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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02)화 (102/394)

102화 

병실을 정리하고 23층 방으로 돌아온 후, 3일 동안 고민한 나는 결국 경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천사연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명령을 내린 건지 알 수 없는 게 문제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최대한 곁에 있겠지만… 그래도 정신계 능력자가 있으면 더 안전하잖아.”

“맞아요. 그리고 우진 씨는 이결 씨 말이라면 다 좋다고 하니까, 이결 씨를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해요.”

“꼬, 꼭 그렇지는….”

민아린의 말에 김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보다.

“민아린 씨, 안 바쁘세요?”

김우진이야 그렇다 치고, 민아린까지 왜 쫓아온 건지 모르겠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민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봤다.

“어머, 저 내쫓으시는 거예요?”

“예? 아뇨. 그럴 리가요.”

“농담이에요. 마침 휴일이라서 구경하려고 왔죠.”

그 짧은 사이에 나와 김우진을 놀리는 데 성공한 민아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요즘 부쩍 장난기가 늘어난 느낌이다.

김우진과 민아린을 데리고 박건호에게 미리 설명 들은 대로 8층으로 향했다. 8층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박건호는 내 뒤로 보이는 민아린과 김우진을 발견하고는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그건가? 수업 참관 온 학부모?”

“헛소리하지 마십쇼.”

킥킥거리고 웃은 박건호가 회의실 문을 열어 줬다.

“뭐, 괜찮은 몇 명을 선별해 두긴 했는데. 네 의견이 중요한 거니, 한번 쭉 훑어보는 게 좋겠군.”

자리에 앉은 내게 박건호가 서류를 건네줬다. 사진과 능력, 등급 등 다양한 정보가 적혀 있는 이력서 모음이었다.

“그때 말한 정신계 지원자 60명 중에서도 고른 놈들이야. 성격도 괜찮고, 등급도 나쁘지 않고.”

박건호의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넘겨 봤다. 정신계 능력은 잘 몰랐는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꽤 다양했다.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나는 박건호에게 물었다.

“팀장님이 선별해 둔 분들은 누굽니까?”

“흠. 일단 이렇게 세 명.”

박건호가 서류 세 장을 뽑아 책상에 펼쳤다. 그러고는 곧바로 중앙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세 명 중에서는 이 친구가 제일 적합해 보이는군.”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린, 서글서글한 외모를 가진 남자의 증명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능력은… S급 감정 제어?

“강승건 마스터에게 걸려 있던 능력이 정신 지배 외에 추가로 감정 지배도 있다는 분석 결과가 있더군. 이 친구가 옆에 있으면 강승건 마스터처럼 휘둘릴 일은 없을 거다.”

감정 지배. 나는 지하에서 인형이 강승건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 지배 부작용이 벌써 나타났잖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폭력적이었던 강승건의 행동이 그 때문이라면, 확실히 감정 제어 능력이 카운터가 될 것이다.

“올해 초에 길드에서 거금을 들여 데려온 신입이지. 아직 길드로 온 지 2개월도 안 지나서 이렇다 할 경력은 없지만, 어차피 정신계는 물리계처럼 누구랑 치고받고 싸울 일은 없으니까.”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이력서를 읽어 내리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어린 것 아닙니까?”

남자의 나이는 20살이었다. 말이 20살이지, 몇 개월 전만 해도 19살인 셈이다. 갓 성인이 된 애를 경호로 데리고 다니라니. 좀 그렇지 않나?

“나이가 뭐 중요하다고.”

“중요합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경호인데, 이런 어린애한테 지켜 달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 말에 민아린이 입을 가리며 웃었고, 박건호는 묘한 표정을 했다. 왜 이런 반응이지?

“글쎄. 어린 거야 맞긴 하다만…. 한이결.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웃기긴 하군.”

“무슨 뜻입니까?”

“나나 민아린 힐러님이 보기엔 한이결 너나 이 친구나 똑같아 보여서.”

“똑같다뇨, 그래도 제가 훨씬 어른…….”

울컥하며 반박하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 나 지금 한이결이지?’

무심코 본래 나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24살짜리가 20살 보고 어리다고 투덜거린 셈이 된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들을 대로 들은 박건호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깐족거렸다.

“그래, 그래. 어른이지. 무려 4살이나 많으니까.”

민아린도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와,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

“…….”

궁합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우리 한이결 능력자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긴 하지.”

“…그만하시죠. 어쨌든 성인이 된 지 몇 개월 안 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도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걸 추천해. 네 말대로 어린 건 맞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성격도 좋고 능력 활용 센스도 뛰어나니까.”

으음. 그런가. 어쨌든 박건호가 추천하는 거니 제일 믿을 만하긴 했다. 이런 서류로는 알 수 있는 게 한계가 있기도 하고.

“바로 만나 볼 수 있습니까?”

“좋은 선택이군. 한번 연락해 보지.”

