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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05)화 (105/394)

105화

27. 꽃망울이 맺혔습니다

다른 수행원도 아니고 우서혁을 보낸 것은 피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입 안에 감도는 한숨을 억지로 삼켜 내며 김우진에게 말했다.

“다녀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있어. 금방 올게.”

“나도 같이 가.”

“아니, 됐어. 방에서 기다려.”

천사연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 혼자 가는 것이 나았다. 저번처럼 또 목이라도 조를 수 있으니까.

“…알겠어.”

머뭇거리던 김우진이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진과 권정한을 방에 두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우서혁의 뒤를 쫓아갔다.

“한이결 씨.”

“예?”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춘 우서혁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일이 많아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기절해 있을 때, 우서혁이 나를 찾아왔었다는 민아린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멀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우서혁 씨 번호를 몰라서 못 했네요. 제가 기절한 동안 병실에 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했으니, 걱정되더군요.”

걱정까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우서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 제가 사라지셔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한이결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최상층 버튼을 누른 후 나를 바라보는 우서혁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딘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한이결 씨는 납치당한 피해자입니다. 더욱이 상대는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였으니, 한이결 씨 개인이 어찌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는 더 조심할 필요는 있어 보이는군요.”

“음.”

나는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 슬쩍 웃었다. 어디서 들어 본 말인가 했더니.

“며칠 전에 박건호 팀장님도 딱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그렇습니까?”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짧은 순간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박건호와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혹시 박건호 팀장님을 불편해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우서혁에게 물었다.

미친놈 같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박건호와 매사 무덤덤한 우서혁이 서로 관련된 일에만 이토록 예민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궁금하기도 하고.

“이유 같은 건 딱히 없습니다. 박건호 팀장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깔끔한 설명이었다. 하긴, 딱히 큰 사건이 없더라도 호감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박건호나 우서혁 둘 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니,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한이결 씨.”

“네?”

대표실 앞에 서 있던 수행원들을 손짓으로 물린 우서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스터와 불유쾌한 일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

김우진은 어떻게 넘겼지만, 우서혁은 아무래도 정면에서 내 표정을 모두 봤던 터라 눈치채고도 남을 만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냥,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라서요.”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질문을 G5 구역 게이트에서도 들었었지. 어찌 보면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긴 하지만… 우서혁에게 유난히 자주 들키는 상황이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우서혁 씨?”

앞으로는 더 조심하자고 생각하며 대표실 문을 막고 서 있는 우서혁을 올려다봤다. 전처럼 고민하듯 고개를 살짝 숙인 우서혁이 정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드십시오.”

커다란 주먹에서 내 손바닥 위로 톡 떨어진 것은 분홍빛 포장지에 싸여 있는 작고 둥근 사탕이었다. 갑자기 웬 사탕? 아이템도 아니고. 의아해서 눈만 깜빡이는데, 우서혁이 잠시간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단 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음. 네. 좋아하긴 하는데….”

“저는 이제 일정이 있어서 외부로 나가 봐야 합니다. 사탕은 마스터와 만나신 후에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뭔가 했더니, 우서혁 나름의 위로인가 보다. 뒤늦게 사탕의 의미를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탕을 손에 쥐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깔끔하게 등을 돌린 우서혁이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손에 잡혀 있는 사탕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복도 전등 빛에 분홍 포장지가 예쁘게 반짝였다.

깜짝 선물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포장지가 분홍색인 걸 보면 딸기 맛인가? 새까만 정장을 입은 체구 건장한 남자가 작은 분홍색 사탕을 주다니, 다시 생각해 보니 꽤 웃겼다.

‘나쁘지 않네.’

사탕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대표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심호흡하고 손잡이를 당겨 밀자,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대표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관리 본부에서 자료를 보내오더군.”

등을 돌린 채로 통화를 하는 천사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문을 닫으며 몸을 기대고 섰다. 핸드폰에서는 흐릿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데없는 말이군. 아니. 관심 끄라고 전해.”

시큰둥한 음성으로 대답한 천사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는데. 됐으니까 일정 전해지면 연락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나를 응시한 채로 대화를 이어 가던 천사연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가차 없이 통화를 끊어 내며,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앉아.”

그의 말대로 소파에 앉자, 천사연이 핸드폰을 정장 안주머니에 넣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경호로 권정한을 뽑았더군.”

