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와서 골라 봐, 김우진. 네가 쓸 건데,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난 괜찮아. 안 사 줘도….”
“안 돼. 난 돈을 써야겠어.”
내 돈은 아니지만. 단호하게 밀어붙이는데도 김우진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반면 권정한은 어느새 서글서글한 얼굴로 다가와 디자인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예쁘네요. 김우진 선배님이랑 어울리기도 하고.”
“어디… 이거요? 이게 뭐지? 고양이인가?”
“맞습니다, 고객님. 고양이 외에도 강아지나 새 같은 동물 디자인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귀엽네요. 그렇죠?”
“그렇네요.”
“하아…….”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고르는 나와 권정한을 조용히 바라보던 김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김우진이 고른 건 고양이나 강아지가 아닌, 다소 무난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7주짜리 10개를 한 번에 계산하자 옷을 살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금액이 나왔다.
계산이 끝나고, 천사연의 블랙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김우진에게 말했다.
“이제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말고 아트 인벤토리에 넣어. 그래도 A급 무기면 꽤 가격이 나가는 아이템인데, 그냥 갖고 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
“으응.”
김우진이 날 바라보며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고마워.”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나 보다. 살짝 달아오른 김우진의 귀를 보며 픽 웃었다.
“뭐, 내 돈도 아닌데.”
“너는? 넌 안 사도 돼?”
“나는 필요 없지. 딱히 쓰는 무기도 없는데.”
중요한 물건은 차수연에게 인벤토리 자리를 빌려 놨으니 거기에 맡기면 되고.
어쨌든 쇼핑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어차피 백화점에서 뭐 좀 사는 거로 천사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기분이나 좀 좋고 마는 거지.
우리는 그렇게 양손 가득 쇼핑백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길드로 돌아왔다. 23층까지 경호를 해 준 권정한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옷 선물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내일 뵐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세요.”
내일 또 온다는 권정한의 말에 옆에 있던 김우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다행히 끼어들진 않았다.
권정한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오자, 김우진이 내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휙 뺏었다.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씻어.”
“옷이 꽤 많은데. 혼자 할 수 있겠어?”
김우진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순식간에 분신을 만들어 냈다. 능력을 집안일 하는 데 쓰다니…. 괜찮네. 엄청 편해 보이잖아.
습관처럼 내게 안겨 오는 분신의 목덜미를 잡아챈 김우진이 턱짓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됐으니까 씻고 나와. 어차피 정리하는 건 너보다 내가 더 빨라.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둘게.”
“…….”
거참, 맞는 소리라서 뭐라 반박할 수도 없고.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욕실 문을 열었다.
샤워를 끝낸 후,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침실로 들어온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낯익은 케이스를 발견했다. 천사연이 준 핸드폰이 담긴 케이스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분명 쓰레기라고 하고 던져 버렸었는데…. 김우진이 정리하면서 여기 놓고 갔나?’
하긴. 쓰레기라기엔 케이스가 너무 고급스럽긴 했다. 한숨을 내쉬며 안에 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천사연이 쓰는 핸드폰과 똑같은 기종이라 더 싫었다.
“쯧….”
쓰던 핸드폰은 천사연이 백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구겨서 망가뜨렸으니, 날아간 번호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혀를 차며 새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부르르 진동하며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천사연: ^^」
“뭐야?”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왜 사람 기분 더러워지게 이딴 걸 보내고 있어.
핸드폰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걸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천사연이 핸드폰에 뭔 짓을 해 놨을지 모르는 일이고. 전원을 끈 핸드폰을 다시 케이스에 넣어 두며 고민했다.
‘그 방법 말고는 없나….’
이런 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일단 침실 문을 열고 거실을 슬쩍 살폈다. 김우진은 분신과 함께 집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몰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침대 매트리스를 능력으로 들어 올렸다.
처음 하태헌을 만났을 때 받았던 핸드폰. 이걸 다시 쓰게 될 줄이야. 허탈하게 웃으며 바로 전화 연결을 눌렀다.
[한이결?]
웬일로 통화를 바로 받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하태헌 씨.”
[뭐지?]
하태헌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번호로 전화한 거지?]
“일이 좀… 생겨서요.”
괜히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자 하태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예? 그, 제가 벌인 건 아니고.”
[지금 어디지?]
“지금은 레퀴엠 길드….”
[나와.]
“…….”
하태헌의 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오후 6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하태헌을 만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 지금 말고 이따 늦은 밤에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
이번에는 하태헌이 말이 없었다. 왜 그러지?
“아. 혹시 일이 있으신 거라면 괜찮습니다. 다른 날에라도.”
[아니. 이번에 보지.]
내 말을 단호하게 끊어 낸 하태헌이 곧바로 약속을 정했다.
[새벽 1시. 매번 만나던 곳에서 보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태헌 씨.”
[말해.]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습니다.”
