽니까?”
“그 부분은 저도 모릅니다.”
내내 난감한 태도를 보이던 우서혁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천사연과 엮여서 욕먹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찝찝한 마음에 손에 든 서류만 노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서혁이 무슨 죄가 있겠어. 다 윗대가리가 문제지.
“알겠습니다.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서혁 씨.”
“예.”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우리 뒤를 따라 우서혁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23층 버튼과 최상층 버튼에 각각 불이 들어왔다. 최상층이면 대표실인데. 또 천사연을 만나러 가는 건가.
새삼 천사연의 비서 일을 하는 우서혁이 안쓰러워졌다. 나 같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때려치웠을 텐데… 돈을 많이 받나?
남몰래 우서혁을 딱하게 바라보던 나는 23층에 도착했다는 안내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음, 남은 일 힘내세요. 우서혁 씨.”
“예.”
나와 함께 김우진과 민아린, 권정한이 내렸다. 그때 동안 조용히 서 있던 우서혁은, 내 뒤를 쫓아 마지막으로 내리려는 박건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뭐지?”
“그쪽은 왜 내리십니까?”
23층에는 내 방밖에 없다는 것을 우서혁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보면 모르나? 우리 한이결 용병님 방에 놀러 가는데.”
그 말에 우서혁이 나를 바라봤다.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젓자, 우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애꿎은 사람 괴롭히지 마십시오, 박건호 팀장.”
“괴롭히다니. 말이 좀 그러네. 내가 누구 괴롭히는 거 봤나, 우서혁 비서?”
“궁금하시면 명단을 읊어 드릴 수 있습니다만.”
“하하, 명단? 전부터 생각했는데, 우서혁 비서는 나한테 관심이 참 많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싸우기 시작하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짜게 식은 눈으로 응시했다. 옆에 서 있던 민아린과 권정한은 웃으면서 흥미롭게 구경했고, 김우진은 관심 없다는 듯이 박건호를 버리고 방으로 가자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 괜찮습니다, 우서혁 씨.”
“하지만….”
“계속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민폐잖아요.”
그 말에 우서혁이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머뭇거렸다. 살짝 숙인 얼굴에서 자신도 박건호를 따라 내리려고 고민하는 게 보여서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지금 천사연 보러 가는 길 아닌가?
“서류는 방에 가자마자 바로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도 많은데 우서혁까지 방으로 들였다간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모른 척 선을 긋자, 결국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하라고. 우서혁 비서.”
“그만하고 오기나 하세요, 팀장님.”
순순히 물러서는 우서혁에게 윙크를 날리며 깐족거리는 박건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유치해서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