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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9)화 (89/394)

89화

23.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

“오래 기다렸… 응?”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차수연은 한이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텅 비어 있자, 어리둥절한 마음에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한이결?”

혹시나 해서 이름도 불러 봤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그새 어디를 간 거야?”

혹시 마스터가 불렀나 싶어서 홍시아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 곁에는 김나율과 우서혁만 보일 뿐이었다. 진짜 뭐지?

“설마… 도망간 건 아니지?”

묘한 불안함이 느껴졌다. 장난처럼 중얼거렸지만, 한이결이 말도 없이 도망갈 사람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차수연은 바로 핸드폰을 들고 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저장해 둔 한이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르- 툭.

잘 연결되던 신호음이 갑자기 끊겼다. 미간을 찌푸린 차수연이 바로 다시 통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핸드폰이 꺼진 건가?’

세 번째 연결도 실패하자 차수연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진짜.”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홍시아와 대화를 끝낸 우서혁이 다가왔다. 한이결이 있던 장소에 차수연만 서 있자, 그가 주위를 살피며 차수연에게 물었다.

“한이결 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음, 그게요….”

차수연이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우서혁의 검은 눈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우서혁과 차수연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옆을 지나가던 홍시아가 끼어들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마스터.”

머뭇거리던 차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한이결이 안 보여서요.”

“한이결 능력자?”

“네.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잠깐 통화하고 온 사이에… 저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거든요.”

“으음?”

홍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차수연이 한이결 능력자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데다 같이 식사 약속까지 했다는 게 꽤 놀라웠지만, 일단 그건 둘째 치고.

“한이결 능력자 성격에 약속해 놓고 말도 없이 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맞아요.”

“홍시아 마스터.”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우서혁이 한층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누가 왔었는지 확인 가능합니까?”

“흠. 잠깐만 기다려 봐요.”

우서혁의 요청에 잠시 고민하던 홍시아가 누군가를 불러왔다. G5 구역 입구를 관리하던 직원이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달려온 직원에게 홍시아가 물었다.

“방문자 목록 기록 중인 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클리어팀 외에 온 사람 있어?”

“아, 조금 전 블런 길드의 강승건 마스터가 왔었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름에 차수연과 우서혁은 물론이고 홍시아까지 얼굴이 굳었다.

“강승건 마스터가?”

“예. 방문자 목록에 사인도 하셨습니다.”

“나가는 건?”

“예?”

“나가는 것도 확인했나?”

확연히 달라진 홍시아의 목소리에 바싹 긴장한 직원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나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알겠어. 가 봐.”

직원이 안도한 표정으로 후다닥 도망갔다. 평소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홍시아가 김나율을 불렀다.

“부마스터! 이전에 내가 선물로 준 전투 장갑 있지? 잠깐 빌려줄래?”

“네?”

힐러팀과 얘기 중이던 김나율이 홍시아의 요청에 급히 다가와 인벤토리 목걸이에서 전투 장갑을 꺼내 내밀었다.

“갑자기 이건 왜요?”

“쓰려고. 수연아, 한이결 능력자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디야?”

“으음, 대충… 이쯤이요.”

차수연이 바닥을 짚자 홍시아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새까만 가죽 장갑을 꼈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내뱉은 홍시아가 강하게 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쿠웅!

단단한 땅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그 아래로 성인 서넛은 들어갈 만큼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명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이건…….”

“예상대로네.”

홍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적인 땅이었으면 굳이 증폭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같은 S급인 강승건이 막아 둔 땅이라면 기본적인 완력으로는 부족했다. 혹시 몰라서 증폭 아이템을 착용해 본 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강승건 마스터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야. 땅속에 통로를 만들어 내서 이동하는 거. 들어올 때야 한이결을 찾아야 하니 입구를 거쳤지만, 달아날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홍시아의 설명에 차수연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강승건 마스터가 한이결을 납치했다는 말씀이세요?”

“지금 이 상황으로 보자면 그런 것 같네.”

“그런… 강승건 마스터가 대체 무슨 이유로 한이결을 납치해요?”

“나도 궁금하긴 한데, 일단 수습부터 하자. 우서혁 비서.”

홍시아가 장갑을 벗어 김나율에게 건네며 말했다.

“바로 천사연 마스터에게 연락할 거지?”

“예.”

