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5)화 (95/394)
  • 95화

      

    “으윽…!”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작은 파편이 코트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나는 코트를 눈 부근까지만 살짝 내려 앞을 바라봤다.

    하태헌이 콘크리트 파편을 베어 내며 강승건과의 거리를 거침없이 좁혀 가고 있었다. 하태헌의 행동에 놀란 강승건이 다급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컥!”

    과도한 기운 사용으로 부작용이 오는지, 강승건이 마른기침을 뱉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쿠구구궁! 땅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며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여기저기 움푹 파였다.

    “죽어! 죽으라고!”

    외침과 동시에 땅속에서 흙과 돌이 마구잡이로 엉킨 채 불쑥 치솟았다. 그러고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우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윽!”

    쿠웅! 먼지와 함께 흙이 확 튀었다. 하태헌이 앞으로 나아가던 몸을 멈추고 공격을 피했다. 콰앙, 쾅! 길게 솟구친 흙 수십 개가 쉴 새 없이 내리꽂히며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 태헌 씨. 그냥 제가…… 읏.”

    하태헌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흙을 여러 번 베어 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하태헌이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아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얌전히 있어.”

    하태헌의 몸에서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허리를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느낌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흩날리는 암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강승건이 만들어 낸 흙기둥을 향했다.

    나는 그제야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양의 새까만 먼지가 주변에 몰려오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강승건의 흙기둥을 덮을 만큼 수많은 검은 구체가 허공에 생겨났다.

    쿠우웅!

    흙기둥에 달라붙은 검은 구체는 굉음과 함께 차례대로 터지기 시작했다. 폭발로 흩어진 흙이 다시 모이기도 전에 다른 구체가 또 터지면서, 흙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로 아래로 떨어졌다.

    끊임없이 터지는 구체와 흩날리는 흙을 뚫고 하태헌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강승건의 앞까지 제대로 도착한 하태헌이 내가 말리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헉!”

    “하태헌 씨!”

    다행히 강승건이 제때 몸을 뒤로 물려 공격을 피했다. 기겁한 나는 하태헌의 멱살을 붙잡으며 외쳤다.

    “죽이면 안 됩니다, 하태헌 씨!”

    “안다.”

    알긴 뭘 알아! 방금 강승건이 피하지 않았으면 두 다리가 잘려 나갈 뻔했는데!

    “심한 공격도 안 돼요!”

    “왜?”

    “예?”

    하태헌은 내 말에 대답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강승건은 신체 능력이 나쁘지는 않은지 아슬아슬하게 다 피했다. 하태헌이 강승건이 날리는 뾰족한 돌창을 검으로 쳐 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죽이지 말라는 건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어.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 상대하면 알아서 기절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팔이고 다리고 상관없이 베어 버리겠다는 뜻이에요?”

    내 질문에 하태헌은 뭐가 문제냐는 눈빛을 했다.

    “어차피 범죄를 저지른 놈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

    맞다. 하태헌은 이런 놈이었지. 악역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처음 하태헌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진짜 아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하태헌이 그때 나름 봐준 걸지도 모르겠다.

    “아, 안 됩니다.”

    지금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강승건 마스터도 정신 지배에 걸려서 저지른 일 같은데, 그게 팔다리가 잘릴 정도로 큰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납치당한 피해자가 할 말인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물론 저도 강승건이 짜증 나서 몇 대 패고 싶긴 한데, 그건 다른 문제잖아요! 정신 지배를 풀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기절시켜야 합니다. 천사연도 그러라고 했고요.”

    열심히 설득하던 나는 하태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뭐지? 그럴 리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가 삐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천사연을 언급해서?

    “허억, 이… 좆같은 놈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거친 숨을 내쉬던 강승건이 욕설을 내뱉었다. 마구잡이로 능력을 써 대던 강승건은 이마를 짚은 채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슬슬 끝이 보이는 모습에 하태헌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검의 형태를 바꿨다.

    검이 뭐로 바뀌었는지 바로 알아챈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강승건에게 애도를 표했다. 불쌍한 놈.

    하태헌이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고 공중에서 몸을 날렸다. 강승건이 그런 하태헌을 향해 급히 옆에 있던 콘크리트 파편을 날렸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졌다.

    “으헉!”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한 하태헌이 숨을 들이켜며 도망치려는 강승건의 멱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크악!”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강승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태헌은 쓰러진 강승건을 향해 무기를 들어 올렸다.

    퍼억!

    “끄아악!”

    퍽! 콰직, 빠악!

    새로운 무기, 새까맣고 튼튼한 몽둥이를 쥔 채로 하태헌이 엄청난 속도로 강승건을 매타작하기 시작했다. 김우진의 총에 맞은 어깨와 허벅지에도 서슴지 않고 매가 날아들었다.

    “끄아, 악! 으악! 그, 그만! 시발!”

