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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08)화 (108/394)

108화

  

“크흠. 하태헌 씨.”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핸드폰도 구해서 한시름 돌렸으니, 나는 본래 하려던 얘기를 꺼냈다.

“저번에 전화로 하셨던 제안 말입니다.”

“로헌으로 오라고 했던 것 말인가?”

“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는 쉽사리 이어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하태헌은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볼 뿐,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우선 도와준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로요. 저도 상황만 된다면 염치없어도, 하태헌 씨에게 의지하고 싶은데요. 그… 제가 아직 레퀴엠에서 해야 할 게 남아 있습니다.”

정확히는 레퀴엠이 아니라 천사연 곁이지만, 굳이 하태헌 앞에서 천사연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레퀴엠으로 돌려 말했다.

잔잔한 눈빛으로 내 말을 끝까지 들은 하태헌이 별로 불쾌하지 않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예상했다. 거절할 거라고.”

“…그렇습니까?”

“레퀴엠에서 정신계 경호원을 붙여 줬다더군.”

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머쓱함에 목덜미를 만졌다.

“주변에 여러모로 민폐를 끼쳤으니까요.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민폐는 모르겠고, 안전을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나였어도 경호를 붙였을 거니까.”

“근데 경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사가 떴더군.”

기사? 뭘 그런 게 기사가 뜨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는데, 하태헌이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한이결. 그럼…….”

“예.”

“…아니다.”

“……?”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하태헌이 당황하는 나를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으면 데려다줄 테니까 기다려라.”

빈 머그잔을 손에 든 하태헌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된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태헌이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얘기를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마음이 놓이자 아까부터 느꼈던 졸음이 본격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머그잔을 놓고 바로 올 거라고 생각했던 하태헌은 아예 설거지하는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한가롭게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를 들으며 묵직하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자꾸만 늘어지는 정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하태헌이 거실로 나올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알아서 깨워 주겠지.

이게 다 우유를 마셔서 그런 거다. 괜히 하태헌의 탓을 하며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 순간, 목덜미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찬 기운에 어깨를 움츠린 나는 본능적으로 따듯한 곳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이마에 닿아 오는 뜨끈한 기운에 꾸물꾸물 파고드니 몸에 닿아 오는 무언가가 움찔 떨렸다.

“추워….”

나도 모르게 웅얼거리자 부드러운 천이 목덜미를 스치고 뜨겁고 무거운 것이 허리에 감겨 왔다. 추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듯함이 몸을 가득 감쌌다.

“음…….”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또다시 몰려오는 졸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

짹. 째잭.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눈꺼풀 너머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으….”

계속 자기에는 너무 갑갑하고 뜨거웠다. 끄응. 뒤척이려고 노력했지만,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한참을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부스스 눈을 떴다. 찬란히 드리운 아침 햇살과 함께 눈앞에 넓게 펼쳐진 것은.

“…엉?”

커다란 가슴이었다. 아침부터 마주한 살색 향연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제야 하태헌의 집에서 잠들어 버린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깨울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재운 거야? 아침이 되도록?

“아, 미치겠네….”

몇 시지? 일단 몽롱한 정신이 좀 깨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허리를 굳건히 감싸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을 알아챘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데.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있는 하태헌의 얼굴을 살폈다. 자는 거 맞나?

코앞에 놓인 하태헌의 맨가슴을 더는 마주 보고 있기 힘들었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하태헌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덥나 했더니, 손바닥에 닿아 오는 하태헌의 피부가 엄청나게 뜨끈했다.

‘몸에 열이 많다더니.’

그래서 벗고 자는 건가? 힘겹게 몸을 반대로 돌려 낸 나는 눈앞을 가득 채웠던 살색이 사라진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하긴 한데, 가까이서 마주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제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허리에 둘린 팔이 너무 무거웠다. 나는 바르작거리며 어떻게든 하태헌을 깨우지 않고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힘겨운 노력 끝에 겨우 반절 빠져나온 그 순간, 팔 근육이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허리가 도로 확 끌려들어 갔다.

“헉…!”

“어디 가지?”

뒤돌아 있는 채로 끌려간 거라 하태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에 와 닿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머쓱하게 말했다.

“저 때문에 깼습니까?”

“아니.”

아니라고? 그럼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는 거야?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아리송한 답변에 머리만 굴리는데, 하태헌이 다시 한 번 더 물어 왔다. 굳게 붙잡힌 허리를 뒤틀며 대답했다.

“일어나야죠. 몇 시인지 확인도 해야 하고….”

말하던 나는 문득 허벅지 안쪽을 찌르는 딱딱한 감촉에 몸을 굳혔다. 뭐지, 이거?

‘이 느낌은 설마…….’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확 돋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하태헌을 불렀다.

“하태헌 씨?”

“말해.”

“그, 지금 제 다리에 뭐가… 닿는데요?”

최대한 침착하게 답하자,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나도 안다.”

“…….”

그게 다야? 더 추가적인 설명 없어? 실수라든가, 오해라든가, 사실은 생수병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는 거냐?’

싸아아, 마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과 식은땀이 흘렀다. 반사적으로 바싹 굳어 있던 나는 뒤늦게 하태헌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겁지겁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아침에 그렇게 된다지만, 옆에 누워 있는 사람한테 닿지 않도록 조심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큭.”

내 꼴이 꽤 웃겼는지, 목을 울려 짧게 웃은 하태헌이 순순히 허리를 놔주었다. 후다닥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온 나를 보며 하태헌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7시밖에 안 됐으니 아침 식사할 시간은 있겠군.”

