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새하얗고 깨끗한 장갑 속으로 늘씬한 손가락이 들어갔다. 딱 맞게 끼워진 장갑을 이리저리 둘러본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가면을 집어 들었다. 창백한 뺨에 새겨진 날카로운 흉터가 가면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으흠, 흠. 나지막이 허밍을 흥얼거리며 가면을 쓴 남자가 몸을 가볍게 빙글 돌렸다.
“장난감 하나가 사라진 건 괜찮은데, 카렌이 망가져서 좀 아쉽게 됐네.”
“불쌍한 카렌.”
방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인형 중 하나에서 시무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몇 안 되는 꽤 잘 만들어진 인형 중 하나라 아벨이 아깝다며 며칠째 칭얼거렸다.
“영상도 구하지 못했고.”
카렌이 타 버린 탓에 내장 카메라가 고장이 나 버렸다. 강승건이야 어차피 더는 써먹지 못할 만큼 망가졌으니 상관없지만, 전투 영상을 놓친 것은 손해가 맞았다.
“그래도 바람 능력을 순순히 포기하기는 싫은데….”
가면을 매만지며 잠시간 고민하던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TV 화면이었다.
[정신 지배를 당한 강승건 마스터에게 납치당했던 한이결 능력자는 현재, 레퀴엠 길드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경호원을 배치하여 한이결 능력자의 신변 보호를 강화하고….]
경호원이라.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재밌다니까.”
그렇게까지 지키려 들면, 나도 뺏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오래전, 자신을 정확히 응시하던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남자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벨. 닥터는 지금 뭘 하고 있지?”
“흐응. 몰라. 또 연구실에 처박혀 있겠지, 뭐.”
“불러와.”
“닥터를? 왜?”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인형이 책장에서 툭 떨어지며 물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월광에 남자의 가면이 매끈하게 빛났다.
“새 장난감을 얻어 내든, 아이템으로 게이트에 처넣든… 일단 안전 가옥에서 뽑아내야 다음 계획도 통하지 않겠어?”
“에휴.”
제대로 꽂혔네. 인형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몸을 흐느적 일으켰다.
“이번엔 인형 안 빌려줄 거야.”
“너무하네.”
“너무해도 안 돼! 난 아직도 카렌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크다고.”
장난기 담긴 남자의 말에 인형이 삐친 듯 팩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로 팔짱을 낀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래. 뭐. 그렇지 않아도 내 애들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했으니까.”
“그놈들을 쓰겠다고? 그럼 죽을 수도 있잖아.”
“조절을 잘하면 돼. 죽일 수는 없지. 쓸모가 얼마나 많은데.”
인형의 노란 눈을 바라보며 남자가 이어 말했다.
“그야 좀, 망가질 수는 있는데…. 어차피 저번에 성공했어도 망가지는 거야 똑같았으니까. 나쁘지 않네.”
“전부터 느꼈는데, 넌 진짜 개새끼야.”
“하하, 오빠한테 개새끼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능청스러운 웃음에 인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방을 나갔다. 곧 인형의 부름으로 자신을 만나러 올 닥터를 생각하며 남자는 계획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
“이대로는 안 돼요, 이결 씨.”
“예?”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민아린을 올려다봤다.
“위험한 상황이니 몸을 사리는 건 저도 동의하지만, 이렇게 방 안에만 박혀 있으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나는 당황하며 몸을 슬쩍 일으켰다.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던 민아린이 시선을 돌려 김우진에게 물었다.
“우진 씨도 저와 같은 생각이죠?”
“…조금요.”
“허.”
김우진이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어이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방에 있을수록 은근히 좋아했으면서, 저 자식이.
“이러다가 여기서 건강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시려고요, 이결 씨.”
민아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건강이 나빠지다니.
“저 건강 괜찮은데요?”
“아무리 휴식이 필요했다지만, 그래도 적당한 운동은 중요해요. 이렇게 계속 누워 계시면 건강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아니, 저기. 민아린 씨?”
“안 되겠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저랑 같이 놀러 가요!”
“예에?”
급기야 민아린이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그 행동에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김우진 분신도 눈을 반짝 빛내며 남은 내 팔에 매달렸다. 둘이서 뭐 하는 거야.
“그래도 밖은 위험할 것 같은데요.”
“밖은 아니고, 1층에 있는 카페 정도는 괜찮죠? 이번에 신메뉴가 나왔대요. 봄 시즌이잖아요.”
“아하.”
그제야 민아린이 놀러 가자고 조르는 이유를 알아챘다. 신메뉴가 먹고 싶었나 보군. 순순히 소파에서 일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같이 가실래요, 권정한 씨?”
“와, 저도 끼워 주시는 거예요?”
커피를 마시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권정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있던 분신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 미간을 꾹꾹 눌러 펴 주며 말했다.
“어차피 경호하러 따라오실 거잖아요.”
“그것도 그렇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픽 웃으며 누워 있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털었다.
“가요, 민아린 씨.”
