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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7)화 (97/394)

97화

25. 의도 파악

[강남 도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의 주범인 강승건 능력자의 처분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길드 관리 본부에서는….]

삑.

[현재 저는 강승건 능력자의 힘이 닿았던 장소에 도착해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복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무너진 건물은 다섯 채가 넘으며, 도로는 갈라져서….]

삑.

[정신 지배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승건 능력자, 그렇다면 재판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현장에서 바로 구속된 강승건 능력자는 현재….]

삑.

[강철우 의원이 강남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밝혔습니다. 강철우 의원은 다 자신이 자식을 잘못 키운 죄이며, 피해 지역 복구에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서늘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꾹꾹 누르던 김우진은 끝내 TV 전원을 꺼 버렸다. 정적이 찾아온 병실 문을 열고 민아린이 들어왔다.

“우진 씨. 출출하실 것 같아서 샌드위치 좀 사 왔어요.”

민아린이 싱긋 웃으며 김우진의 손 위에 샌드위치를 올려 주었다. 얼떨결에 샌드위치를 받게 된 김우진이 머뭇거리다가 고맙다고 말했다.

“이결 씨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군요.”

민아린은 시선을 돌려 침대에 잠들어 있는 한이결을 바라봤다. 상처를 모두 치료하고 기운도 회복했지만, 워낙 몸에 받은 충격이 컸던 터라 한이결은 이틀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우울한 표정으로 김우진이 물었다. 민아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결 씨는 그저 쉬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동안 참 바쁘고 힘들었잖아요. 어쩌면 진작에 이런 휴식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죠.”

“…….”

“걱정되는 마음은 알지만, 그렇다고 식사를 거르거나 잠을 줄이시면 안 돼요. 이결 씨가 깨어나서 얼마나 잔소리를 하겠어요.”

달래는 말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축 처진 어깨는 여전했다. 하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결 씨.’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깨어나지 않는 단정한 얼굴을 보며 민아린은 생각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여러 사람이 왔다 갔어요.’

로헌 길드의 마스터와 부마스터는 물론이고, 제이나 길드의 마스터와 부마스터까지 직접 레퀴엠 병실로 발걸음을 했다. 민아린은 그중 새까만 정장이 유독 잘 어울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로헌의 부마스터, 하태헌. 그가 잠든 한이결의 눈가와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민아린은 복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한이결과 원래부터 알던 사이라는 기사를 보긴 했지만, 저런 묘한 감정까지 느껴질 만큼 친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눈치가 꽤 빠른 편에 속하는 민아린은 하태헌과 한이결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천사연도 문제인데, 로헌의 부마스터라니. 거기에다가.

“한이결….”

아픈 주인을 향해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잔뜩 시무룩한 김우진을 보며 민아린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결 씨,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앞으로 더 치열하고 정신없어질 한이결의 주변을 예상하며 민아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하늘거리는 새하얀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왔다.

“형님, 뭐 하세요?”

“어?”

꿈을 꾸듯이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옆을 돌아보자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눈 뜨고 잤어요?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없고.”

“…그랬냐?”

전혀 몰랐는데. 머쓱함에 목덜미를 쓸며 대답하자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졸았어요? 많이 피곤하면 내 방에서 좀 자요.”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높다란 천장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녀석이 ‘본가’라고 칭한 이 집은 꽤 컸다.

“뭐 급하다고요. 느긋하게 해도 되잖아요.”

“벌써 4시인데 자고 일어나서 어느 세월에 하게. 금방 어두워질 텐데.”

“그냥 오늘 하루 자고 가요. 어차피 아버지랑 어머니는 여행 가셔서 아무도 없는데.”

“까분다.”

내 대답에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앞장서서 복도를 걸었다. 그 뒤를 쫓아가며, 나는 고민 끝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그, 너 누나는?”

“누나요?”

“잘 지내나 해서.”

어색하게 덧붙인 말에 녀석이 발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검은 눈동자에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형님, 우리 누나한테 관심이 좀 많네요?”

“…관심은 무슨. 가족 얘기 하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런가? 흠, 찝찝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멈춰 선 곳은 연한 베이지색 방문 앞이었다.

“어릴 때 누나랑 같이 놀던 방인데, 좀 큰 후로는 쓰지를 않아서 창고가 됐어요.”

그가 잡아당기는 문고리 위에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연서윤. 연선우.

먼지 냄새가 살짝 나는 방 안에는 낡은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커다란 책장과 여러 잡동사니가 든 채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박스가 있었다. 허공에 손바닥을 휘휘 저으며 먼지를 날린 연선우가 내게 말했다.

“아마 여기 어딘가에 앨범이 있을 텐데, 형님이 찾으시는 사진은 거기 꽂혀 있을 거예요. 우리 집은 사진 액자 같은 건 두지 않으니까.”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박스 입구를 열어 봤다. 그 안에는 스케치북과 화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아마 박스는 대부분 누나 물건일 거예요. 스케치북이나, 미술용품이나….”

