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답답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나는 뻐근한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거친 콘크리트 바닥이 보였다.
그제야 강승건 마스터가 꺼내 든 주사기를 맞고 기절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뭐야….”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온몸에 뻐근한 고통이 밀려왔다. 양팔이 뒤로 묶여 있는 상태라 심하게 저리고 불편했다. 힘을 줘도 단단히도 묶어 놨는지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기운을 끌어 올려 봤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이 차오르지 않았다. 두 팔을 결박하고 있는 끈 자체가 착용자의 기운을 막아 내는 셔터(Shutter) 아이템 같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야 납치해 놓고 능력을 쓰게 둘 거라고 생각 안 하긴 했는데….
‘계획된 건 확실하네.’
셔터 아이템까지 준비하다니. 다행히 다리는 묶여 있지 않았지만, 이 상태로는 도망치기 힘들었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히스테릭한 모습의 강승건을 떠올렸다. 그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건 C13 구역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였다. 파티에서도 스치듯 봤지만,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으니 마주했다고 보긴 뭐했다.
어딜 봐도 제정신이 아닌 새끼였는데, 너무 방심했다. 설마 길드 마스터라는 놈이 그렇게 대놓고 사람을 납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후으…….”
상체에 힘을 줘서 억지로 일으켰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는지, 몸을 움직이자 목에서 뻐근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울렁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고르는데, 철컹거리는 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을 밟고 누군가가 내려왔다.
“깨어났군.”
짙게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 밑과 메마른 입술을 한 강승건 마스터였다. 그는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새하얀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랐었나?’
C13 구역에서 처음 봤을 때는 좀 더 둥근 체형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래 봬도 굉장히 신사적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나?”
강승건이 몸을 좀비처럼 건들거리며 말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후, 침착하게 물었다.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전 강승건 마스터를 이번에 두 번째로 보는 건데요.”
“두 번째로 본다고?”
강승건이 비웃음을 달며 날 응시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았다.
“구라 치지 마. 너, 그때 나 봤잖아? 그 좆같은 파티에서.”
“…….”
“시발… 생각해 보면 그 계획도 이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독기 찬 음성으로 쏘아붙이던 강승건이 갑자기 머리를 푹 숙이더니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감각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변을 감싼 서늘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강승건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묶인 채로 그와 단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저기요, 강승건 마, 윽…!”
쿠웅!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던 강승건이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묶인 상태로 속절없이 옆으로 쓰러진 나는 곧이어 뒷머리에서 느껴지는 강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너도 내가 우스워? 씹새끼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하나같이…….”
“아, 으윽!”
강승건이 손에 힘을 주자 두피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심해졌다. 예측할 수 없는 폭력적인 행동에 침착하게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날 억누르고 있는 강승건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내쉬는 내게 강승건이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새끼들은 뻔하지. 천사연이 좀 잘해 주니까 뭣도 모르고 설치는 꼴은, 시발.”
“허억, 큭….”
“천사연, 그 더러운 고아 새끼한테 눈먼 병신 같은 놈들.”
더러운 고아 새끼.
그 말에 고통에 자꾸만 감기는 눈을 힘주고 떴다. 눈물이 맺혀 뿌연 시야에 흥분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승건이 보였다.
-더러운 고아 새끼 주제에!
처음 만났을 때도 천사연을 향해 저런 말을 했었지. 더러운 고아는 무슨. 강승건을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미안, 한데… 내 성격은 원래 이 지랄이거든.”
“뭐?”
“내가 보기엔 그쪽처럼 열등감에 미친놈보단 고아인 천사연이 훨씬 낫―”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휙 돌아가며 강한 충격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쾅! 뻐근한 감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강승건이 벽에 내 머리를 한 번 더 처박았다. 삐이이이― 이명이 귓가를 가득 채우고 뜨겁고 질척이는 게 얼굴 위로 쏟아졌다.
“시발 새끼가…….”
“허억…….”
축 늘어진 몸이 덜덜 떨리고,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승건이 고함을 내지르며 내 멱살을 붙잡고 흔들 때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감각이 뒤따랐다. 필름 끊기듯 자꾸만 끊기는 의식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웨이브 진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새빨간 구두를 신고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딘가 뻣뻣한 움직임으로 팔짱을 낀 그녀는 커다란 키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음성으로 말했다.
“감정 지배 부작용이 벌써 나타났잖아? 돼지 새끼를 붙여 줄 때부터 짐작해야 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이 사고를 치네.”
강승건의 움직임이 갑자기 뚝 멈췄다. 분노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여자가 등장하자 게게 풀리기 시작했다.
