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26. 봄이 왔습니다
“그걸 왜 가입해? 하지 마.”
김우진이 핸드폰을 뺏으려는 내 손길을 피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가입할래. 하고 싶어!”
생각보다 재빠른 몸놀림에 내심 놀라며 김우진에게 말했다.
“당장 이리 내놔.”
“시, 싫어.”
“김우진.”
엄한 목소리로 재차 부르는데도 김우진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거에 그치지 않고 순식간에 분신까지 만들어 냈다. 김우진보다 어딘가 맹한 표정의 분신이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안겨 왔다.
“야, 김우진.”
분신을 익숙하게 안아 주며 김우진을 노려봤다. 날 막으려고 일부러 분신을 꺼낸 게 분명했다. 김우진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가입만 할게.”
“그런 곳에 가입해서 뭐 해?”
“가입해야만 볼 수 있는 글이 있으니까….”
“…….”
아, 그래? 그건 또 몰랐던 사실인데.
나와 김우진이 투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분신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김우진에게 뭐라 할 마음이 확 사그라들었다.
“…내가 이상한 글 올라오면 알려 줄게.”
내가 포기했다는 걸 알아챈 김우진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필요 없어.”
네 마음대로 해라. 팬카페고 뭐고, 그냥 신경 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분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분신이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평소라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분신을 떼어 놨을 김우진은 팬카페가 어지간히 재밌는지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혀를 차며 옆에 찰싹 붙은 분신의 등이나 토닥여 주는데, 누군가가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Hey!”
“박건호 팀장님?”
노크도 없이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한 달 만에 만나는 박건호였다. 이전보다 더 짙은 구릿빛 피부가 된 박건호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윙크를 보냈다.
“오랜만이군, 한이결. 우리 유명하신 A급 용병.”
“그 소리 아직도 하십니까?”
헛웃음을 지으며 박건호의 커다란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어느새 핸드폰을 넣고 도끼눈을 뜬 김우진과, 멍한 표정의 분신을 한 번씩 둘러본 박건호는 재밌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국에서 소식은 들었는데, 진짜군. C급이 A급으로 재각성을 하다니. 게다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분신술사라.”
“그 말씀은… 한국에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어째 안 보인다 했더니, 아예 외국에 나가 있었던 건가. 내 질문에 박건호가 눈썹 끝을 내리며 짐짓 슬픈 척 대답했다.
“나한테 이렇게나 관심이 없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나는 은근슬쩍 어깨로 올라오는 박건호의 무거운 팔을 밀어내며 코웃음을 쳤다.
“워낙에 바빴어야 말이죠. 그리고 원래부터 관심 따위 없었습니다만.”
“매정하군. 하긴, 그게 매력이지.”
매력 같은 소리 한다. 질색하는 내 반응을 킥킥거리며 구경하던 박건호가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태국에 협력을 맺은 길드가 있는데, 거기서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싶다고 도움을 청해 오더군. 마침 일정이 비어 있던 참이라 대표로 다녀왔지.”
“이상 현상이 발견된 게이트라니. 심지어 해외인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S급 게이트긴 했는데,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 한이결, 네가 다쳤던 N23 구역 게이트보다 배는 쉬웠거든. 아쉽게도.”
그렇게 설명한 박건호의 얼굴은 정말로 아쉬워 보였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한국은 언제 오신 겁니까?”
“어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모두 전해 들었다.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밌던데.”
“전 별로 재미없는데요.”
싸늘하게 받아치자 박건호가 히죽 웃으며 내 몸을 찬찬히 훑어봤다.
“태국으로 가기 전에도 크게 다쳐서 기절해 있더니. 다녀왔는데도 병실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
이번 납치 사건은 확실히 내 잘못이 크긴 했다. 안 되겠어. 대화 주제를 돌려야겠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용건은 뭡니까?”
“흠. 그건 두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씩이나? 박건호를 마주 보며 고개를 기울이는데,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두세 번 접힌 새하얀 종이였다. 갑자기 이런 걸 왜 주는 거지?
“러브레터.”
“개소리하지 마시고요.”
“안 속네.”
속겠냐고. 어깨를 장난스럽게 으쓱인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열어 봐.”
뭐가 적혀 있길래 저러지. 박건호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며 천천히 접힌 종이를 펴 봤다. 등 뒤로 바싹 붙은 김우진과 옆구리에 안겨 있는 분신의 시선이 펼쳐진 종이로 향했다.
“이건….”
쪽지에 적혀 있는 것은 숫자 같기도, 문양 같기도 한 이상한 그림이었다. 쪽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뭡니까?”
“나도 몰라.”
“예?”
내 질문에 박건호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5일 전, 게이트를 무사히 클리어하고 밖으로 빠져나왔지. 길드 관계자, 게이트 관리인, 여러 언론이 모두 모여들어 정신없는 가운데에 처음 보는 이들이 내게 다가오더군.”
시선을 사로잡은 순백의 은발과 짙은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남자였다. 잔뜩 헤지고 낡은 천을 여러 겹 겹친 형태의 차림새를 한 남자에게서는 겉모습과 다르게 숲에 온 듯한 청량한 향이 풍겼다.
“날 정확히 가리키고선 이렇게 말하더군. ‘한국의 박건호 능력자. 그쪽에게 줄 게 있어.’ 그러더니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 종이를 손에 억지로 쥐여 주더군.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난 어디까지나 전달을 부탁받았을 뿐이라. ‘한국으로 돌아가면, 가장 다난한 시간을 보낸 이가 있을 거야. 그에게 전해 줘.’라는 말을 했지. 그때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몰랐는데, 와 보고 나니 너무 쉬운 문제라.”