하태헌이 방금 자고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멋들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탄탄한 상체 근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위협적으로 불끈거렸다.

부러움에 넋 놓고 하태헌의 몸을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이성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바로….”

“간단히 준비할 테니 먹고 가.”

거절의 말이 마치 들리지 않는 양, 하태헌도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그제야 하태헌이 속옷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 벗고 자는 거야, 딱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방금 웃지 못할 상황을 겪어서 그런가, 하태헌의 벗은 몸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스치듯 본 그곳이 어마어마했던 터라 더욱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이에 남색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하태헌이 뻘쭘하게 서 있는 날 돌아보며 침실 문을 열었다.

“나와. 욕실을 안내해 줄 테니.”

“예에….”

어색하게 대답하던 나는 뒤늦게 내 옷차림을 확인했다.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올 정도로 큰 티셔츠와 발을 덮는 트레이닝 바지. 하태헌을 만났을 때 입고 나온 옷이 아니었다.

“이거, 하태헌 씨 옷입니까?”

“그래.”

…잠든 사이에 갈아입힌 건가.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불편할까 봐 갈아입혀 주고 재워 준 사람한테 뭐라 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내쉬며 거치적거리는 소매를 접었다.

“네가 입고 온 옷은 빨아서 널어 뒀다. 지금쯤이면 말랐을 테니 욕실 앞에 놔두도록 하지. 씻고 나와.”

욕실에 날 반 억지로 밀어 넣은 하태헌이 문을 닫았다. 세면대 거울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이결의 얼굴이 비쳤다.

“하아.”

이거 아무래도 잠든 거 자체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근래 좀 무리하긴 했지만, 10살짜리 애도 아니고 남의 집에서 잠들어 버리다니.

한참 동안 거울을 보며 자기비판을 하던 나는 빨리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옷을 벗었다. 잽싸게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 비치된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린 나는 하태헌이 준비해 준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하태헌 씨?”

“여기다.”

주방 쪽으로 가니 고소한 냄새와 함께 프라이팬을 들고 요리를 하는 하태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인덕션의 불을 끄며 말했다.

“앉아라.”

식탁에는 이미 완성된 토스트와 계란프라이가 올려진 접시가 놓여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하태헌이 오렌지주스가 담긴 컵을 놔 주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된 내가 멀뚱멀뚱 토스트를 바라만 보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먹으라는 거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었다.

“음, 잘 먹겠습니다.”

토스트 위에 올려진 계란프라이가 마치 그림처럼 예뻤다. 간단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금방 요리하는 것을 보면, 평소에도 직접 만들어 먹는 타입인 것 같았다.

‘어비스에서도 요리는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고 나와 있긴 했지.’

내가 얌전히 토스트를 먹기 시작하자 하태헌도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컵에는 오렌지주스 대신 블랙커피가 담겨 있었다. 왜 나는 주스지?

우유에 이어 주스까지 챙겨 주는 하태헌의 모습에, 설마 나를 어린애로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뭐. 맛있긴 한데. 나도 블랙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어서 좀 억울했다.

물론 얻어먹는 처지에서 이래저래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만 하고 토스트 먹는 데에 집중했다. 설탕이 뿌려져 있는 달달한 토스트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데,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하태헌이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한이결. 너는….”

우우웅-

그러나 하태헌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거실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둔 하태헌의 핸드폰에서 온 전화였다. 눈만 깜빡이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액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하태헌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존댓말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상대방은 이주하인 것 같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텀을 두고 상대방의 말을 듣던 하태헌이 곧 통화를 끝내고 돌아왔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바로 가셔야 합니까?”

“그래. 마저 먹고 있어. 씻고 나올 테니까. 근처까지 데려다주지.”

미처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하태헌은 등을 돌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하태헌이 사 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40분. 다행히 누가 방으로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라, 좀 느긋하게 돌아가도 되긴 하지만….

‘굳이 데려다줄 것까지야.’

남은 계란프라이를 먹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날 노리고 있는 놈들이 있어서 그렇겠지? 이래저래 하태헌에게는 신세만 지는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하태헌은 빠르게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동안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라도 하려는데,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친 하태헌이 나를 막아섰다.

“내버려 둬. 출근하면 따로 고용인이 오니까.”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바싹 붙어 선 하태헌을 올려다봤다.

“하태헌 씨?”

“…내일, 해외 일정이 잡혔다.”

해외 일정?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한 것도 잠시, 곧 하태헌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중국입니까?”

“그래.”

“…….”

하태헌과 했던 계약이 떠올랐다. 그래. 벌써 3개월이 지났나.

“이상 현상 위험이 있는 게이트를 들어갈 예정이라, 2주는 걸릴 거다.”

2주라. 내가 마땅한 대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하태헌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이어 말했다.

“갔다 오면 SS급 코트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계획도 잡혀 있고.”

“음, 그렇군요.”

“한이결. 시선 피하지 말고 날 봐.”

코앞에서 들려오는 하태헌의 낮은 목소리는 내게 예언자냐고 다그치던 3개월 전과 달리 무척이나 잔잔했다.

“내게 할 말 없나?”

할 말이라. 할 말은 언제나 있긴 하지. 잠시간 머뭇거린 나는 하태헌을 향해 쓰게 웃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하태헌 씨.”

“…….”

내 대답에 하태헌이 아주 짧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감정을 알아챘지만, 모른 척 몸을 돌렸다.

“이만 가죠. 저도 더 늦어지면 안 돼서.”

등 뒤로 하태헌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면,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겨우 관계가 좀 좋아지나 했더니.’

결국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쉽게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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