    그리고 나는 강승건이 처맞는 모습을 태헌의 품에 안긴 채로 가장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와중에 하태헌은 패는 것도 참 잘했다. 때린 데 또 때리고, 안 때린 곳 골라 때리는 모습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퍼억! 퍽! 빠각!

    하태헌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강승건을 때렸고, 강승건은 이렇다 할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계속해서 얻어맞았다. 웬만한 부상으로는 죽지 않는 S급인 터라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팔다리 잘릴 뻔했는데 뭐. 이 정도면 하태헌도 많이 봐준 거다.

    “끄으으윽…….”

    그렇게 얼마나 처맞았을까. 결국 강승건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었다. 땅을 흔들던 지진도 뚝 그쳤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폭주 위험 단계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강승건은 겨우 S급이었으니, SS급 하태헌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애당초 죽여도 되는 상대였으면 이만큼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을 거다.

    “끝난 거 같네요.”

    하태헌의 품에서 빠져나와 코트를 돌려주었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쉬고 싶었지만, 아직 남은 상대가 있었다.

    “뭐야. 왜 지진이 멈췄나 했더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 높게 쌓여 있는 건물 잔해 위로 올라서 있는 인형이 보였다. 천사연과의 전투가 쉽지 않았는지, 인형은 왼팔 팔꿈치 아래가 없었고 낫의 날 부분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그런데도 인형은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였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기대에 못 미치는 쓸모없는 돼지 새끼구나. 사마엘이 왜 버리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네.”

    사마엘. 지하실에서도 들었던 이름이다.

    ‘저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술사와 사마엘이라는 놈이 한패인 건가?’

    혹시 사마엘이 강승건을 저렇게 만든 정신 지배 능력자라면? 나를 납치한 이유도 강승건처럼 정신을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해서?

    이성을 잃은 채로 저 인형이나 강승건에게 바람 능력을 써 주며 보조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우, 그래도 이렇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망가진 낫을 거리낌 없이 바닥에 던진 인형이 반절 잘려 나간 채 타오르는 왼팔을 붙잡아 그대로 잡아 뜯었다. 뚝, 뚜둑! 끔찍한 소리와 함께 팔이 어깨에서 빠져나가며 붉은 피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자아, 착하지.”

    인형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오른손의 중지와 엄지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딱, 딱, 딱. 세 번에 걸친 핑거 스냅에 기절한 채로 쓰러져 있던 강승건이 몸을 크게 떨었다.

    “끄륵….”

    강승건의 목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리며 동시에 상체가 천천히 움직였다. 머리와 팔다리가 축 처진 채, 몸뚱이만 불쑥 들린 강승건은 입과 코, 눈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한이결!”

    기괴한 광경에 당황하는 나를 천사연이 불렀다. 그가 인형에게 몸을 날리는 사이, 인형이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또다시 부딪쳤다.

    딱.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나는 급히 기운을 한 번 더 끌어 올려 천사연에게 강한 바람을 씌웠다. 인형의 목을 향해 천사연의 검이 휘둘러지는 그 짧은 순간, 인형의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부딪혔다.

    딱!

    인형의 목이 베어지는 동시에 강승건이 눈을 번쩍 떴다. 검은자 없이 희게 뜬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으윽, 그아아악!”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을 치는 강승건에게서 날카로운 기운이 새어 나왔다. 나는 하태헌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상황을 살폈다.

    쿠구구궁!

    강승건의 발밑 땅이 움푹 꺼지고 갈라지면서 크게 흔들렸다. 멈췄던 지진이 더욱 강해지자 멀리서부터 비명과 함께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천사연!”

    인형술사와 연결이 끊어진 인형을 불로 태워 낸 천사연이 내 외침에 강승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강승건의 기운에 천사연의 머리카락과 옷이 마구 흩날렸다.

    “기운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버텨야 돼. 하태헌.”

    천사연의 검을 타고 흐르는 용암 같은 끈적한 피에서 열기가 줄어들었다. 곧바로 말뜻을 알아챈 하태헌이 나를 놓으며 무기를 검으로 바꿨다.

    “한계까지 밀어붙여. 능력을 쓰게 만들어야 하니까.”

    내게서 멀어진 하태헌이 천사연과 나란히 서서 강승건을 바라봤다. 콰지직, 콰직! 땅이 쩌적 갈라지며 돌 파편 수십 개가 여기저기 흩날렸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운에 A급인 나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맡기고 뒤에서 서포팅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강승건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뒤를 바라봤다.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조심해! 불이 여기까지 번졌어!”

    “제 아이 좀 찾아 주세요!”

    강승건의 능력으로 잔뜩 무너지고 부서진 거리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서혁과 김우진, 홍시아가 구조 작업을 돕고 민아린과 차수연이 부상자들을 살피고 있었지만 워낙에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도와 달라는 비명과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밀려오는 초조함에 마른침을 삼키며 강승건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