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6)화 (96/394)
  • 96화

      

    아무리 폭주 상태에 돌입했다 하더라도, 강승건은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 두 명의 상대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강승건을 ‘적’으로 간주했을 경우였다.

    저지른 죄가 크다고 해도, 강승건은 몬스터가 아니다. 심지어 한 길드를 책임지는 마스터이기도 했으니, 천사연과 하태헌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위협적인 공격을 통해 강승건에게서 기운을 최대한 빨리 뽑아내야 하지만, 목숨은 지켜 줘야 한다. 이 어려운 상황을 천사연과 하태헌이 합을 맞춰 이뤄 내야 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강승건이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할 일은,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흐름을 제어하는 것. 그게 최선이었다.

    “그으으윽, 그윽!”

    눈동자가 돌아간 채로 피눈물을 흘리던 강승건이 거리를 좁혀 오는 천사연과 하태헌의 존재를 눈치채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콰드득, 콰득. 주변에 널려 있던 콘크리트 파편 수십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인형을 상대할 때보다 기운을 확연하게 줄인 천사연이 먼저 앞장섰다. 내 능력으로 무리 없이 공중을 날아온 천사연이 거침없이 강승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쿠웅!

    일부러 빗맞힌 검은 강승건을 스치고 지나가 땅을 부쉈다. 나는 그 순간에 맞춰, 타오르는 천사연의 불이 강승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바람의 흐름을 바꿨다.

    “크으, 극!”

    천사연의 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지만, 저 정도 상처는 괜찮았다. 오히려 강승건은 그 상처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기운을 한 번 더 왕창 내뿜었다.

    강승건이 천사연의 공격을 피하고자 뒤로 물러서면, 그 자리에 미리 가 있던 하태헌이 이어서 공격했다. 하태헌도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로 애꿎은 땅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둘이 대놓고 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승건은 몸의 상처가 끊이질 않고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흐름이 나쁘지 않아.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끝날 수 있겠어.’

    이성을 잃은 강승건이 뿜어내는 기운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저 정도로 한꺼번에 많은 기운을 빼내면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솔직히 그거까지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할 건 그저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크, 으아아악!”

    그때, 강승건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운을 해일처럼 주변에 강하게 퍼뜨렸다. 몸이 뒤로 휙 밀리며 피부에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강승건을 몰아붙이던 천사연과 하태헌도 몸이 조금 밀렸다.

    쿨럭!

    강승건이 피를 한 움큼 뱉어 내는 동시에, 근처에서 사람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뭔가 이상하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과 잔해들이 모조리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수가 열이 넘어가는 것을 발견한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이거.

    “천사연!”

    나는 강승건을 상대하느라 아직 상황을 모르는 천사연에게 외쳤다.

    “기다려! 지금 기운이 끊기면…!”

    “쿨럭!”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승건이 또다시 피를 쏟아 냈고, 동시에 동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공중에 높이 떠올랐던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 하나가 아래로 떨어지자, 도망치라는 경악 어린 외침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공중에 떠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남은 잔해들과 그 아래로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있는 부상자들을 발견했다. 대피를 돕는 능력자와 구조대원들이 급히 움직였지만, 파편과 잔해들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모두 막아 내기는 불가능했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엉켜드는 와중에도 나는 기운을 빠르게 끌어 올렸다. 점차 줄어드는 강승건의 기운과 반대로 이제는 내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이결!”

    하태헌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기운을 끌어모았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내 몸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두통이 점차 심해졌다. 나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보내던 기운도 다 끊어 내고 오로지 힘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한이결, 그만해!”

    정신을 잃은 강승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진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던 파편과 잔해들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나는 팔찌의 진동과 한계까지 치달은 기운이 마구잡이로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모아 놨던 바람을 강하게 폭발시켰다.

    후웅!

    “흐윽…!”

    심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멀리 퍼져 나간 바람이 파편과 잔해들의 추락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지탱하고 있는 파편과 잔해가 바람이 아닌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마에 핏줄이 돋고, 온몸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떨려 왔다.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막아 낸 콘크리트 파편 아래로 겁먹은 부상자들이 보였다. 저들이 모두 피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상체를 새우처럼 말며 입술을 짓씹었다.

    ‘최소한 1분은 버텨야 하는데…….’

    버틸 수 있을까?

    바닥까지 소모한 기운이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기 시작했다. 허억, 헉… 숨통을 틀어막힌 것처럼 거칠어진 호흡이 귓가에 울렸다.

    “한이결!”

    하태헌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만 더. 조금만…….

    억지로 버텨 보려던 그때,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미처 막아 낼 새도 없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그것은 쇠 비린내가 가득한 검붉은 피였다.

    “아……?”

    투둑.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던 손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시야가 확 뒤틀리며 파편과 잔해를 막아 내고 있던 기운이 강제로 뚝 끊겼다.

    쿠웅! 쿵!

    바람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나 역시 아래로 추락했다.

    ***

    “저기, 힐러님.”

