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응? 뭐야?”
어른스러운 외모와 다르게 앳된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손님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런 무기 없이 혼자 서 있음에도, 여자에게서는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살피던 홍시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인형이잖아? 설마.”
G5 구역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인형술사의 새로운 인형인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홍시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때마침 홍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린 인형이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내 인형을 부순 여자잖아? 그렇지 않아도 죽이고 싶었는데. 잘됐네.”
“허어.”
자신감 넘치는 그 태도에 홍시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김우진을 불렀다.
“김우진.”
“예.”
“적당히 시선을 잡아 둘 테니까 틈을 봐서 문 너머로 들어가. 한이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인형은 S+급이니까 알아서 처신 잘하고.”
“어머.”
그 말을 들은 여자가 짐짓 놀란 목소리로 입가를 가렸다.
“그때도 그렇고… 정말 별걸 다 아네, 당신은.”
“칭찬 고맙군.”
“그럼 이 아이 이름도 알아?”
그 물음에 천사연이 짧은 순간, 아득히 먼 과거를 되짚는 눈을 했다.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유려하게 웃은 그가 곧 대답했다.
“카렌.”
인형, 카렌이 부름에 답하듯 반들반들한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진짜 알고 있잖아! 신기해.”
“…….”
“그쪽도 엄청나게 탐나. 그래도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갈 계획은 나 모르게 해야지. 그러면 내가 적당히 상대해 주기 힘들잖아?”
턱을 움직여 마치 사람처럼 달각거리며 말하던 카렌이 손을 들어 자신의 녹색 눈을 툭툭 두드리자, 새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손끝을 따라 눈알에서 뽑혀 나온 그 연기는 순식간에 단단한 물체로 변했다.
“뭐야…?!”
그 경악스러운 광경에 홍시아가 질색했고, 김우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천사연만이 지루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카렌의 눈에서 튀어나온 연기는 온통 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낫이 되었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대낫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쥔 그녀가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후웅!
그러자 붉은 가루가 생겨나며 공기 중에 흩날렸다. 천사연이 가까이 날아오는 가루를 태워 버렸다.
“인형의 힘은 아닌 것 같고. 저 무기 능력인가?”
홍시아가 입가를 가리며 채찍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쿠르릉! 흩어지는 냉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던 가루를 얼렸다.
“저 친구를 보내려고 하는 거지? 보조할게. 빨리 끝내자.”
홍시아가 눈짓으로 김우진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천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휘둘러지는 검에 새빨간 불꽃과 함께 뜨거운 피가 용암처럼 흩날렸다.
채앵!
카렌의 낫과 릴리스의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끼기긱, 힘에 밀린 카렌의 하이힐이 바닥을 쭉 긁었다. 동시에 홍시아가 다리를 노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천사연의 검을 쳐 내고 위로 뛰어올라 채찍을 피한 카렌이 낫을 크게 휘둘렀다.
쿠궁!
오싹한 감각에 홍시아가 급히 뒤로 몸을 빼자, 낫에서 뻗어 나온 충격파가 아슬아슬하게 옷을 찢고 지나가 바닥을 부쉈다.
“그러고 보니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군.”
“어우, 그런 건 진작 말해 줘야지!”
대충 보기에도 위력이 꽤 강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착지한 카렌이 춤을 추듯 살랑살랑 스텝을 밟았다. 또각, 또각. 콘크리트 바닥을 밟는 붉은 구두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방금처럼 다리만 계속 노려.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천사연이 다시 달려들었다. 홍시아를 위협했던 공격이 정면으로 날아드는 것을 확인한 천사연은 다리에 힘을 주고 높이 뛰어올랐다. 콰광! 세 갈래로 갈라져 날아온 강력한 충격파에 방금까지 그가 있던 바닥이 마치 짐승 발톱에 긁힌 것처럼 깊게 파였다.
후욱,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천사연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채앵, 챙! 강한 힘으로 몇 번이고 낫과 검이 부딪혔다. 불길이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짐승처럼 일렁였다.
카렌이 든 거대한 낫은 SS급 릴리스의 검을 막아 낼 정도로 꽤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크기가 큰 만큼 날렵한 공격은 어려웠다. 그 점을 알아챈 홍시아는 신중하게 눈치를 살폈다.
메인 공격을 맡은 천사연이 카렌에게 바싹 붙어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으니, 보조 공격을 맡은 홍시아는 그런 천사연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움직여야 했다. 자신까지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가는 오히려 상황만 복잡해질 수 있었다.
천사연이 자신의 복부를 노리고 들어오는 낫을 피한 그 순간, 홍시아의 채찍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갔다. 단숨에 카렌의 발목에 감긴 채찍을 홍시아가 어깨에 힘을 주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비틀, 짧은 순간 카렌이 몸의 중심을 놓쳤다.
“윽!”
횡으로 그어지는 천사연의 검에 목이 잘릴 뻔한 카렌이 급히 몸을 뒤로 뺐다.
“아, 정말 성가시네.”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린 그녀는 천사연의 질척한 불길이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 반절을 미련 없이 낫으로 잘라 냈다.
“이래서 불 능력자들은 상대하기 싫다니까.”