일이 있었는지, 평소보다 더 각 잡힌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천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긴장으로 굳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대답했다.

“뽑으라며.”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쓸 만한 능력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건조한 평가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답을 하지 않자, 천사연이 나를 잠시간 바라보다 이어 말했다.

“테이블에 놓인 회색 케이스. 열어 봐.”

“……?”

다소 뜬금없는 말에 앞에 놓인 케이스를 쳐다봤다. 갑자기 뭐야.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천사연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가벼운 미소를 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스를 열기 전까지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한숨을 내쉬며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핸드폰?”

보석이라도 들어 있을 것처럼 고급스럽게 생긴 케이스에 들어가 있는 것은 새 핸드폰이었다. 게다가 뭔가 낯익은 디자인인데.

“지금 번호는 유출됐으니, 바꾸는 게 낫겠지. 이제부터는 그거 써. 갖고 있던 핸드폰은 놓고 가고.”

“하….”

조명에 매끈히 빛나는 새 핸드폰을 바라보던 나는 천사연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이거.

“나랑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뻔뻔하게 G5 게이트 자료를 넘길 때부터 지금까지. 종잡을 수 없는 천사연의 태도에 나 혼자만 있는 대로 휘둘리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실망했다느니 어쨌다느니 목을 졸라 놓고, 이제 와서 챙겨 준들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새 핸드폰을 케이스에 다시 넣었다.

“필요 없어.”

케이스를 저 멀리 밀어내자, 천사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할 텐데?”

“경호는 나 때문에 강남 사건이 또 벌어지지 않았으면 해서 받아들인 거야. 너한테 무언가 받고 싶은 것도, 받을 마음도 없어.”

“받을 마음이 없다라….”

천사연이 웃는 얼굴로 내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어째 불안감이 몰려왔다. 천사연과 단둘이 마주한 상황에서, 이런 흐름은 끝이 항상 좋지 않았는데.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신경 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멱살이 붙잡히며 그대로 소파에 처박혔다. 천사연이 순식간에 내 몸 위에 올라타며 허벅지를 손으로 잡아 눌렀다.

“시발, 작작 좀 해!”

예상하였음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신체적 차이가 짜증스러웠다. 이를 악물며 천사연의 가슴팍을 힘주어 밀어냈지만, 돌덩이 같은 몸은 아무리 밀어내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가만히 같은 소리 하네. 무시하고 계속 발버둥 치자 잡힌 허벅지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윽, 하지…….”

“계속 움직이면 만져 줘서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개소리, 읏!”

날 내려다보는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에 장난기가 깃드는 순간, 허벅지를 잡아 누르던 손이 안쪽으로 부드럽게 쓸고 들어왔다. 허벅지 안쪽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제, 제정신이 아니야. 이 미친….’

목이 졸렸을 때보다 더한 공포감에 몸이 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반항을 그치고 얌전해지자,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비웃은 천사연이 본래 목적이었던 바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결아.”

천사연이 무리 없이 주머니 속 내 핸드폰을 꺼냈다. 김우진이 하도 갖고 다니라고 잔소리해서 챙긴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두고 올 걸 그랬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받아먹어. 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내 미간이 처참히 구겨지는 것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보란 듯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직, 순식간에 액정에 금이 가고, 핸드폰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다.

“그동안 쓸데없는 연락 많이 왔을 텐데. 마음 편하게 새 핸드폰 써.”

“하, 이 또라이 새끼가.”

“칭찬 고맙군.”

종이처럼 찌그러진 핸드폰을 가차 없이 뒤로 던져 버린 천사연이 몸을 일으키며 아까 밀어냈던 케이스를 내 손에 억지로 쥐여 줬다.

“한이결.”

케이스를 보며 입술만 깨무는데, 천사연이 서늘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올렸다.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잊지 마, 너와 내 관계를. 감정 같은 불필요한 건 버리고, 내게 얻을 수 있는 이득만 생각해. 나도 그럴 테니까.”

“…….”

감정 같은 불필요한 건 버리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

나는 짜증스럽게 웃으며 천사연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러자 천사연이 재밌다는 듯이 눈을 반짝 빛냈다.

“아주 제대로 뽑아 먹어 줄 테니까 기대해, 빌어먹을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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