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92)화 (92/394)

92화

  

쿠구구궁!

바닥이 뒤흔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쿠구궁! 쿠궁!

지끈거리는 두통에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는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폭발음에 힘겹게 시선을 들어 계단 위를 살폈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쓸자 비린 피 맛이 느껴졌다.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제이나 길드 구역에서 대놓고 납치당했으니 분명 차수연이나 우서혁이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금방 찾아낼 줄이야.

누가 온 거지? 우서혁? 차수연이나 홍시아도 왔나? 아까 봤던 인형이 꽤 강해 보이던데, 다들 위험하지는 않을까.

날 구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도, 어째 안심되기보다는 더 불안해졌다.

‘강승건은 S급이고… 그 인형이 문제인데. 최소한 S급은 되겠지.’

S급 두 명이라.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같이 싸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기력하게 붙잡혀 있는 현실이 갑갑해서 한숨을 내쉬는데, 굉음과 함께 건물 자체가 흔들거리며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끼이익!

정신없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사이로 강승건이 철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던 그는 구석에 앉아 있는 내게 곧장 다가왔다.

“시발, 시발! 미친 새끼들, 어떻게 여기까지….”

“윽, 뭐…!”

강승건이 내 뒷머리를 억세게 잡아챘다. 그렇지 않아도 다쳤던 머리가 잡아당겨지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눈앞이 하얗게 변할 만큼 참기 힘든 통증에 입 안을 씹으며 비명을 억지로 참아 눌렀다.

“왜, 왜 그 새끼까지 온 거지? 어? 이딴 놈이 대체 뭐라고…….”

“흐으, 윽!”

강승건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묶여 있는 팔과 어깨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을 최대한 비틀었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도망가야 해. 당장!”

“……!”

지금 장소를 이동하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무슨 짓을 해서든 강승건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고통과 정상적이지 않은 강승건의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팔이라도 풀어야…!’

몇 시간 넘도록 강하게 묶인 팔은 심하게 뻐근하고 아팠지만, 통증을 참아 내며 묶인 팔을 풀어내기 위해 몸을 마구 움직였다. 내가 반항하며 격하게 움직이자, 억지로 끌고 가던 강승건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긴 채로 날 내려다봤다.

“이 씹새끼가.”

“하아, 자기소개 해?”

드디어 마주친 시선에 입을 비틀어 웃어 보이자, 눈썹을 꿈틀거린 강승건이 가차 없이 복부를 걷어찼다.

“허억…!”

한순간 숨이 턱 막히고 상체가 새우처럼 말렸다. 강승건이 마른기침을 뱉어 내는 나를 발아래에 둔 채로 침을 퉤 뱉었다.

“좆도 없는 새끼가 입만 살아서. 바빠 죽겠는데 시팔.”

“으…….”

덜걱, 덜걱.

강승건이 서 있는 바닥이 갈라지고 들썩이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능력을….

“떨어져.”

절망적인 상황에 기운이 쭉 빠진 채 쓰러져 헐떡이는데, 상상조차 못 한 목소리가 등 너머로 들려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강승건이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당장.”

총신이 긴 권총을 든 곧게 뻗은 손과 강승건을 정확히 응시하는 고동색 눈동자가 보였다.

“한이결 곁에서 떨어지라고.”

흘러나온 차분한 목소리에선 평소와 달리 싸한 한기가 느껴졌다.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우진?”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내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지, 김우진은 강승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 시발….”

강승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쿠궁, 궁! 바닥이 더욱 거칠게 흔들리며 쩌적, 깊게 금이 갔다.

“별 같잖은 새끼들이 계속 방해하네.”

눈앞에 총이 있음에도 강승건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총을 다루는 전문인이 아닌 이상, 신체 능력이 월등히 높은 S급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김우진이 A급 분신술사라는 사실은 이미 온 세상에 퍼진 상황이라, 강승건이 그를 몰라봤을 리가 없었다.

강승건의 도발에도 김우진은 총을 내리지 않았다. 지하실의 창백한 불빛 아래로 보이는 김우진의 얼굴은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오히려 기세가 밀린 것은 강승건이었다.

이마를 가리는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냉랭한 눈빛에 주춤 물러선 강승건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갈라진 채 덜걱거리던 콘크리트 파편이 공중에 떠올랐다. 김우진을 향해 날카로운 단면을 내보이고 있는 파편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김, 우진…!”

물러서지 않는 김우진의 모습에 초조함이 일었다. 다치기 전에 빨리 도망가. 재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차라리 내가 더 버텨 볼 테니까.

“이봐, A급.”

“…….”

“지금이라도 꽁지 빠지게 달아나면 보내 주도록 하지. 내가 이래 봬도 허접한 새끼들한테는 아주 관대하거든.”

“해 봐.”

담담하게 나온 대답에 강승건이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뭐?”

“해 보라고.”