그 설명에 슬쩍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 펼쳤다. 빛바랜 종이를 보아 꽤 옛날에 사용한 스케치북이 틀림없을 텐데도, 새파란 물속을 헤엄치는 오색 빛깔 물고기가 그려진 그림은 무척이나 분위기가 좋았다.

한 장만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손이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네 장쯤 넘겼을까, 책장에서 책을 꺼내 살피던 녀석이 내게서 스케치북을 뺏어 갔다.

“형님. 놀러 오셨어요?”

“……본 지 10분도 안 됐는데.”

“누나는 허락 없이 자기 그림 보는 거 싫어해요. 심심하시면 스케치북 말고 차라리 이걸 보세요.”

싫어한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연선우가 텅 빈 내 손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 보니 온통 새까만 표지에 새하얀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비스(abyss)?”

이게 뭐야. 책인가?

“소설책이에요. 한번 읽어 보세요.”

“무슨… 나 이런 거 안 봐.”

“왜요? 꽤 재밌어요. 10년도 더 전부터 이 책장에 꽂혀 있더라고요. 아버지 취향은 아닌데 누가 갖다 둔 건지.”

찌푸려진 내 미간은 보이지도 않는지, 녀석은 책장에서 똑같은 제목의 책을 두세 권 더 뽑아서 내 옆에 놔 줬다. 무슨 소설책이 죄 새까맣고 이름만 덜렁 적혀 있지? 설마, 이거….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이상한 책 같아서.”

“아니거든요. 진짜 그냥 소설책이에요. 그야 뭐, 좀 남성향이긴 한데.”

“남성향은 또 뭐야. 역시 이상한 책이지?”

“여자가 많이 나오는 책이라는 뜻이에요. 주인공은 남자고…. 형님, 이런 거 진짜 안 봤구나?”

“이런 걸 뭐 하러 봐?”

건성으로 책을 파라락 넘긴 나는 던지듯 책을 내려놨다. 흥미라고는 쥐뿔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 글자 나열이 어떻게 그 애의 그림보다 재미가 있겠어?

스케치북이나 마저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그림의 주인이 몰래 보는 건 싫어한다고 하니… 나는 포기하고 본래 목적인 사진을 찾기 위해 다른 박스를 뒤졌다.

“이따 돌아갈 때 책 챙겨 줄게요. 갖고 가서 봐요.”

“필요 없다니까. 안 봐.”

“재밌는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연선우의 새하얀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아,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존댓말 제대로 써, 인마.”

“에이씨. 완전 꼰대…….”

얼씨구.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어린애가 반말 쓰는데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누나는 반말해도 안 때릴 거잖아요!”

“그 애는 너처럼 싸가지 없게 반말 안 쓰잖아. 그리고 쓴다 해도 여자애를 어떻게 때려?”

“차별이에요!”

차별 같은 소리 하네. 혀를 차며 박스 하나를 녀석에게 밀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박스나 뒤져. 사진 찾으면 바로 갈 거야.”

“바로요? 왜요? 저녁 먹고 가요.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 달라고 말해 놨는데.”

“나 바빠.”

“아, 바빠도 밥은 먹을 거 아니에요! 먹고 가요. 네? 먹고 가요, 형!”

연선우가 그 커다란 덩치로 팔에 매달리며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장난처럼 달고 살던 형님 호칭도 때려치우고 형, 형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깟 저녁이 뭐라고. 먹고 갈까.

“음, 그럼….”

지이이잉.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정장 재킷 안쪽에서 울리는 진동에 말을 멈췄다.

“형?”

“잠시만.”

연선우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며 등을 돌렸다. 지이잉. 그 와중에도 진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꺼내 든 핸드폰의 액정에는 예상했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지잉. 덜덜 떨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주변이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오른 것을 알아챘다.

낡은 책 냄새도, 화구가 가득 든 박스도, 내게 저녁을 먹고 가라던 연선우도 모두 어둠에 먹혀들었다. 내 손에 남은 것은 숨통을 조여 오는 집착 어린 전화뿐이었다.

“하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자마자, 눈앞을 가득 메웠던 어둠을 뚫고 새하얀 빛이 가득 차올랐다.

***

“…….”

“…한이결.”

눈을 뜨자마자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뻐근한 상체를 일으킨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3일하고도 8시간 12분 만에 깨어났군.”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한 천사연이 날 보며 싱긋 웃었다. 방금 깨어났는데도 묵직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 다시 잠들고 싶다.

“…왜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은가?”

그럼 좋겠냐? 나는 혹시나 해서 병실을 둘러봤다. 안타깝게도 천사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김우진이나 민아린 씨 말이야.”

“글쎄?”

천사연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지만, 어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너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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