‘가장 다난한 시간을 보낸 이’라니. 분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종이를 다시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수상한 걸 받아 오시면 어떡합니까?”
“수상하긴 했지.”
팔짱을 낀 박건호가 기다란 다리를 쭉 펴며 웃었다.
“근데 재밌잖아.”
“대체 뭐가요.”
“그냥, 수상한 놈이 저런 걸 줬다는 거 자체가?”
그래서 순순히 받아서 전해 준 거구만. 종이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며 박건호에게 말했다.
“뭐, 아무튼 감사합니다.”
“역시 짐작 가는 게 있나 보군. 전해 주길 잘했어.”
“그냥 재밌어 보여서 한 거면서 뭘 생각해 준 척하십니까.”
“결과가 좋잖아.”
뻔뻔하기는. 혀를 차며 다른 용건을 물었다.
“두 가지 있다면서요. 남은 하나는 뭡니까?”
“흠, 그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박건호가 턱을 매만지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뭔데 그럽니까?”
“일단 한이결. 현재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납치 사건 얘기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다. 근데 이 일을 박건호가 언급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사실 마스터에게 미션 하나를 받아서.”
“마스터… 설마 천사연 마스터요?”
“나한테 마스터는 천사연 마스터뿐인데, 당연하지.”
천사연이 또 왜? 불안한 마음이 불쑥 솟구쳤다. 내 상태가 달라진 것을 예민하게 알아챈 분신이 눈을 깜빡이며 내 팔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호위 기사를 뽑으라고 하셔서.”
“예?”
뭐? 뭘 뽑아?
“무슨 헛소리세요?”
“진짜인데. 널 지킬 길드원을 선별해서 뽑으라고 하더군. 최대 인원은 2명.”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미소 지은 박건호가 턱짓으로 내 옆에 있는 김우진을 가리켰다.
“듣자 하니 저 친구는 이제 물리지원팀 소속이라 네 경호로 쓸 수 없다는데.”
“물리지원팀?”
그 말에 놀라서 김우진을 돌아보자, 녀석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저 자식이. 그런 중요한 걸 말 안 해 주면 어떡해?
박건호가 가면 제대로 따져 묻기로 생각한 나는 다시 앞을 보며 물었다.
“그 명령을 정말로 천사연 마스터가 했습니까?”
“그렇게 계속 물어보면 나를 못 믿는 건지, 마스터를 못 믿는 건지 궁금해지는데.”
“…….”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눈을 가늘게 뜨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근데 그걸 왜 팀장님께서 담당하시는 겁니까?”
“뭐, 막 귀국해서 일이 없기도 하고. 길드원들과 두루두루 친한 게 나라서?”
과연. 길드원들을 잘 아는 사람이 박건호라 시켰다 이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덥석 받아들일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레퀴엠 소속도 아니고. 복잡한 마음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꾹꾹 누르는데, 김우진이 딱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물리지원팀은 일도 별로 없고, 계속 네 곁에 붙어 있을 거니까 억지로 사람을 뽑을 필요 없어.”
“음….”
솔직히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을 경호랍시고 옆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천사연의 명령이라니.
‘실망했다며. 당장이라도 내칠 것처럼 굴어 놓고, 갑자기 경호를?’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찝찝한 상황 아닌가.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박건호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대가 물리계 능력자라면 분신술사로 충분하겠지만, 정신계 능력자가 끼어들었으니 그에 맞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S급인 강승건 마스터에게 강한 정신 지배를 거는 수준의 정신계 능력자야. 만만히 보면 안 될 거다.”
“정신계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다는 겁니까?”
“정신계는 정신계로 상대하는 게 확실하지. 물리계는 괜히 옆에 있다가 정신 지배를 당하면 일만 복잡해지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에 김우진이 입술을 삐죽였지만, 내가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한 명 정도는 곁에 두는 게 나아. 지원자가 여럿 되니까 그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면 되겠군.”
“지원자요?”
이게 뭐라고 지원자가?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박건호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60명 정도 지원했더군. 우리 길드에서만 받으니 저 정도지, 다른 길드에서도 받았으면 몇백은 그냥 나왔을 텐데.”
“그럴 리가요.”
“왜 그렇게 부정적이지? 강남 사건에서 한이결, 네가 구해 낸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박건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불편한 감정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가슴속을 찔렀다. 몇 번이나 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애초에 제가 좀 더 조심해서 납치를 안 당했으면…….”
“한이결.”
김우진이 화난 음성으로 내 말을 끊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김우진과 달리, 박건호는 고개를 기울이며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한이결. 넌 어디까지나 납치당한 피해자야. 잘못은 납치를 한 놈이지.”
“…….”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라, 네가 어떻게 대처했건 강승건 마스터는 널 납치하기 위해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을 거다. 정신 지배 능력이 그래서 위험한 거고.”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탓하는 마음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좋게 좋게 생각해. 어쨌든 지원자가 많을수록 고르기엔 더 편할 테니까.”
으음. 난감해하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박건호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오늘은 쉬고, 3일 뒤에 연락할 테니 그때 마저 얘기하도록 하지. 천천히 고민해 봐.”
“알겠습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군. 정신계 능력자는 미리 대비해 두지 않으면 후회할 가능성이 크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박건호는 미련 없이 병실을 떠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건호가 틀린 얘기를 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정신계 능력자는 정신계로 상대하는 게 편하긴 하겠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