“무슨―”

그 순간, 총성과 동시에 강승건이 급히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강승건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벽에 박혔다. 먼저 총을 쏜 김우진의 행동에 강승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이 새끼가!”

“김우진!”

강승건의 뒤로 떠 있던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 세 개가 순식간에 김우진에게로 날아갔다. 심장이 크게 뛰며 김우진이 크게 다치는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안 돼, 막아야―

“어?”

파편이 김우진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기를 기대하며 지켜보던 강승건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날아오는 파편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생긴 김우진 두 명이 양쪽으로 몸을 날렸다. 저렇게 빠른 속도로 분신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고? 순간 강승건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콰직! 김우진의 몸 대신 벽에 처박힌 콘크리트 파편에서 회색빛 연기가 흩어져 나오고, 그 사이로 총을 든 김우진이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성과 동시에 방심하고 있던 강승건의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박히며 피가 튀었다.

“크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강승건을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아 왔다. 흠칫 놀라며 돌아보니 또 다른 김우진이었다. 강승건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휘청이는 틈에,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김우진이 재빨리 강승건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김, 우진. 이거, 나 팔….”

내 말을 알아듣고 김우진이 허리춤에서 작은 호신용 나이프를 꺼내 단번에 끈을 잘라 냈다. 그러자 지금껏 움직임이 없던 기운이 심장을 감싸고 일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꺾인 채로 묶여 있던 어깨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내며 팔을 휘둘렀다.

휘잉!

능력으로 김우진의 몸을 감싸자, 그가 나를 안은 채로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타앙! 총성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시발, 놓칠 것 같아?!”

두 번째 총탄은 피한 강승건이 도망치는 나를 향해 기다랗고 뾰족한 콘크리트 파편을 여러 개 날렸다. S급의 공격이라 A급 능력으로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람을 이용해 최대한 파편의 경로라도 비틀어 보려는데, 누군가가 앞으로 끼어들었다.

“……!”

왼쪽에서 강승건을 총으로 견제하고 있던 김우진이었다. 빠르게 날아오는 파편에도 피하지 않고 나를 막아선 김우진이 세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콰드득!

총성과 동시에 살점과 뼈가 뚫리고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고, 나 대신 파편을 맞은 김우진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었다.

“허, 억… 헉…!”

“한이결. 이결아.”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숨을 헐떡이는 내게 김우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진정해. 분신이야.”

그 말 그대로, 나 대신 파편을 맞은 김우진의 분신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런데도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린 감정이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끄아악, 시발!”

분신이 마지막으로 쏜 총에 왼쪽 허벅지가 관통당한 강승건이 비명과 욕설을 쏟아 냈다.

“가자.”

그 틈에 김우진이 나를 안고 급히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새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복도가 나타났다. 김우진은 계속 나아가는 게 아닌, 복도에 있는 여러 방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이대로 복도를 가로지르다가는 강승건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았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벽에 바싹 붙어 앉아 기다리기도 잠시, 강승건이 욕을 중얼거리며 다급하고 거친 발걸음으로 우리가 숨은 방 앞을 지나갔다.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앞에 앉아 있는 김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여전히 낯설 정도로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분신이 받은 고통 때문인지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우진, 너 괜찮아? 여긴 어떻게 온 거야?”

“…….”

“너 분신이랑 감각도 공유하잖아. 그렇게 막무가내로 막아서면… 김우진?”

재차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왜 이래.

“…야, 혹시 화났어?”

“…….”

이번에도 말이 없다. 진짜 화났나 봐.

나는 급히 변명을 쏟아 냈다.

“아니, 방심하다가 잡혀 와서 나도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도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얌전히….”

“미안해.”

뭐? 갑작스럽게 들려온 사과에 횡설수설 말을 쏟아 내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김우진의 눈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김우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쓸었다. 강하게 묶여 있던 터라 여기저기 쓸리고 멍들어 퉁퉁 부어오른 팔과, 거친 벽에 부딪히면서 상처가 난 왼쪽 얼굴, 아직도 피가 묻어 나오는 이마와 머리. 다친 곳을 차례로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김우진이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렸다.

“미안해, 미안해…. 더 빨리 오지 못해서…….”

“…….”

어색하게 느껴졌던 차갑고 냉정한 얼굴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내가 익히 알던 김우진이 들어찼다. 상처를 건드리면 혹여 아플까, 제대로 만져 보지도 못하며 김우진은 그저 뜨거운 숨을 뱉어 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배 속에 나비 여러 마리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울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럽게 우는 김우진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몇 번이고 입술만 달싹이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놀란 것처럼 흠칫 굳던 김우진도 곧이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맞닿은 몸을 더 바싹 붙여 왔다. 우느라 체온이 높아진 김우진은 꽤 따뜻했다. 이전보다 확연히 단단해진 녀석의 어깨에 지친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입가에는 절로 편한 미소가 지어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