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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09)화 (109/394)

109화

28. 화풍난양

레퀴엠 길드 근처,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차가 멈춰 섰다. 나는 차 문을 열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하태헌에게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한이결.”

집에서 나온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던 하태헌이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게이트에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연락은 무조건 받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화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은 이해해 주는 건가?’

마지막 말에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불안한 기분을 밀어 두며 하태헌에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하태헌 씨도 몸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잠시간 내 미소를 바라보던 하태헌이 곧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검은 세단을 뒤로하고 능력을 사용해서 위로 높이 떠올랐다. 이래저래 좀 늦어졌지만, 그래도 꽤 이른 시간이었다.

‘김우진도 11시는 넘어야 오니까, 대충 2시간 정도 여유 있네.’

23층으로 곧장 날아온 나는 창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휴우.”

창틀에 걸터앉아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운동화 신발 끈을 푸는데, 돌연 닫혀 있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서 고개를 든 그곳에는 싸늘한 표정의 김우진이 서 있었다.

“…….”

“…….”

신발 끈을 붙잡은 자세 그대로 굳은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김우진을 바라봤다.

“김우진?”

네가 이 시간에 여기를 왜… 당황한 나를 두고 김우진이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철컥.

들어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문을 잠가 버린다. 딱딱하게 굳은 김우진의 얼굴과 무거운 분위기에 신발도 벗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한참을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하던 김우진이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갔다 왔어? 경호는 기껏 뽑아 놓고 혼자서.”

“그…….”

변명할 여지 없이 딱 걸린 터라 어색하게 웃었다. 신발을 벗지도, 창틀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채로 머쓱하게 웃으니, 김우진이 뾰족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오늘은 오전 훈련이 없어서, 간만에 아침밥이나 해 주려고 왔더니… 방이 비어 있잖아.”

“그, 그랬냐?”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나 자는 동안 기다리기 싫다고 해서 도어 록 번호를 알려 줬었지. 그래 놓고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나 했더니.

“1시간이나 기다렸어.”

시무룩한 음성으로 투덜거린 김우진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내가 미처 못 푼 운동화 끈을 대신 풀기 시작했다.

“야, 김우진. 일어나. 내가 할게.”

이 자식이 부담스럽게 왜 이래. 놓으라는 의미로 발을 살짝 흔들었지만, 김우진은 도리어 발목을 힘주어 잡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

내 거절에도 고집스럽게 운동화 끈을 풀고 양발에 신겨진 신발을 벗긴 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밥은?”

“어?”

“밥 먹었냐고.”

손에 신발을 든 김우진이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밥. 밥은… 먹었긴 하는데. 그냥 안 먹은 척해야 하나?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김우진이 삐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먹고 왔나 보네.”

“…….”

“됐어. 어차피 할 얘기도 있었으니까. 신발 놓고 올게.”

김우진이 내게서 팩 등을 돌리고는 잠가 뒀던 침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다행히 크게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 문은 왜 잠갔던 거지?

‘근데 난 왜 김우진의 눈치를 보는 거야?’

외출 좀 잠깐 한 게 뭐 문제라고.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괜히 볼을 긁적였다.

***

아침밥을 같이 먹으려고 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식탁에 샌드위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보니 어째 양심이 더 아파졌다.

“김우진, 이리 와 봐.”

뚱한 표정의 김우진을 손짓으로 부르며 하태헌에게 받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전에 쓰던 건 부서져서 새로 만들었어. 이거 때문에 나갔다 온 거야.”

“뭐? 핸드폰이 왜 부서져?”

바뀐 번호를 알려 주며 나도 김우진 번호를 다시 등록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상관없어. 어차피 천사연이 준 핸드폰이었으니까.”

“그럼 이건? 네 명의야?”

“아니. 그건 아니고.”

내 명의로 만든 핸드폰은 열흘도 못 가 천사연에게 들켜서 또 개박살이 날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태헌 부마스터에게 부탁했어. 핸드폰 좀 구해 달라고. 어쨌든 있어야 편하니까.”

“하태헌 부마스터?”

내 대답이 예상외였는지,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김우진의 표정이 이내 암울하게 시들었다.

“그 사람, 저번에 로헌으로 오라는 제안도 했었지? 진짜 많이… 친한가 보네.”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터라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김우진이 얼굴을 슬쩍 옆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핸드폰 정도는 새로 구해 줄 수 있는데.”

