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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8)화 (98/394)

98화

  

가뜩이나 짜증 나는 꿈도 꾼 터라, 기분이 끝도 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억을 애써 밀어내며 천사연에게 물었다.

“상황은?”

바싹 마른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포처럼 거칠었다. 3일 만에 깨어났다고 했으니, 내가 기절한 후로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천사연이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며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

“부상자는 꽤 되지만 사망자는 없어. 어디 사는 누가 무리한 덕분에 대피할 수 있었다는군.”

말에서 가시가 느껴졌지만, 모른 척 무시하며 물을 마셨다.

“그나마 다행이네. 망가진 도로나 건물은?”

“아직 해결하는 중이지. 그래도 각 길드에서 복구 작업에 도움이 될 길드원들을 선별해서 보냈으니 한 달이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것 같군.”

빈 컵을 자연스럽게 받아 간 천사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씻고 나와. 나머지 얘기는 그 후에 이어 하지.”

“…기다리겠다고? 안 바쁘냐?”

“부축해 줄까?”

천사연이 딴소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치워, 이 자식아. 천사연의 새하얀 손을 짝 소리 나게 쳐 내고 욕실로 걸어갔다.

“수납장에 갈아입을 옷 넣어 놨어.”

“…….”

하여간 쓸데없이 센스는 좋다니까. 한숨을 푹 내쉬며 욕실 문을 열었다.

***

샤워를 끝낸 나는 속옷과 바지만 껴입고 셔츠는 그냥 손에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계속 물이 떨어지니 좀 마른 후에 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충 머리카락을 몇 번 털어 낸 나는 욕실 문을 열었다.

팔짱을 낀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천사연은 욕실을 나오는 날 발견하고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건 뭐지?”

“또 뭐.”

“선물인가?”

“…….”

미친놈. 선물 같은 개소리 하고 있네. 처참히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며 천사연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딴 소리나 할 거면 꺼져.”

“매정하기는.”

젖어서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뚝 떨어져 쇄골을 지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천사연의 시선이 한순간 그 물방울을 향했다.

“한이결.”

천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야, 있기는 한데. 어째 순순히 말하기에는 찝찝함이 밀려왔다.

‘느낌이 안 좋은데.’

이럴 때는 발을 빼는 편이 나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니. 없어.”

“흐음.”

도망치려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천사연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치게 좁혀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물러서자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아 왔다.

“거짓말은 별로 재미없는데.”

“무슨… 윽.”

천사연이 순식간에 목을 잡아 왔다. 배려 없는 손길에 숨이 턱 막히며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시발, 이 새끼가 또!’

속으로 천사연을 욕하며 벗어나기 위해 빈손으로 천사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도저히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놔, 개자식아.”

“그때. 섬 게이트 앞에서.”

날 바라보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서늘했다. 일부러 풀었는지, 가깝게 붙어 있는 천사연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몸이 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처럼, 떨려 오는 손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누가 왔지?”

“하, 미친 새끼. 그걸 아직도….”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이결아.”

“큭!”

아파…! 붙잡힌 목에서 아릿한 고통이 밀려왔다. 천사연이 본능적으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벽에 짓누르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툭, 들고 있던 흰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닌 척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티는 그렇게 내놓고 내가 모르길 바랐어?”

“헉, 읏…!”

“누굴까. 하태헌? 흠.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텐데. 하태헌이 아니면….”

맨 피부에 닿아 오는 옷깃의 감촉이 소름 돋았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간 고민하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주하인가?”

“…….”

“이주하가 할 만한 말이라… 아. 하태헌이 가진 SS급 코트?”

목을 누르는 힘이 한층 더 강해졌다. 피가 몰려 붉어지는 얼굴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작 이거야? 그래?”

“…….”

“대답해, 한이결.”

대답하라면서 목을 조르는 손은 풀어 주지 않는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래.”

“…생각보다 더 재미없네.”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천사연이 목을 놔주었다. 잔뜩 졸렸던 목으로 숨이 급히 들어차며 마른기침이 발작적으로 터져 나왔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하아, 하아….”

자국이 남았을 게 뻔한 목을 부여잡고 헐떡이는 날 보며 천사연이 말했다.

“뭐가 불만인가 했더니, 겨우 그거였나? 하태헌을 부추겨서 널 의심하게 만든 것?”

“쿨럭, 하… 그렇다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천사연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한이결. 네가 어떻게 SS급 코트의 위치를 알고, 그걸 얻어 냈는지…. 내가 굳이 물어보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을 텐데. 너와 나는 서로 같은 처지 아니었나?”

차가운 시선과 다르게, 천사연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숨기는 것을 존중하고,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새 잊었나?”

“…그걸 아는 놈이, 이딴 식으로 몰아붙여?”

