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죄송해요. 역시 좀 갑작스럽죠?”
“아뇨, 괜찮습니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둥근 눈매를 휘어 웃은 권정한이 말을 이었다.
“제 친척 형이 한이결 능력자님께 신세를 져서요.”
“친척 형이라면….”
“부산에서 길드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사계’ 길드의 권지훈 마스터입니다. 형 말로는 저번 호텔 파티에서 인사를 나눴다고 하더군요.”
“아.”
그 말에 천사연과 함께 갔던 파티에서 만난 이가 떠올랐다.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갈색 눈동자에 오른쪽 볼에 점이 있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 설명을 듣고 보니 확실히 외모나 분위기가 권정한과 닮아 있었다.
“물론이죠. 기억합니다.”
“친척 형이라고는 해도 어릴 때부터 왕래가 잦아서 친형과 다름없는 사이인데, 이번 굴업도 섬 게이트 사건 소식을 듣고 많이 걱정했습니다. 한이결 능력자님께서 보스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말을 형이 전해 주더군요. 그때부터 줄곧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아하. 그래서 팬이라고 말한 건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저도 로헌 부마스터를 도왔을 뿐이라서.”
“그렇다 해도 S+급 몬스터를 혼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 아, 아니….”
단호한 대답에 나는 당황하며 상체를 뒤로 살짝 물렸다. 얘 뭐야. 20살이 말을 왜 이렇게 잘해?
“이번 강남 사건도 한이결 능력자님 덕분에 피해가 크게 줄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범인이 정신계 능력자라는 정보도요.”
“음, 그렇긴 한데.”
“저는 어떤가요? 다른 지원자에 비해 경력이 없지만, 그래도 범인이 정신계 능력자라면 자신 있습니다.”
초반에 예의 바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권정한이 볼을 붉히며 자신을 열렬히 어필했다. 설마 이게 본모습인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권정한의 뒤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박건호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구경 그만하고 얘 좀 막아 봐.
“자자, 진정하고.”
피식 웃은 박건호가 내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 권정한의 어깨에 팔을 가볍게 올린 박건호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려 웃었다.
“한이결 능력자에게 능력 설명부터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오기 전에 간단히 알려 주긴 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당사자가 해 주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테니까.”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금세 이성을 되찾았는지, 한결 침착한 표정이 된 권정한이 안경을 가볍게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제 능력은 S급 감정 제어입니다. 눈치채셨듯, 타인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어요. 기쁘게 만들 수도, 슬프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니. 나뿐만 아니라 민아린과 김우진의 얼굴도 기묘해졌다. 우리들의 변화를 알아챈 권정한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 굉장히 위험한 능력이에요. 물리계처럼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못하지만, 감정 조절을 통해 자해나 자살을 끌어내는 게 가능합니다.”
“능력 발동에 제약은 없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민하게 받아들일 만한 질문임에도 권정한은 딱히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대답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는 만큼, 제 감정도 똑같이 변합니다.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강한 우울감을 느끼게 만들면 저도 그만큼 우울해진다는 거죠. 이미 그만큼 우울한 상태라면 다른 변화는 없지만…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어요.”
오, 그렇군. 나는 흥미롭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면 무분별한 사용은 힘들겠다.
“또한, 발동 조건이 있습니다. 능력을 사용하려는 대상자를 정확히 바라보며 정해진 말을 해야 합니다.”
“정해진 말이라면?”
“음, 예를 들면요.”
잠시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린 권정한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님. 저를 보고 ‘반가워하세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있는 권정한이 꽤 반갑게 느껴졌다. 그 확연한 감정 변화에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오, 정말 되는군요.”
“그렇죠? 지금은 약하게 걸어서 반가운 감정보다는 신기한 감정이 더 클 거예요.”
“더 강하게 할 수도 있는 겁니까?”
“네. 해 볼까요?”
“궁금하긴 한데… 능력 해제도 가능합니까?”
“기본적으로 5분 지속이에요. 기운을 더 쓰지 않으면 5분 후에 효과가 바로 사라집니다.”
5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능력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권정한이 밝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능력을 발동했다.
“‘반가워하세요.’, 한이결 능력자님.”
“아…….”
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권정한을 바라봤다.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몸이 들썩였다. 차오르는 들뜬 감정에 결국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냅다 껴안았다.
“어머.”
“하, 한이결!”
“이야.”
이 기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품 안에 가득 들어온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외쳤다.
“정말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하하, 네.”