역시 카렌 말고 다른 인형을 꺼냈어야 했어. 어떻게 관리한 머리인데. 짧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카렌이 낫으로 바닥을 한번 내리쳤다.
쿠웅! 땅이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은색의 대낫이 빠른 속도로 새까만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던 손잡이 부분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날이 있는 부분에서는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해골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불쑥 튀어나왔다.
끼이이이익―!
검은 연기가 확 풍기며 바닥에서 울부짖는 형상의 기괴한 얼굴들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피부가 아릴 정도로 진하게 흘러나오는 혼돈 속성에 홍시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저거 설마 S급 사신의 낫이야? 저게 왜…….”
사신의 낫(Death's Scythe). 혹은 그림 리퍼(The Grim Reaper)라고도 불리는 아이템은 미국에 있는 S급 보스 게이트에서 발견된 무기였다. 여러 속성이 혼합된 대부분의 아이템과 달리, 혼돈 속성만을 강하게 띠고 있는 사신의 낫은 쉽사리 건드릴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가짜야.”
혼란스러워하는 홍시아에게 단호하게 대답한 천사연이 제 발목을 부여잡고 기어 올라오는 악령을 짓밟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카렌이 인형이 아닌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기절하거나 미쳤을 것이다. 그 정도로 느껴지는 혼돈 속성의 힘이 굉장했다. 어쩔 수 없이 긴장한 홍시아를 본 카렌이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놀아 보자고!”
카렌이 낫을 허공에 크게 휘두르자, 확 퍼지는 독기를 타고 악령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천사연과 홍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을 베어 내며 천사연이 피가 흐르는 손바닥에 다시 한번 더 릴리스의 검날을 갖다 댔다. 아릿한 고통과 동시에 왈칵, 피가 솟구쳤다.
손바닥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천사연은 문득 한이결을 떠올렸다.
‘…이상하군.’
그의 서포팅 없이 싸워 온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길 텐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아쉬움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정에 천사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부재를 아쉬워하게 될 줄이야.
상념을 몰아내듯 손바닥을 힘주어 쥔 천사연이 후드득 떨어지는 피를 검날에 쏟아부었다. 뜨거운 열기가 한층 강해지며 새빨간 불이 피를 타고 검날을 완전히 덮었다.
그 상태로 천사연이 땅을 박차고 카렌에게 달려들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검을 휘두르자 검은 연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카렌이 보였다. 끼아아아악! 끄아아악! 공격당한 악령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끼기기긱!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천사연의 검을 카렌이 여유 있게 막아 냈다. 치직, 붉은 하이힐이 불꽃에 번들거리며 뒤로 살짝 밀렸다.
“멍청하긴! 이딴 공격으로는….”
천사연을 비웃던 카렌이 말을 멈추었다. 코앞에서 마주한 천사연이 불길 사이에서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열기가, 지나치게 가깝고 뜨거웠다.
“……!”
그제야 카렌은 천사연이 지금까지 일부러 능력을 억눌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낫이 쩌적, 금이 가고, 한쪽 얼굴에 불이 옮겨붙었다.
천사연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로 카렌을 밀어붙이는 것을 알아챈 김우진이 재빨리 움직였다. 카렌은 김우진이 제 옆을 지나 지하로 연결된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아챘지만 막을 수 없었다. 힘을 조금이라도 빼면 천사연이 낫을 부수고 자신을 단번에 베어 낼 것이다.
뒤늦게 몸을 빼려던 카렌의 다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채찍이 감겼다. 움직임에 제한이 생긴 것을 깨달은 카렌의 얼굴이 처음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시발, 좆같은 년이 어디서!”
사납게 욕설을 뱉어 낸 카렌이 천사연은 무시하고 홍시아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고는 턱을 크게 벌렸다. 무언가를 알아챈 천사연이 카렌을 죽일 기회를 버리고 홍시아에게로 급히 움직였다.
캬아아아아!
얼굴 반쪽이 불에 타오르는 채로 카렌이 벌린 입에서 엄청난 양의 독 연기를 일직선으로 쏟아 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홍시아를 천사연이 끌어당겼지만, 오른팔이 그대로 독 연기에 파묻혔다.
“아악!”
어마어마한 고통에 홍시아가 비명을 내지르며 채찍을 놓쳤다. 팔이 마치 심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잔뜩 일그러지고 피부가 보랏빛으로 부어올랐다.
“으, 흐으…!”
홍시아의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졌다. 독기가 몸 안에 퍼져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목숨이 위험할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전투를 이어 가기에는 무리였다.
“뒤로 빠져.”
어차피 김우진을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으니, 홍시아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 말에 홍시아가 입술을 강하게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사이, 불에 타오르는 얼굴 반쪽을 망설임 없이 뜯어낸 카렌이 피를 쏟아 내며 히죽 미소 지었다. 그 괴기스러운 형상에 홍시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 불쌍한 카렌.”
아까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속삭인 카렌이 몸을 삐거덕 움직였다. 쿠웅, 낫 손잡이로 바닥을 내리치자 천사연의 불에 모조리 집어삼켜졌던 악령이 새로 솟아났다.
“카렌을 망가뜨린 대가를 치르게 해 줄게!”
반원으로 크게 휘둘러진 낫으로 인해 바닥이 갈라지고 파편이 튀어 올랐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천사연의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