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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3)화 (93/394)
  • 93화

    24. 폭주

    끼이이이익!

    낫에서 튀어나온 악령이 울부짖으며 천사연의 팔에 매달렸다. 살점을 녹이고 공포 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높은 등급의 악령이 달라붙었음에도 천사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악령을 맨손으로 뜯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키잉! 기긱!

    낫의 둥근 굴곡을 따라 검이 쭉 미끄러졌다. 흩날리는 불티 사이로 인형의 매끈한 눈알과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카렌이 파고드는 천사연을 힘주어 쳐 내자, 뒤로 물러선 천사연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을 딛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탓, 콰각!

    정확히 카렌의 바로 앞에 내려온 천사연이 몸을 낮춘 그대로 빠르게 검을 횡으로 그었다. 찌익, 카렌의 옷이 찢어지며 쇄골 부근에서 피가 튀었다.

    “이익…!”

    이어서 탄탄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카렌을 향해 있는 검을 쥔 손목이 빙글 돌았다. 카렌이 정확히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두 번째 공격을 급히 낫 손잡이로 막아 내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궁!

    건물 내부가 크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 틈에 천사연에게서 거리를 벌린 카렌의 뒤로 강승건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고 나타났다.

    “뭐야?”

    “그, 그게.”

    납치한 능력자를 감시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온 강승건의 행동에 카렌이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강승건이 공포에 질려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 새끼가… 사, 사라져서. 이, 이상한 놈이 총을…….”

    “하…….”

    강승건의 새하얀 정장은 어깨와 허벅지 부근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천사연은 자신의 예상대로 김우진이 한이결을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창백하게 질린 채 횡설수설하는 강승건을 보며 한숨을 내쉰 카렌이 낫을 휘둘러 바닥을 거칠게 내리찍었다.

    “야, 건물 부숴.”

    “으, 어, 예?”

    “능력 써서 건물 무너뜨리라고. 멍청한 새끼야.”

    그 말에 강승건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쿠궁, 쿵! 건물이 본격적으로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여기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천사연은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파편을 피해 뒤로 몸을 날리며 쓰러져 있는 홍시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빨리 부숴! 부수라고!”

    “으, 허억…!”

    카렌의 패악에 가까운 재촉에 이제는 바닥까지 억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쯧. 귀찮아졌다는 생각에 혀를 찬 천사연이 기운을 한 차례 더 끌어 올렸다. 천사연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콘크리트가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내렸다.

    쿠구구궁!

    천장이 모두 무너지자 건물은 더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형체를 잃어 갔다. 뿌옇게 일어난 연기가 천사연과 홍시아를 덮었다.

    ***

    쿠구궁!

    굉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차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은 거 맞겠지?’

    초조한 마음에 건물 앞을 서성이는데,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서혁 비서님!”

    밝은 갈색 머리의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서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민간인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관리본부 직원들이 갈색 머리 여자를 막지 않자, 차수연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녀가 우서혁이 부른 레퀴엠 소속 힐러임을 알아챘다.

    “이결 씨는요?”

    “들어가신 분들 모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요? 설마…….”

    우서혁의 대답에 민아린이 얼굴을 굳히며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강승건 마스터 외에, 누군가가 더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이결 씨를 구해 내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민아린의 모습에 우서혁은 내심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릉, 건물 내부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들어가 보는 건 안 되겠죠?”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스터께서 그런 명령은 하지 않았습니다.”

    눈썹 끄트머리를 내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민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우서혁에게 전화로 한이결이 납치당하고, 마스터와 김우진이 현장에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힐러인 자신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민아린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차수연은 침울한 분위기에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저 힐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한이결이랑 엄청 친한가 보네.’

    때마침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민아린과 차수연의 눈이 딱 마주쳤다. 민아린의 동그란 눈을 본 차수연은 머쓱함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때였다. 통제선 너머로 검은 차 한 대가 멈춰 서며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차수연의 연락을 받고 온 하태헌이었다. 그를 발견한 차수연이 반색하며 다가갔다.

    “하태헌 씨!”

    “한이결은 어딨습니까?”

    성큼성큼 걸어온 하태헌이 차수연을 보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차수연이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대답했다.

    “아직이에요. 아무런 소식이 없.”

    “들어가겠습니다.”

    차수연의 말을 끊어 낸 하태헌이 건물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능력으로 만들어 낸 새까만 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막 건물로 들어서려는 그때, 우서혁이 문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하태헌 부마스터.”

    “…….”

    입구를 가로막은 우서혁을 하태헌이 싸늘하게 노려봤다. 그럼에도 우서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비키십시오, 우서혁 비서.”