“핸드폰도 중요한데, 그보다는 로헌으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하려고 만난 거야.”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하고. 핸드폰을 거실 소파에 대충 던지며 김우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으응.”

바뀐 번호를 저장한 김우진이 잠시간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알아 달라고 했던 정보 말이야. 상황이 좀 안 좋아.”

“안 좋다면, 얻기 힘든 건가?”

“일단 사마엘이나 인형술사 쪽은 제대로 알아내려면 우리가 정보를 더 줘야 할 것 같아.”

그런가. 확실히 그 정도로 뭔가 얻기에는 힘들겠지. 최소한 인형술사 이름이라도 안다면 좋았을 텐데.

이래저래 이해되는 설명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강승건은?”

“강승건은….”

그 순간, 김우진의 고동색 눈에 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얻을 수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누군가가 강승건의 정보를 잠가 뒀나 봐.”

“정보를 잠갔다고?”

생소한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김우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관련 정보를 한 번에 지우기 위해 우선으로 하는 작업이래. 꽤 실력자들만 하는 방법이라서, 잠가 둔 정보를 뚫고 빼내려면 힘이 좀 든다고 하더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승건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대체 누가 지우려는 거지?”

강승건의 정보를 지워서 이득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알겠어.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린대?”

“우선은 2주 정도. 그사이에 일이 생기면 그쪽에서 연락해 올 거야.”

“이유가 그렇다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알려 줘서 고마워.”

강승건의 정보는 한이결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얻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강승건이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분명 천사연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한이결. 말해 줄 게 하나 더 있어.”

“음?”

침착하게 한이결의 과거와 천사연, 그리고 강승건의 연관 관계를 따져 보던 나는 김우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에도 한참을 망설이던 김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줘야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뭔데?”

“네가 납치됐을 때 말이야.”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내 손목, A급 팔찌로 향했다.

“마스터가 네 위치를 알아냈어. 그래서 늦지 않고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천사연이 알아냈다고?”

나는 당연히 강승건이 남긴 흔적을 토대로 찾아온 줄 알았는데. 납치당한 장소가 제이나 길드 소속 구역이었고, 강승건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와 똑같이 표정을 굳힌 김우진이 대답했다.

“확실해. 내가 바로 앞에서 봤으니까. 그때 재계약을 하고 있었거든.”

“어떤 식으로 알아냈는지도 확인했어?”

“어떤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어. 아이템의 코드를 말하자마자 바로 위치를 파악해 줬고. 한이결, 네가 끼고 있는 그 팔찌.”

그제야 김우진이 왜 내 팔찌를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차오르는 불쾌한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통화로 물어본 거면,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건가 본데.”

“그럴 거야. 분위기를 봐서는, 개인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단체인 것 같아. 서로 코드 네임을 불렀으니까.”

“코드 네임이면, 최소한 천사연도 그 단체 소속이라는 건가?”

“그런 단체는 비밀리에 움직이기 때문에 규모와 소속자를 알아내기가 어려워. 무엇보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 대부분 전문 능력자일 가능성이 크고.”

“잠깐만. 김우진, 너….”

설명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나는 김우진의 새하얀 얼굴을 마주 봤다.

“설마 의심하고 있는 거야? 강승건에 대한 정보를 삭제하려는 상대가 천사연이라고?”

“네가 더 다치기 전에 구해 낼 수 있어서 마스터에게 감사하긴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의심스럽기는 해.”

단호한 대답에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나였다. 김우진이 나와 친해지긴 했어도, 녀석은 기본적으로 천사연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텐데.

“하이드, 그러니까 우리 쪽 정보꾼과 나는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냈어. 덕분에 보고 들은 게 많아.”

“…….”

“물론 내 오해일 수 있어. 내 말을 꼭 믿어 달라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는 뜻이야. 한이결. 나는 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하는 김우진에게서 진심과 함께 낯선 감정이 얼핏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로 인해 김우진의 미래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원작과 달라졌다.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걸까?’

이제는 뭐가 정답이고, 옳은 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소설 속 어비스와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동경하는 천사연을 외면하며 내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우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초조한 듯 눈꺼풀을 깜빡이는 김우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손바닥에 감겨 오는 김우진의 손이 놀란 듯 움찔 떨렸다.

“나도 그래, 김우진.”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는 내 방식대로, 이들을 지켜 내는 수밖에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김우진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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