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어느새 날이 많이 따듯해졌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김이 어린 다홍색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여자가 정밀하게 세공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클로에.”
“어차피 지금은 할 일도 없잖아요.”
담담한 말에 앞에 앉아 있던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렇긴 한데, 한국이라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한국을 가겠다는 계획은 한 달도 더 전에 말했을 텐데요?”
“나한테 설명도 없이 레퀴엠 길드에 연락까지 하고….”
“때마침 천사연 마스터가 저를 찾더군요. 이왕 한국으로 가는 거, 오랜만에 천사연 마스터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요.”
천사연. 그 이름에 남자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천사연을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다르게, 클로에는 천사연과 꽤 오래 인연을 이어 온 친우 사이였다. 친우를 만나러 가겠다는 걸 억지로 막을 수도 없고.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피곤한 얼굴을 했다.
“혼자는 안 돼. 경호 1팀을 붙여 줄 테니까 데려가.”
“1팀은 인원이 너무 많아서 싫어요. 한두 명이면 충분한걸요. 한국은 치안도 좋고요.”
“치안이 좋다니? 최근 한국만큼 난리인 곳이 없어! 며칠 전에도 S급 하나가 정신 지배에 걸려서 도로를 죄 부숴 놨다는데!”
클로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고,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녹안이 무언가를 떠올리듯 반짝 빛났다.
“알아요. 저도 봤어요. 인터넷에 퍼진 영상.”
“그래. 지금 상황에선 꽤 위험한 나라야. 그러니까 경호팀은 받아들이는 게―”
“그래서 가려는 거예요.”
“뭐?”
“원래는 한국에서 휴가나 즐기려고 했는데… 목적이 바뀌었거든요.”
뜻 모를 말을 한 클로에가 시선을 올려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한 달 전에 갔으면 만나지도 못하고 올 뻔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무슨… 만나려는 게 누군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국 강남 사건의 영상을 떠올렸다. 거기에 클로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장면이…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그제야 영상 끝부분을 기억해 냈다.
“설마 A급 바람술사? 그 능력자 말하는 거야?”
“맞아요.”
정답이었는지 클로에가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도 남자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아니, 뭐. 나름 대단하긴 한데. 히어로 놈들이라면 여기가 더 많잖아?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여기서 히어로랍시고 설치는 사람들하고는 다르죠. 유치하고 경박스럽고… 그 바람술사 같은 진중한 느낌이 전혀 없잖아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고개만 갸우뚱 기울이는 남자를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클로에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에디에게 연락해 보니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하더군요. 제 일정에 맞춰서 한국으로 건너온다니까, 동생이랑 만나서 푹 쉬고 올게요. 기다리지 말아요.”
단호하게 말하자 남자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에게 매달렸다.
“크, 클로에! 잠깐만. 연락은 해 줄 거지? 영상 통화 같은 거! 그리고 경호팀은?”
“당신도 바쁠 텐데 뭐 하러 꼬박꼬박 연락해요? 그냥 갔다 와서 보면 되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우리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신혼인 거 잊었어?”
“그리고 연애는 7년을 했죠. 걱정하지 말아요. 오래 있지는 않을 거니까.”
“클로에!”
햇빛이 들어오는 화창한 초봄 날, 사랑에 푹 빠져 사는 남자의 구슬픈 외침이 울려 퍼졌다.
***
권정한이 내 경호 담당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딱히 경호할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핫케이크는 처음 만들어 보는 건데, 어때? 괜찮아?”
“응. 최고야. 맛있어.”
내가 밖을 전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 김우진이 해 준 밥과 디저트를 받아먹으며 내가 한 일이라고는 칭찬을 쏟아 내는 게 다였다.
“그, 그래? 많이 먹어….”
내 대답에 김우진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었다. 녀석. 듣자 하니 요즘 요리 잘하는 남자가 그렇게 인기 많다는데, 연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메이플 시럽이 뿌려진 핫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입 안에 넣자 달콤함이 가득 퍼졌다.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음?”
그렇게 한창 디저트를 즐기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설거지하는 김우진을 대신해서 내 옆에 앉아 있던 분신이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민아린은 오늘 바쁠 텐데. 딱히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는데, 문을 열어 주러 나간 분신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꺼져!”
“……?”
누구길래 우리 순한 분신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궁금해서 나가 보자, 분신을 앞에 두고 싱글거리며 서 있는 권정한이 보였다.
“권정한 씨?”
“좋은 오후입니다, 한이결 능력자님.”
“좋은 오후는 개뿔, 안 꺼져?”