    “내부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섣불리 끼어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간 길드에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번 마주쳤던 터라 서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태헌이 대놓고 위협적인 기운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연락을 받고 오기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거로 아는데,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다 해도 아무 계획 없이 진입하는 것은 상황만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안전만 따질 수 없습니다. 강승건의 능력을 아실 텐데요. 이렇게 미적거리는 동안, 장소를 이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이결 씨를 구하러 들어간 길드원은 따로 있습니다. 천사연 마스터와 홍시아 마스터는 어디까지나 시선을 끄는 역할일 뿐입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콰광!

    우서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크게 흔들리며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우서혁 비서님! 건물이…!”

    민아린의 경악스러운 외침과 함께 불안하게 흔들리던 건물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하태헌이 앞에 서 있는 우서혁의 멱살을 붙잡으며 몸을 뒤로 뺐다.

    쿠웅!

    거대한 낫이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벽을 뚫고 땅에 내리꽂혔다. 끄아아악! 아아악! 낫에서 기어 나온 악령들이 울부짖었다.

    “이런.”

    그 옆으로, 콘크리트를 녹여 낸 천사연이 홍시아를 부축한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 차수연이 홍시아의 부상을 발견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민아린 힐러.”

    천사연이 부축하고 있던 홍시아를 차수연에게 넘기며 민아린을 불렀다.

    “적당히 치료해. 기운을 다 쓰진 말고. 한이결이 곧 빠져나올 테니까.”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민아린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쳤을까요?”

    “그렇겠지. 그 성격에 얌전히 있었을 리가 없으니.”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문 민아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시아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천사연은 우서혁과 같이 서 있는 하태헌을 발견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태헌. 네가 여길 왜 와 있는 거지?”

    “…제가 할 말입니다.”

    하태헌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한이결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천사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직접 와서 싸우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하하, 뭐야?”

    하태헌과 천사연 사이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거대한 낫을 든 채로 쌓인 콘크리트 잔해 위로 올라선 카렌이 모두를 내려다보며 밝게 외쳤다.

    “고작 A급 하나를 뺏기지 않으려고 SS급이 두 명이나 온 거야? 재밌네?”

    “……인형?”

    얼굴 반절이 날아간 채로 낫을 들고 서 있는 괴상한 생김새의 인형. 심상치 않은 존재감에 하태헌은 그가 천사연과 홍시아를 막아선 상대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럼 한이결은? 건물이 무너져 내렸는데 대체 어디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강승건이 잔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으으, 윽….”

    “하아. 정말 도움 안 되는 돼지 새끼라니까.”

    카렌이 제 발밑까지 엉금엉금 기어 온 강승건의 머리를 가차 없이 후려 찼다. 그 굴욕적인 광경에 차수연이 놀라며 숨을 삼켰다.

    “헉……!”

    “저게 무슨… 강승건 마스터!”

    홍시아의 외침에도 강승건은 카렌에게 머리를 조아릴 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태헌이 불쾌한 감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정신 지배에 당한 건가?”

    붉은 구두 굽에 이마가 찢어진 강승건이 피를 흘리면서도 몸을 더더욱 아래로 낮췄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흐흠.”

    강승건의 머리에 한쪽 발을 올리며 카렌이 턱을 톡톡 두드렸다.

    “어쩔까. 이미 계획은 끝이 났고. 카렌마저 망가졌으니.”

    잠시간 고민하던 카렌은 낫을 꺼냈던 것처럼, 눈알에서 새빨갛고 동그란 구슬을 꺼내 강승건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

    “으, 어…?”

    “응. 삼켜.”

    멍한 얼굴로 강승건이 눈앞에 놓인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한 하태헌이 땅을 박차고 카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궁! 하태헌의 검이 카렌과 강승건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강승건이 구슬을 삼키는 것까지는 막아 내지 못했다.

    “어머, 화끈해라! 그렇지만 나는 저 예쁜 오빠가 더 좋아!”

    콘크리트 잔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강승건을 무시한 채 카렌이 훌쩍 뛰어올라 다른 잔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시종일관 장난치듯 행동하는 카렌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천사연에게 말했다.

    “천사연 마스터. 이쪽은 제가 상대할 테니 한이결을 찾아보십시오.”

    “흠?”

    팔짱을 낀 채로 카렌과 강승건을 구경하던 천사연이 그 말에 눈을 깜박이며 앞을 가리켰다.

    “한이결이라면 저기 오고 있군.”

    “……?”

    느긋하게 나온 말에 위를 바라보자, 붉은 머리 남자의 등에 업힌 채로 날아오고 있는 한이결이 보였다. 하아, 하태헌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온 한이결이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태헌 씨? 여길 어떻게…….”

    땅으로 내려와 하태헌에게 다가가려는 한이결을, 붉은 머리의 남자가 팔을 붙잡아 막았다.

    “치료부터 받아, 한이결.”

    “어? 하지만….”

    “이결 씨!”

    “민아린 씨?”

    때마침 홍시아의 팔을 어느 정도 치료해 준 민아린이 급히 달려왔다. 그녀의 등장에 한이결의 표정이 더욱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태헌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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