“으… 으어. 그으게, 아니라….”
“……?”
강승건은 말까지 더듬으며 허겁지겁 내게서 떨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그 모습이 굉장히 기묘했다.
그런 강승건을 향해 여자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명령했다.
“뭘 보고 서 있어? 안 꺼져? 지하실 입구나 지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엉거주춤 서 있던 강승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끼이익, 철컹! 철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를 바라봤다.
‘저 여자, 뭔가…….’
그저 보기만 할 뿐인데도 이질적인 거부감이 몰려왔다.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또각. 또각.
여자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 내게 여자가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순간 호흡을 멈추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깜빡이지 않는 눈. 지나치게 매끈한 피부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외형.
“인형….”
“안녕? 또 보네.”
내 속삭임을 들은 인형이 흥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입꼬리 끝이 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입을 벌리지만 미묘한 삐걱거림은 숨길 수 없었다.
“더 빨리 보러 왔어야 했는데. 카렌에게 뭘 입혀 줄까 고민하느라 늦장을 좀 부렸더니, 저 냄새 나는 돼지 새끼가 일을 벌였네. 미안하게 됐어.”
“무슨…….”
“그래도 뭐, 심하게 다치진 않았잖아? 이 정도면 죽지도 않을 거고… 너무 화내지 마. 계속 피가 나면 내가 나중에 꿰매 줄게.”
인형의 눈이 새하얀 전등 빛에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오싹한 공포감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식은땀으로 젖은 등이 차갑게 식으며 소름이 돋았다.
“겁먹은 거야? 귀여워라! 볼수록 마음에 드네. 사마엘도 아주 좋아하겠어. 아껴 놨던 카렌을 쓰게 된 건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
사마엘? 카렌? 인형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흐흥, 코웃음을 흘린 인형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럼 이따 봐~”
발랄하게 인사를 날린 인형이 들어올 때처럼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겨우 홀로 남게 된 나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을 축 늘어뜨렸다.
‘지친다…….’
아주 오랜만에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피로감을 동시에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마스터.”
차에서 천사연과 김우진이 내리자, 먼저 와서 대기 중이던 우서혁이 급히 다가왔다. 홍시아와 차수연도 함께였다.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본 천사연은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블런 길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내부가 텅 빈 건물 앞이었다. 천사연은 이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여기에 한이결 능력자가 있다는 게 진짜야?”
홍시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건물을 올려다봤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 사람을 납치해 뒀다는 게 영 믿기 힘들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사람을 납치했으면 어디 강원도 산골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
“강승건이 언제는 상식적인 놈이던가?”
어이없어하는 홍시아의 말에 무심히 대답한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붉은 재킷과 SS급 릴리스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홍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SS급 무기를 꺼낼 필요가 있어? 어차피 그래 봤자….”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천사연이 슬슬 홍시아를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천사연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고개를 들기 전에, 우서혁이 눈치 빠르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강승건 마스터의 능력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가 무분별하게 능력을 사용해서 주변 건물이나 땅이 무너져 내리면 피해가 심각할 겁니다.”
“으음. 그러네.”
그 말에 고민하듯 입가를 툭툭 두드리던 홍시아가 차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아, 혹시 모르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려. 혹시 땅이 흔들리거나 건물이 무너지려 하면 관리 본부에 연락하고 민간인 대피를 도와.”
“…알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차수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연과 홍시아가 있으니, 굳이 자신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 저도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그래. 만약을 대비해서 힐러를 대기시켜 두는 게 낫겠군. 민아린 힐러에게 연락해.”
“알겠습니다.”
그 명령을 끝으로 천사연은 망설임 없이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김우진이 급히 쫓았다.
“그럼 나도 다녀올게. 혹시 모르니까 둘 다 조심하고.”
“예.”
“알겠어요.”
민아린에게 전화를 거는 우서혁과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의 차수연을 한 번씩 쳐다보고 홍시아도 천사연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건물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창문이 얼마 없어 조금 어두운 내부를 살피며 걷던 홍시아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구두 굽 소리에 채찍을 힘주어 쥐었다.
또각. 또각.
끼이익.
벽과 마찬가지로 온통 새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문을 열고 등장한 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붉은 구두를 신은 장신의 여자였다. 그 등장에 맞춰, 천사연이 자신의 손바닥을 평소보다 더 깊이 베어 냈다.
후두둑.
콘크리트 바닥 위로 핏방울이 흩어지며 새빨간 불꽃이 일렁거렸다. 늘씬한 검날에 묻은 피가 불을 품고 용암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