분신이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이를 드러냈다. 얘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매번 내 앞에서는 짧게 말하길래 그게 한계인 줄 알았는데. 진정하라는 의미를 담아 분신의 등을 토닥이며 권정한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얘는 김우진 분신인데, 행동이 조금….”
“괜찮아요.”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들어오세요.”
“네.”
활짝 웃는 권정한을 뒤에 달고 거실로 들어오자, 막 설거지를 끝낸 김우진이 얼굴을 왕창 구겼다.
“뭐야?”
“뭐가?”
“쟤는 왜 들여온 거야?”
김우진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권정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뭐, 분신보다 더하네. 김우진의 손을 붙잡아 억지로 내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럼 내쫓냐? 그리고 너 태도가 왜 그래?”
“…내가 뭘.”
“아무리 상대가 너보다 어리다고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되겠어? 앞으로 계속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이럴 거냐?”
“…….”
잔소리를 들은 김우진이 잔뜩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이번 일은 적당히 봐주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 한 번은 둘이 크게 싸울 게 뻔했다.
“반말하지 말고, 노려보지도 마. 알겠어?”
“……알겠어.”
김우진이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뒤에서 두리번거리며 거실을 구경하는 권정한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잘 지내 봐. 친해질 수도 있잖아. 성격 좋아 보이는데.”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김우진이 몇 번이나 험악하게 구는데도 권정한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은 걸 보면, 이해심이 대단히 많은 것 같았다.
‘약간 김우진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심하지도 않고 당사자인 김우진이 눈치채지 못했으니 뭐, 일단은 내버려 둬도 괜찮겠지. 나는 김우진의 어깨를 한번 토닥여 주고, 권정한을 돌아봤다.
“김우진이 핫케이크를 좀 구웠는데, 먹을래요?”
“저야 주시면 좋죠.”
권정한이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정한을 식탁으로 데려오자 김우진이 갓 만든 따듯한 핫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그의 앞에 놔 주었다.
“와. 요리를 잘하시네요.”
핫케이크를 한입 먹은 권정한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보다는 의외라는 느낌에 더 가까웠지만, 김우진은 뭐가 됐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권정한에게서 등을 팩 돌렸다.
“한이결.”
권정한을 경계하듯 멀찍이 떨어져 있던 분신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옆에 앉은 분신에게 혹시 몰라 남은 핫케이크를 밀어 주며 말했다.
“먹을래?”
“안 줘도 돼. 분신은 음식 못 먹어. 액체 정도만 가능해.”
분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것과 동시에 김우진이 앞치마를 벗으며 대신 대답했다. 어쩐지. 뭐 먹는 모습을 못 봤다 했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정한이 김우진의 분신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김우진 선배님의 분신 능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신기하네요. 분신보다는 쌍둥이 같아요.”
그 말에 이번에는 분신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팩 돌렸다. 쌍둥이 같다라.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를 돌리는 게 좋겠다.
“크흠.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음.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 짧은 새에 핫케이크를 깔끔하게 먹어 치운 권정한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경호를 맡았는데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이래도 되나 싶어서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려고 왔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제가 밖을 안 나가서 그런 건데.”
“연습할 때보다 월급은 훨씬 많아졌는데, 놀기만 하는 게 조금 눈치 보여서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놀고먹는데 돈은 더 받는다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나였으면 기뻐서 춤이라도 췄겠다.
‘저게 그건가? 사회 초년생들이 갖는다는 열의?’
하필 인생 첫 일이 내 경호라니…. 갑자기 눈앞에 권정한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내가 안쓰럽게 보든 말든, 권정한이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외출이 없으실 때는 잠깐씩 들를까 하는데, 어떠세요?”
“뭐?”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우진이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반말을 뱉어 낸 김우진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미간을 구기지 않도록 애쓰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없습니다. 한이결 옆에는 내가, 아니. 제가 계속 있을 거고.”
“그래도 ‘정식 경호’는 전데, 제가 지켜 드려야 맞는 거 아닐까요? 김우진 선배님 능력도 좋지만, 지금은 정신계 능력자가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
김우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말싸움에서 단번에 밀린 김우진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적당히 중재하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내가 나가 볼게.”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분신이 또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가는데, 뒤로 김우진과 분신, 권정한이 줄줄이 따라왔다. 대체 왜 쫓아오는 거지? 혀를 차며 일단 문부터 열었다.
“우서혁 씨?”
“잘 쉬고 계십니까?”
방을 찾아온 두 번째 손님은 우서혁이었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한 우서혁이 짧은 안부 인사와 함께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스터께서 부르셨습니다.”
“…….”
예상치도 못한 껄끄러운 말에 미처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한이결?”
뒤에서 김우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괜찮다는 의미로 김우진에게 고개를 저은 나는 우서혁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