    부상자의 치료를 마친 민아린은 뒤에서 들려온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붉은빛이 감도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린 여자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다가왔다.

    “아이가 다리를 다쳤는데, 그게. 좀 심한 것 같아서.”

    “제가 볼게요.”

    이름이 차수연이라고 했었나. 까탈스러운 외모와 달리 겁을 집어먹고 우는 아이를 달래 주는 모습은 꽤 익숙해 보였다.

    “흐어어엉!”

    차수연의 말처럼 아이는 무릎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능력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피를 닦아 주자 고통이 수그러들었는지 아이가 민아린과 차수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를 구급대원에게 인도한 민아린이 곁에 서 있는 차수연에게 물었다.

    “혹시 동생이 있으신가요?”

    “예? 어, 저요?”

    “네. 아이 달래 주시는 데 능숙해 보이셔서.”

    민아린이 먼저 이런 질문을 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차수연이 어깨를 움찔 떨며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친척 동생들이 어려서요….”

    “그렇군요.”

    차수연은 부드럽게 웃는 민아린과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민아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딘가 우진 씨가 떠오르기도 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네.’

    한가로운 민아린과 달리 차수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상대방의 시선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차수연은 가뜩이나 낯가리는 성격에, 민아린처럼 토끼 같은 분위기의 사람과는 친해져 본 경험이 없는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닌데? 당장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민아린이 대놓고 보고 있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차수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민아린의 시선을 견뎌 냈다.

    “저기….”

    그렇게 한참을 차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아린이 막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쿠구궁!

    멈췄던 땅이 다시 흔들리고 바닥이 깊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휘청이는 민아린의 몸을 반사적으로 붙잡아 준 차수연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서쪽을 바라봤다.

    “이거, 블런 길드 마스터가 또 능력을…….”

    “차수연 씨, 위에!”

    민아린이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이 계속해서 높게 떠오르고 있었다. 대충 봐도 그 숫자가 열이 훌쩍 넘었다.

    민아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주변을 살폈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부상자들이 가득했다. 이 상태에서 저것들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안 되겠어요. 제가 가서.”

    “잠깐만요.”

    당장 강승건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던 차수연의 팔을 민아린이 붙잡았다.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결 씨….”

    그 말에 차수연도 저 멀리 공중을 날고 있는 한이결을 발견했다. 후웅, 그를 중심으로 생겨난 바람이 멀리 떨어져 있는 차수연과 민아린에게까지 닿아 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낀 차수연은 경악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먹구름이 낀 흐린 하늘 아래에서 강한 돌풍을 만들어 내고 있는 한이결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부상자들은 물론이고, 구조대원을 도와 무너진 건물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우서혁과, 일그러진 자동차에서 다친 사람을 구해 내던 김우진, 쓰러져 있는 부상자를 등에 업은 홍시아까지도.

    “한이결!”

    심상치 않은 기운에 하태헌이 다급히 외쳤지만, 한이결은 오히려 하태헌과 천사연에게 보냈던 바람까지 끊어 내며 기운을 끌어모았다.

    “한이결, 그만해!”

    밀려오는 초조함에 하태헌이 다시 한번 외쳤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저 정도로 기운을 사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당장 멈춰야 했다.

    강승건이 기절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하태헌은 한이결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콘크리트 파편과 잔해들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한이결도 한계까지 끌어 올렸던 능력을 강하게 폭발시켰다.

    “크윽…!”

    사방으로 퍼져 나간 돌풍은 추락하던 콘크리트 파편과 잔해들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몸이 밀릴 만큼 강한 바람을 하태헌은 다리에 힘주어 버텨 내고, 그 직후 한이결이 공중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이야! 구조해!”

    “멀리 떨어지십시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태헌이 멈췄던 몸을 다시 움직였다.

    떨리는 몸을 웅크린 채 홀로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한이결이 머릿속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그때도 지금 같았을까. 한이결을 혼자 두고 떠났던 기억이 떠오르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

    “한이결…!”

    있는 힘껏 뛰어서 거의 도착했을 때, 입에서 피를 토해 낸 한이결이 아래로 훅 떨어졌다. 쿠웅, 쿵! 파편과 잔해들의 충돌로 흔들리는 땅을 밟고 하태헌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새까만 먼지로 온몸이 감싸져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진 한이결의 몸을 무사히 받아 냈다.

    “하아…….”

    하태헌이 품에 들어온 이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이결 씨!”

    차수연에게 안긴 채로 다가온 민아린이 급히 한이결의 손을 붙잡았다. 겨우 지혈됐던 머리의 상처가 다시 터진 데다, 피까지 토해 낸 한이결은 새하얀 얼굴이 온통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기운, 기운부터 채울게요.”

    민아린이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뒤이어 도착한 김우진도 하태헌의 품에 안긴 채로 정신을 잃은 한이결을 보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끝이군.”

    기절한 강승건을 발로 툭 차며 천사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 버린 인형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흐린 하늘 위로 가득 퍼졌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