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서럽게 우는 김우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는데, 건물이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불길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후드득 쏟아져 내리고 벽에 선명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우진. 이러다 무너지겠어.”
아무래도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내 말에 김우진이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자.”
쿠궁! 쿠구궁!
굉음과 함께 건물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등에 업은 김우진의 몸을 바람으로 감쌌다.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몸에 닿기도 전에 바람에 밀려 옆으로 떨어졌다.
“지금!”
이리저리 파편들을 헤치며 타이밍을 재던 나는 작게 생긴 틈을 발견하고 김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김우진이 힘차게 뛰어올랐다.
휘이잉!
바람을 이용해 파편을 밀어내며 그 사이로 무사히 빠져나온 나와 김우진은 공중에서 회색빛 연기를 풍기며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건물을 내려다봤다. 김우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가자, 한이결.”
가자니. 어딜?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김우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해만 남은 건물 위를 지나쳐 앞으로 쭉 나아가니, 건물 입구 근처였다. 능력을 끄고 김우진의 등에서 내려온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태헌 씨? 여길 어떻게…….”
나를 보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는 낯익은 이는 분명 하태헌이었다. 의아한 와중에도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다가가려는데, 김우진이 팔을 붙잡았다.
“치료부터 받아, 한이결.”
“어?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치료를….
“이결 씨!”
“민아린 씨?”
민아린도 와 있다고? 황급히 뛰어오는 민아린의 뒤로 홍시아와 차수연, 우서혁까지 보였다.
“아니,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예요?”
얼떨떨한 심정으로 묻자, 민아린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멍청한 소리래…….
“머리를 심하게 다쳤어요. 제대로 확인해 주세요.”
민아린에게 혼났다는 사실에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서 있으니, 옆에서 김우진이 이상한 말을 했다. 아니, 머리를 다친 건 맞긴 한데, 그렇게 설명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
“제 말은 여기 무슨 일로….”
콰각!
그 순간, 오싹한 공포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난 천사연이 검으로 거대한 낫을 막아 냈다. 피부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 사이로 천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좋은데.”
그가 땅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악령을 발로 짓밟으며 검을 휘둘러 낫을 쳐 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상황 정리부터 하지.”
카강!
끄아아악! 끼아아악! 낫에서 솟구치는 악령들이 저마다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퍼져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천사연, 넌 왜 여기에….”
“이결 씨, 그 말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머리를 다쳤다니까요.”
김우진의 안타깝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사연의 말이 맞다. 이 사람들이 여기 왜 있는지는 나중에 묻고, 일단 적을 처리해야 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생긴 연기를 바람으로 몰아내자, 얼굴 반절이 뜯겨 나간 기괴한 형상의 인형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강승건이 보였다. 인형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기긱 움직이며 아쉽다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아아, 결국 뺏겼네. 이래서 저런 돼지 새끼한테 맡기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망가진 인형이 거대한 낫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악령이 튀어나오고 해골이 기어 다니는 검은 낫은 보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이결. 능력 써.”
“하지만, 마스터! 이결 씨는 지금 상태가.”
“치료는 나중에.”
단호한 명령에 나는 민아린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어 주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어차피 저 인형이 있는 이상 편히 치료받기는 힘들 것이다. 내가 막 바람으로 천사연의 몸을 감싼 그 순간이었다.
“그어억, 끄아아악!”
바닥에 엎어진 채로 부들거리던 강승건이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던 그가 꾸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입 밖으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무슨…!”
“구억, 거어억!”
쿠구구궁!
강승건이 몸을 마구 비틀며 두 번째로 피를 토해 냈을 때, 온 땅이 지진이 난 것처럼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잘한다! 부숴! 다 부숴 버리라고!”
인형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자, 강승건이 이마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콰직, 그의 발밑에서부터 바닥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지, 지진이야!”
가로등이 쓰러지고 전선 터지는 소리가 나며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강승건의 능력이 통제선 밖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폭주 위험 단계군.”
“폭주 위험 단계?”
“기운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내버려 두면 폭주를 시작할 거다. 우서혁, 김우진. 둘은 관리본부 직원과 함께 민간인 대피를 도와.”
“예.”
“알겠습니다.”
그 명령에 우서혁이 옷을 찢으며 늑대로 변신했고, 김우진은 두 명의 새로운 분신을 만들어 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홍시아가 차수연과 함께 다가와 말했다.
“수연이랑 나도 도울게. 여기 더 있어 봤자 민폐만 될 것 같으니까. 민아린 힐러님,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알겠어요.”
홍시아의 요청에 잠시 나를 보던 민아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이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린 천사연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하태헌과 함께 강승건을 상대해. 기절시키면 폭주는 멈출 거다. 죽이지는 말고.”
“뭐, 잠….”