“내가 관리하는 곳에서 이딴 거지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나도 최대한 도울게. 혹시 뭔가 알게 된다면 연락해 줘. 우리 쪽도 그렇게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껏 아무런 표정도 없었던 우서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급히 등을 돌렸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수연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상대방이 받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차수연이 입을 열었다.

“큰일 났어요, 태헌 씨.”

***

김우진은 앞에 놓인 서류를 잠시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상대에게 물었다.

“재계약… 이요?”

“그래.”

천사연이 가벼운 미소를 단 채로 대답했다.

김우진이 혼자서 대표실을 찾은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대표실을 올 때마다 천사연이 쓸모없는 자신을 내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김우진은 천사연이 아닌, 한이결에게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능력 숙련도도 어느 정도 쌓았고, 언제까지 무늬만 수행원인 채로 놔둘 수는 없으니.”

“…….”

“일단 읽어 보고, 협의할 부분은 천천히 얘기를 나눠 보지.”

그 말에 김우진이 서류를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렸다. 물리지원팀. 물리계 능력자들로 이뤄진 부서 중 하나로, 주로 타 길드로 파견 임무가 주어지는 곳이었다.

“능력의 활용성을 생각하면 지원팀이 아니라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기는 한데, 그럼 그만큼 바빠질 거다. 그래도 괜찮다면 다른 팀을 고려해 보고.”

“아닙니다.”

천사연의 말대로, 지원팀은 일이 꽤 적은 편에 속했다. 이걸 배려라고 봐도 되는 걸까. 슬쩍 천사연의 눈치를 살피며 김우진은 대답했다.

“이곳이 좋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김우진은 씁쓸한 마음으로 한이결을 떠올렸다. 어차피 등급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전처럼 그의 곁에만 붙어 있기 힘들다는 건 예상했다.

한이결에게 오늘 일을 말해 주면 분명 축하해 주겠지만… 솔직히 자신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한이결을 두고 게이트를 들어가면 최소 3일은 만나지 못할 텐데. 서로 타이밍이 안 맞으면 길게는 일주일 이상 못 볼 수 있다.

‘그래도…….’

한이결은 돈을 좋아하니까. 열심히 벌어서 둘이 살 만한 집을 구해 낸다면,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 레퀴엠 길드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마음을 굳힌 김우진이 서류에 사인을 막 끝낸 참이었다. 천사연이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마스터.]

“말해.”

A급이 되면서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좋아진 김우진은 전화 내용을 무리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자리를 비워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천사연에게 전화를 건 우서혁이 급히 본론을 꺼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지?”

[…한이결 씨가.]

서류를 보고 있던 김우진의 고개가 휙 들렸다. 천사연도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예. 홍시아 마스터 말로는 강승건 마스터가 납치한 것 같다고 합니다. 강승건 마스터가 능력을 사용해서 구역을 빠져나간 증거가 발견됐습니다.]

납치? 한이결이 납치를 당했다고?

충격적인 내용에 김우진이 얼굴을 굳힌 채로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진 천사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홍시아 마스터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 확신이 있다는 거겠지. 위치 파악은?”

[…죄송합니다.]

천사연은 잠시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곧이어 그가 우서혁에게 명령했다.

“5분 내로 좌표 하나 보내지. 그쪽으로 바로 이동해.”

[예.]

통화를 끝낸 천사연은 곧바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칵. 통화가 연결되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요, N89.]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천사연이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템 위치 서치 좀 부탁하지.”

[코드를 불러 주십시오.]

“C-29835. A급이고 팔찌 형태다.”

[해당 코드로 아이템 하나가 서치됐습니다.]

이어 여성이 좌표를 불렀다. 대답 없이 통화를 끊은 천사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이결에게 간다는 것을 눈치챈 김우진이 황급히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마스터.”

“…….”

무언가를 가늠하듯 천사연이 김우진을 바라봤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 시선에 김우진은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가 아는 천사연은, 기본적으로는 매너 있고 일견 다정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처음 천사연의 제안을 받고 길드로 들어온 후로 지금까지, 김우진은 그가 편했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뭐, 나쁘지 않겠군. 능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고.”

“…….”

지금도. 한이결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시종일관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자신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예.”

간신히 쥐어짜듯 대답한 김우진은 천사연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이결.’

걱정과 불안으로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김우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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