“지금 이 문제는 다르지. 나 때문에 기분 상했다고 그렇게 티를 내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체할 수가 있겠어.”

아주 자기 멋대로네.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짓는 내게, 천사연이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한이결, 네가 좀 더 쓸모 있는 생각을 했기를 바랐는데. 정말 아쉽군. 고작 그런…….”

“그래.”

짜증 나서 더는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천사연의 말을 끊어 낸 나는 쓰라린 목을 부여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 모르는 곳에서 그딴 개짓거리를 했다는 게, 고작 그게 그렇게 거슬렸다.”

나라고 묻고 싶은 게 없는 줄 알아? G5 구역 게이트에 들어가서도, 천사연의 의도가 뭔지 파악하려고 머리에 쥐 나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머릿속에 남은 것은.

“네가 보기엔 멍청하겠지. 그래도 이게 나야.”

천사연에게 한순간이나마 느꼈던 배신감뿐이라.

한심하고 어이없게도 천사연을 믿었다. 그가 내게 보여 주는 행동에서 그래도 조금은, 진심이 있었을 거라 착각했다.

“그래도, 두 번은 없어.”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을 느끼며 고개를 들고 천사연을 바라봤다. 전등 빛에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믿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천사연은 아무 말도 뱉어 내지 않고 다시 다물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실망스럽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평가였다. 천사연이 살짝 돌아간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두 번은 없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

“오늘 하루는 이만 쉬어. 면회는 금지해 놨으니 사람 만나는 건 내일로 미루고.”

“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대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데, 천사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쏟아 냈다.

“경호 인력을 배치해 놨으니 빠져나갈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민아린 힐러는 내일 아침에 보내도록 하지.”

“잠깐.”

미처 따지기도 전에 천사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나는 굳게 닫힌 병실 문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무슨….”

면회를 금지했다고? 그래서 김우진과 민아린이 없었던 건가?

민아린과 김우진을 찾는 내게 모르겠다고 뻔뻔하게 대답했으면서, 어이가 없다.

시선을 돌리자 벽에 걸려 있는 거울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한이결의 얼굴이 비쳤다. 목에는 예상대로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정말, 실망스럽군.

멍하니 거울을 보며 목을 만지고 있으니, 방금 들었던 천사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실망스럽다고? 누가 할 소리를. 그렇게 따지면 내가 먼저 실망했지.

“…하여간, 짜증 나는 새끼.”

몸을 돌리고 아까 떨어뜨렸던 셔츠를 다시 주웠다. 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물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라 그대로 셔츠를 툭툭 털어 낸 후 입었다.

방금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기분 더러운 꿈에 이어서 천사연의 성질머리까지 받아 냈더니, 남은 체력이 하나도 없었다.

대충 셔츠 단추를 채운 후,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얼굴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이불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새까만 어둠 너머로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스테이크가 매끈한 접시 위에 올려져 있다. 달각. 달각.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웃음기를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사 지내? 왜 안 먹어?”

달칵. 피에 젖은 새하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놨다.

“아차. 입 안이 부어서 고기는 좀 그러려나? 미안, 미안. 내가 깜빡했다.”

그 말이 있은 지 얼마 가지 않아, 양식이 가득한 테이블 위로 새하얀 죽이 담긴 그릇이 놓였다.

“먹어, 응?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어제는 내가 너무 심하긴 했지. 미안하다니까.”

“허… 으윽, 끅….”

“그럴 생각 없었는데, 요즘 스트레스를 좀 받다 보니까. 이해하지? 내가 원래 잘….”

“쿨럭, 컥.”

“아, 시발.”

계속해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신음에, 변명을 뱉어 내던 입술이 불쾌하게 비틀렸다.

“야, 석재야. 저거 좀 치워라. 중요한 대화 하는데 자꾸 끊기잖아.”

“예.”

“어디까지 했지? …아,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온몸이 난도질 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그의 명령에 뒷덜미가 잡힌 채로 질질 끌려 나갔다. 진득한 피가 멀어지는 남자의 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죽이지 말까? 네 부탁이면 저런 거 하나쯤은 살려 줄 수 있지.”

달각. 달각.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근데 치료받을 돈은 있나 모르겠네. 천 원짜리 한 장도 없어서 저 꼴이 된 거라. 그럴 바엔 그냥 빨리 죽여 주는 게 본인도 편하지 않겠어?”

“…….”

“참, 귀여워. 내가 그렇게 굴렸는데도 여전히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타고났나?”

눈앞에 가득했던 요리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쉽게 정을 주고, 쉽게 믿고, 그러다 아닌 척 상처받고. 버려져도 사람 쫓아가는 개새끼처럼…….”

***

감았던 눈을 뜨자 흐릿하게 들려오던 목소리도 사라졌다. 씁쓸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봐. 어느 정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끝내 떨쳐 내지 못한 과거가 등을 무겁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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