우리는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카페로 향했다. 길드 내에 있는 카페는 한 달 전에 새로 들어섰는데, 매장도 크고 메뉴도 다양해서 길드원들이 자주 애용한다고 민아린이 알려 줬다.
봄이 오긴 했는지, 쇼케이스에 진열된 디저트나 디스플레이에 분홍색이 유독 많았다. 민아린이 분홍 초콜릿 가루가 뿌려진 케이크를 고르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분들은 뭐 드실래요? 제가 쏠게요.”
“음, 글쎄요. 뭐가 좋을지.”
“이결 씨, 단 거 좋아하시니까 이거 어때요? 이번 신메뉴인데, 맛있을 거예요.”
민아린이 계산대 앞에 세워진 디스플레이 하나를 콕 찔렀다. 벚꽃라떼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분홍 크림이 잔뜩 올려진 커피였다. 아메리카노만 아니면 딱히 상관없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김우진은 나와 똑같은 메뉴를 택했고, 권정한은 커피는 이미 마셨으니 음료가 좋겠다며 에이드를 선택했다. 트레이에 음료와 디저트를 한가득 쌓아 두고 자리에 앉자,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주문을 많이 했다고 보는 건 아닐 거고, TV만 틀면 나오는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니, 뉴스에서 종일 떠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한데.’
강승건은 뒷전이고 내 얘기만 계속하니 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레퀴엠에서 내게 경호를 붙여 줬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했다는 하태헌의 말을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시선에 민아린이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길드 내에서 이 정도면, 밖에 나가면 엄청나겠어요. 이결 씨.”
내 옆에 앉아 있던 권정한이 오렌지색으로 반짝이는 에이드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SNS에서도 한이결 능력자님 얘기로 시끄러우니까요. 화제가 된 것도 있는데, 이미지가 워낙 좋게 잡혀서.”
“그렇습니까?”
SNS는 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은 자주 확인하는 김우진도 권정한의 말에 동의했다.
“영웅이니 뭐니, 이상한 단어를 붙여서 떠들고 있어. 나쁜 의미는 아니라지만 거슬리긴 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민아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좋더라도 조금만 삐끗하면 순식간에 바뀌는 게 여론이잖아요. 연예인도 아니고, 이런 쪽으로 유명해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정도인가. 내 예상보다도 심한데. 목덜미를 쓸며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저기….”
머뭇거리며 말을 건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연분홍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볼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하, 한이결 능력자님 맞으시죠?”
“……?”
누구지? 일단 그렇다고 대답하며 멀뚱히 바라보자, 여자가 더욱 붉어진 얼굴로 급히 수첩과 펜을 내밀었다.
“사,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사인요?”
얼떨결에 수첩과 펜을 받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사인? 내가 좀처럼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권정한이 몸을 가까이 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연예인이 팬한테 해 주는 그 사인 맞아요. 그냥 자주 쓰는 사인을 적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연예인 사인을 왜 나한테? 영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여자에게 묻기도 애매했다.
“이거 맞습니까?”
“네, 네! 감사해요!”
결국 권정한의 말대로 사인을 쓱쓱 해서 수첩과 펜을 여자에게 돌려주자, 그녀가 결과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내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순식간에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앞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한가롭게 구경하던 민아린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근데 이결 씨, 사인이 독특하네요.”
“예?”
“보통 사인은 본인 이름으로 하지 않나요?”
“맞아요. 워낙 빨라서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이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대충 권세….”
“그냥 손 가는 대로 쓴 겁니다. 별 의미 없어요.”
아차 싶은 마음에 권정한의 말을 끊어 내며 변명처럼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이전에 써 온 사인을 해 버린 것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한숨을 삼켜 내며 담담한 척 커피를 들이켰다.
“그보다 방금 저 사람, 관리부서에서 엄청 인기 많은 직원인 거 알아요?”
“그런가요?”
“저도 얘기만 들었는데, 직접 만나 보니까 바로 알겠네요. 엄청 예뻐요. 그렇죠?”
예뻤나? 부끄러워한다는 인상만 남은 터라, 민아린의 말에 공감해 주기가 어려웠다. 내가 눈만 굴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김우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예쁘다고… 생각했어?”
“음, 글쎄.”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모르겠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제 눈에는 민아린 씨가 더 예쁩니다.”
“어머.”
모를 때는 상대방 칭찬으로 넘기는 게 최고지. 내 예상대로 민아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같은 질문은 더는 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여유를 느끼며 커피를 마시는데, 이번에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안녕. 인기남.”
“헉.”
어깨를 껴안아 오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나는 흔들리는 커피 잔을 다급히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쉬는 날인지, 티에 청바지 차림새의 박건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내게 윙크를 보냈다.
“헬로.”
“여기서 뭐 하십니까, 박건호 팀장님.”
“카페에 커피 마시러 오지, 뭐 하러 오겠어.”
“…….”
맞는 말이군. 할 말이 없어진 나를 두고 박건호가 민아린과 권정한, 김우진에게 차례로 인사를 보냈다. 반가워하는 민아린과 권정한에 비해 김우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박건호를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