핸드폰을 꺼내 든 박건호가 내게 눈 한쪽을 찡긋거리더니 회의실을 나갔다. 내 옆에 앉아서 이력서를 보고 있던 민아린이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결 씨가 순순히 경호를 받아들여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저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습니다. 민아린 씨나 김우진에게 더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사연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경호 자체는 문제없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지.

‘하태헌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진지하게 로헌으로 오라고 제안하던 하태헌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천사연이 먼저 나를 내치지 않은 이상, 지금은 레퀴엠을 나갈 수 없다. 천사연의 곁에서 알아봐야 할 것이 아직 많았으니까.

하태헌에게 언제쯤 다시 연락할지 고민하는데, 회의실을 나갔던 박건호가 돌아왔다.

“마침 훈련이 끝났다고 하는군. 능력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들어야 할 테니, 지하 훈련실로 이동하도록 하지.”

“그러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력서에 붙어 있는 증명사진을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했다. 나이를 알고 나니 사진의 얼굴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S급 정신계 능력자라.

‘괜찮은 거 맞나 모르겠네.’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끝내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날 노리는 상대는 강승건 마스터를 그 지경으로 만들 만큼 뛰어난 정신계 능력자인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애를 경호로 세워도 되는 건가.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한이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손목을 잡아 오는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날 부른 김우진이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대부분 내가 곁에 있을 거고…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경호원과 단둘이 있는 상황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눈만 깜빡였다. 김우진이 이렇게 의젓한 말을 하다니.

“맞아요, 이결 씨. 게다가 박건호 팀장님이 추천한 분이잖아요. 한번 믿어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한이결 능력자가 저를 좀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근심 어린 마음이 얼굴에서 티가 났나 보다. 민아린의 조언에 박건호가 능청스럽게 한마디 얹었다.

“믿음이 가게 행동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이거 섭섭하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 줬는데.”

“길 안내나 하시죠, 박건호 팀장님.”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펼쳐진 것은 넓은 복도와 여러 개의 훈련실이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박건호가 앞장서서 걸어가며 설명했다.

“여긴 전체가 정신계 능력자들만 사용하는 훈련 장소다. 물리계는 훈련실이 좀 더 넓고, 모든 벽이 아이템으로 만들어져 있지. 김우진 능력자는 잘 알고 있겠군. 분신 다루는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

흥미롭게 들으며 김우진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박건호의 말을 무시하던 김우진이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물리계는 훈련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공격 능력을 사용해야 하니까…. 아이템 벽이긴 해도, 강도가 심할 때는 부서지는 경우도 종종 있어.”

“그 정도로 훈련이 심한 거야? 그거 괜찮은 거 맞냐?”

어쩐지 애가 훈련만 받고 오면 유난히 힘들어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던 거였다.

“버티기 어려우면 말해. 내가 천사연 마스터 만나 볼 테니까.”

얼굴 보기 껄끄러운 상태지만 이런 문제라면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 소심하고 낯도 심하게 가리는 김우진 성격상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참을 것이 뻔했다.

내가 신신당부를 하자, 김우진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볼을 붉힌 채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좋아. 일단은 안심이다. 김우진이 그래도 말은 잘 들으니까.

“애를 너무 곱게 키우는 건 좋지 않아, 한이결.”

“끼어들지 마세요.”

그쪽이 뭘 알아. 김우진은 예민하고 사회성도 별로 없어서 저런 부분이라도 챙겨 줘야 한다고. 내 날카로운 대꾸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큭큭 웃은 박건호가 21이라고 적힌 훈련실의 문을 시원스레 열었다.

노크도 안 하고 이렇게 막 열어도 되는 건가. 섬세함이라고는 두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박건호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는데, 안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에요, 박건호 팀장님.”

“그래. 얼굴 보는 건 한 달 만이군. 잘 지냈나?”

“그럼요.”

상대방과 가볍게 악수를 한 박건호가 옆으로 비켜서며 내게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박건호 몸에 가려져 있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게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한이결 능력자님.”

“아, 네. 안녕하세요.”

깍듯한 태도로 내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한 남자는 낮췄던 몸을 세우며 날 향해 빙긋 웃었다. 곱슬거리는 초콜릿색 머리카락과 갈색의 둥근 눈동자가 보였다. 높은 콧대와 그 위에 올려진 안경, 유려하게 올라간 입매가 전체적으로 상냥한 분위기를 풍겼다.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치고 키도 꽤 크고 뼈대가 굵었다. 웃느라 살짝 휘어진 왼쪽 눈 아래로 까만 점이 박혀 있었다. 저런 걸 눈물점이라고 하던가?

“저는 권정한이라고 합니다.”

일단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20살이라길래 마냥 어려 보일 줄 알았는데. 조금은 안도하며 나도 마주 웃었다.

“한이결입니다.”

“반갑습니다. 그… 사실 전부터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제가 한이결 능력자님 팬이라서.”

“예?”

갑자기 팬? 볼펜 할 때의 펜은 아닐 테고.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권정한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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