내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천사연이 인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채앵! 거대한 낫과 검이 부딪히며 마치 폭발하듯 불이 확 타올랐다.
“그흐, 으으윽…!”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일어난 강승건의 주변에 날카로운 돌조각 수십 개가 떠올랐다. 콰득, 콰드득! 땅이 심하게 뒤틀리며 날카로운 파편이 흙을 헤집고 밖으로 튀어 올랐다. 강한 흔들림에 비틀거리는 내 몸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하태헌이 붙잡았다.
“하태헌 씨.”
“일단 천사연 마스터 말대로 하는 게 낫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하태헌의 목에 팔을 두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안아 왔다. 천사연에게 사용한 기운을 끊지 않은 채로 나와 하태헌의 몸을 새로운 바람으로 휘감았다.
위로 높이 떠오르자 난장판이 된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로는 바닥이 죄 뒤집혀 곳곳에서 교통사고가 벌어졌고, 가로등과 건물 여럿이 이미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쿠궁! 쿠구궁!
통제선을 지키고 있던 관리본부 직원들과 길드원들이 대피를 돕고 있었지만, 피해를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강승건의 폭주를 멈춰야 했다.
“가죠, 하태헌 씨.”
머리를 짚은 채로 비틀거리며 서 있는 강승건의 앞으로 내려오자, 우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땅이 덜걱거리며 움직였다. 후웅, 새까만 먼지가 내 바람과 함께 섞여 실드처럼 몸을 감쌌다.
“크으, 윽!”
근처에 있는 땅을 온통 뭉개 놓던 강승건이 실핏줄이 다 터진 붉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히죽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뭐지?’
그 모습에 찝찝함이 몰려와 미간을 찌푸리자, 강승건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 기억났어. 시발. 기억났다고.”
“……?”
“너지? 너 맞지? 시발, 그때. 그 냄새나는 판자촌!”
판자촌?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강승건은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허리를 젖혀 가며 꺽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어! 너나 저 개 같은 고아 새끼나, 똑같이 내 인생을 좆 되게 하는 놈이었던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시발!”
“…저게 무슨 소리지?”
“모르겠습니다.”
고아 새끼는 천사연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와 내가 강승건에게 뭘 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신나게 웃던 강승건이 반쯤 미친 눈빛으로 날 보며 중얼거렸다.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내 인생도 제자리를 찾아가겠지? 어?”
불안하게 흔들리던 땅속에서 거대한 돌 파편이 흙을 헤치고 불쑥 튀어 올라왔다. 쿠구궁! 무너지는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 하태헌이 내 몸을 힘주어 안으며 날아오는 돌 파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윽!”
부서진 돌 파편의 잔해 중 하나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부분의 공격은 하태헌의 검과 실드로 막혔지만, 파편은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날아와 모두 막아 내기가 힘들었다. 나는 자꾸만 얼굴로 날아오는 파편을 겨우 피하며 하태헌에게 물었다.
“강승건의 능력이 정확히 뭡니까?”
대충 땅을 제어하는 능력이라고 추측했는데, 지금 보니까 범위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날아온 콘크리트 파편을 베어 내며 하태헌이 대답했다.
“흙과 암석으로 구성된 것들을 조종할 수 있다. 활용성은 좋지만, 그뿐이다.”
확실히,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은 S급 기운이 담긴 돌과 콘크리트 파편이 끝이었다. 온 땅을 뒤흔들며 지진을 일으키는 것을 제외하면 하태헌의 설명처럼 전투 계열의 능력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날아오는 거대한 돌조각과 파편을 쳐 내느라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하태헌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를 노리는 것 같은데, 제가 다른 곳에서 시선을 끌…….”
“입 다물어라.”
“넵.”
역시 안 통하는구나. 내가 어색하게 웃자, 하태헌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굴업도 섬 게이트에서 확실히 느꼈다. 넌 절대로 혼자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에이, 그 정도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려던 나는 무시무시한 하태헌의 눈길에 몸을 움찔 떨며 말을 멈췄다. 아무래도 진심인가 봐. 이제는 하태헌에게도 잔소리를 듣네.
“하지만 이대로는 폭주를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방법이 있다.”
“정말요? 뭔데요?”
그래. 생각해 보면 하태헌은 어비스의 주인공 아니던가. 나보다도 훨씬 똑똑하고 센스가 좋은 남자였다. 나는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안고 하태헌의 설명을 기다렸다.
“방법은.”
방법은?
“닥치고 돌진이다.”
“예?”
하태헌이 인벤토리에서 SS급 코트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자, 하태헌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강승건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자, 잠깐만요! 하태헌 씨!”
이런 미친!
그제야 ‘닥치고 돌진’이라는 말의 뜻을 깨달은 나는 급히 코트로 몸을 가리며 하태헌에게 몸을 바싹 밀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