***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 낮에 들른 백화점에서 산 베이지색의 스웨트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은 나는 침실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저번보다 날이 훨씬 따듯해서 외투를 걸치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하태헌을 만날 때면 들르는 호텔 옆 골목에 도착하자, 어둠 속에 주차된 그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려고 일부러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 또 늦었네.
“하태헌 씨.”
익숙하게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자, 팔짱을 낀 채로 운전석에 앉아 있던 하태헌이 나를 보며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옷차림이 그게 뭐지?”
“예?”
갑작스러운 의상 지적에 시선을 내려 옷을 바라봤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 나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별로입니까? 새로 산 옷인데.”
“아니. 더 걸친 게 없냐는 뜻이다.”
아. 의상 지적이 아니라 그렇게 입으면 안 춥냐는 질문이었나 보다.
“괜찮던데요?”
고개를 기울이며 하태헌의 몸을 살폈다. 살짝 품이 넉넉한 흰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하태헌 씨야말로 그렇게 입으면 안 춥습니까?”
“몸에 열이 많아서. 출발하지.”
하태헌은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것처럼 망설임 없이 차를 몰았다. 핸들을 잡은 하태헌의 커다란 손을 잠시간 넋 놓고 바라보던 나는 그 모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금… 저번처럼 하태헌 씨 집으로 가는 겁니까?”
“당연한 걸 왜 묻지?”
하태헌이 오른쪽으로 차를 꺾으며 이어 말했다.
“정신계 능력자가 언제 어느 때 접근해 올지 모르니, 잠깐이라도 안심할 수 없다. 집이 제일 안전해.”
“그건, 그렇지만…….”
결국 또 나 때문인가. 아무리 봐도 하태헌은 집에 누굴 들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이번에도 하태헌에게 신세를 지게 돼서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곧이어 도착한 하태헌의 집은 저번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현관 앞에서 멀뚱히 서 있자, 하태헌이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있어라. 마실 걸 가져다줄 테니.”
“네.”
혹시 또 술인가? 그때 마신 와인이 꽤 마음에 들었던 터라 내심 기대하며 소파에 앉았다.
주방으로 들어간 하태헌은 얼마 가지 않아 새하얀 머그잔을 손에 들고 걸어 나왔다. 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우유였다.
“마셔라.”
“가, 감사합니다.”
웬 우유? 얼떨결에 건네받은 머그잔은 보기보다 꽤 크고 무거웠다. 하태헌이 들고 있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작아 보였는데. 한 손으로 들기에는 불안해서 양손으로 머그잔을 잡고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요.”
평범한 우유인 줄 알았는데, 단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내 말에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꿀을 넣었다. 남기지 말고 다 마셔라.”
이걸 다? 양이 좀 많은데. 할 얘기도 있는데 우유만 마시다가 시간 다 가겠다. 일단 대화부터 할까 싶어서 머그잔을 내려놓는데, 하태헌이 눈을 번뜩이며 곧바로 내 행동을 제지했다.
“왜 놓지? 다 마셔라.”
“아뇨, 일단 얘기를 좀.”
“다 마시고 해.”
무시무시한 시선에 결국 나는 눈물을 삼키며 머그잔을 다시 들었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마시냐. 벌써 시간은 2시를 넘었는데. 뜨거워서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켤 수도 없고.
그렇게 하태헌의 감시를 받으며 열심히 우유를 마셨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따듯한 우유를 계속 마시니, 본격적인 얘기는 하지도 못했는데 몸이 노곤노곤 늘어지기 시작했다.
피곤함에 뜨끈해진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빈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다 마신 것을 확인한 하태헌이 소파 옆에 놓인 협탁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부탁했던 핸드폰이다.”
하태헌 본인이 쓰는 기종과 똑같은 핸드폰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감사합니다. 전에 쓰던 것은 망가져서 곤란하던 차여서요.”
“망가진 이유가 뭐지?”
“음… 천사연이 부쉈습니다. 새 핸드폰을 받긴 했는데, 순순히 사용하기에는 좀 찝찝해서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핸드폰을 구해 준 하태헌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쯧.”
날 바라보는 하태헌의 시선에서 한심함이 느껴졌다. 분명 ‘이 멍청한 놈은 뭐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좀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하태헌 입장에서는 내가 그래 보일 만하지.
“아무튼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혹시 차수연 씨 번호랑 홍시아 마스터 번호 좀 알 수 있습니까? 아, 그리고 김수환 씨 번호도요.”
“…….”
“하태헌 씨?”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긴 다리를 멋들어지게 꼬며 입을 열었다.
“내 번호는 왜 안 묻지?”
“예? 아아.”
별걸 다 묻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하태헌 씨 번호는 이미 외우고 있는데요?”
“…내놔라. 대신 저장해 줄 테니.”
오, 그런 배려를. 손이 느린 나보다 하태헌에게 맡기는 게 좋을 테니, 나는 고민하지 않고 핸드폰을 하태헌에게 넘겨줬다.
내 예상대로 하태헌은 빠른 속도로 번호를 저장했다. 돌려받아서 확인해 보니 부탁한 번호들 외에 하태헌의 번호도 저장이 되어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