“우리 오래오래 친하게 지냅시다. 제 경호도 맡아 주세요.”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경호는 권정한에게 부탁해야겠다. 이런 좋은 사람을 오늘만 보고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나. 이 즐거움을 권정한과 나누려는데, 강한 힘이 날 붙잡아 당겼다.
“한이결, 정신 차려!”
뒤에서 날 껴안은 사람은 김우진이었다. 나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 반가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데, 왜 막는 거야? 그거 좀 안는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난 제정신이야. 그냥 좀 반가워서―”
김우진이 빠져나오려고 끙끙거리는 내 몸을 힘주어 막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당장 능력 풀어!”
“으음, 5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그 전까지는 저도 어떻게 할 방법이.”
“효력이 확실하긴 하네요.”
“한이결 능력자는 반가우면 껴안는 타입이군. 좋은 정보를 얻었어.”
난감한 얼굴로 웃는 권정한과 한껏 예민해진 김우진을 보며 민아린과 박건호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다 알겠는데, 이제 그만 놔줬으면 좋겠다. 너무 답답해.
“시발, 그럼 5분 동안 이 꼴을 봐야 한다는 거야?”
“그렇죠.”
김우진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는데도 권정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20살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아하니 괜한 걱정인 듯싶었다.
“지금 상태로는 대화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겠네요.”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민아린과 박건호는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재밌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팝콘이라도 가져올 기세다.
‘그러니까, 지금 느끼는 이 반가움이 가짜라 이 말이지.’
겪어 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능력이다. 일단 민아린의 말대로 5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겠다.
***
“겪으셨듯이, 제 능력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은 정신계 능력자로부터 한이결 능력자님을 지켜 내기도 좋습니다.”
5분 후, 감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나는 박건호가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며 권정한의 능력 설명을 마저 들었다.
“강남 사건의 범인이 한이결 능력자님께 정신 지배를 사용한다 해도, 제가 한이결 능력자님이 명령을 따르지 못하도록 감정을 조절하면 되니까요.”
“정신 지배를 감정이 이긴다는 뜻입니까?”
“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감정은 많습니다. 우울감이나 지겨운 감정을 증폭시키면 정신 지배 상태라 해도 몸을 쉽게 움직이지 못해요. 감정 지배는 두말할 것도 없고요.”
권정한은 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건호가 왜 그를 추천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권정한의 옆에서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범인의 능력을 어떤 식으로 해제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이상, 최소한의 대비책은 필요해. 권정한은 그 대비책에 딱 맞고.”
“고작 제 경호를 맡기에는 너무 좋은 능력 아닙니까? 더 괜찮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정신계 능력자는 대부분 지원부서나 전략팀으로 빠지는데, 권정한은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상황이지. 그러니까 다른 걱정하지 말고 받아 주면 좋겠군. 본인이 이렇게 강하게 원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여쭤볼 게 있습니다.”
앞에 놓인 음료수는 손도 대지 않고 권정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김우진에게 음료수 병 뚜껑을 따서 밀어 주며 아까부터 생각했던 문제를 꺼냈다.
“아무리 천사연 마스터의 명령이라지만, 저는 레퀴엠 소속이 아니잖아요. 그런 제 경호를 맡는 건데 별다른 불이익은 없는 겁니까?”
내 질문에 박건호가 별걸 다 걱정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물론이지. 길드 측에서는 경호원을 한 명 빌려주는 셈이 되는 거니까.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한이결, 네 경호인데 마스터가 어련히 잘 챙겨 줄까.”
마지막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왜 다들 저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쪽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럼요.”
권정한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의사를 묻자, 권정한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에 옆에 앉아 있던 김우진이 도끼눈을 뜨며 이를 갈았다.
“알겠습니다. 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권정한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여기서 더 거절할 명분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잘됐군. 정신계 경호원이 드물긴 해도 없는 건 아니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권정한은 관련 서류를 보내 줄 테니 작성하고. 경호는 당장 내일부터 하면 되겠군.”
한 건 해결했다고 생각한 박건호가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이만 가자는 의미로 양옆에 있는 민아린과 김우진을 툭툭 두드렸다. 김우진은 그때까지도 권정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우진.”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김우진을 부르자, 녀석이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앞에 앉아서 그 모든 걸 지켜보던 권정한이 김우진을 향해 픽 웃은 것도 그때였다.
‘역시 만만한 성격이 아닌 것 같다니까….’
뭘 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사이가 안 좋은 건지. 한숨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