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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8)화 (88/394)

88화

[취향 한번 지독하네.]

파지지직-

그 말을 끝으로, 얼마 가지 않아 화질이 흐려지며 영상이 뚝 끊겼다. 턱을 괸 채로 영상을 바라보던 남자가 얼굴에 쓴 가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볼수록 쓸 만해 보이는데…….”

공간 이동 구슬 아이템을 사용해 파티 참석자들을 한꺼번에 굴업도 게이트 내부로 이동시켰던 첫 번째 계획.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A급 능력자.

좀 더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제이나 길드 게이트로 인형을 보내 봤고,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바람을 이용해 같은 팀을 완벽하게 보조하는 능력이라. 남자와 생각이 통했는지, 책상 위에 앉아 있던 인형이 턱관절을 움직이며 말했다.

“갖고 싶다. 탐나.”

“탐나?”

“데려오자. 재밌을 것 같아.”

“흠….”

“도와줄게! 내 아이들도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게 하고 싶어. 너무 예쁠 것 같아.”

프릴이 달린 보닛을 쓴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예쁘장한 인형이 재잘거렸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그 말을 듣던 남자가 의자를 빙글 돌려 뒤를 돌아봤다.

“어때요, 강승건 마스터. 당신은 이 능력자를 압니까?”

“으, 어…?”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강승건이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강승건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모릅, 니다… 그런 능력자는…….”

“저런. 진짜 아는 게 없네요, 강승건 마스터는.”

실망스럽다는 어투에 강승건이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급히 다시 얼굴을 내린 강승건이 바닥에 이마를 강하게 찧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쿵! 쿵!

남자는 그런 강승건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마치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강승건이 머리 찧는 소리를 허밍으로 따라 하며 지켜보던 남자가 강승건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하긴. 당신이 무능하고 싶어서 무능하겠습니까?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쩔 수 없죠.”

“감, 감사합니다.”

“레퀴엠에 천사연 마스터라고 했던가…. 보아하니 그는 저 바람 능력자와 친한 것 같은데. 강승건 마스터는 참, 인재 보는 능력도 없고.”

“…….”

남자의 말에 내내 멍하던 강승건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깊이 뿌리내린 열등감은 아무리 뇌를 주무른다고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보며 남자는 가면 너머로 옅은 웃음을 흘렸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강승건 마스터. 천사연 마스터에게서 뺏으면 되지 않습니까?”

“으… 빼, 뺏…….”

“네. 어려울 것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천사연에게서 바람 능력자를 뺏는다…?

……그래, 안 될 게 뭐가 있어? 남자의 말이 옳다. 강승건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네!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만나서…….”

“그래요. 만나 보세요. 다른 허튼짓은 하지 마시고, 제가 올 때까지 잘 붙잡아 두는 겁니다. 이런저런 대화 좀 하면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강승건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 능력자를 잡아 오려는 것처럼 안달이 나서 몸을 들썩였다.

“아벨.”

“으응?”

책상 아래로 삐져나온 다리를 흔들거리며 남자와 강승건을 구경하던 인형의 고개가 삐거덕 기울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남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카렌을 써 보는 건 어때?”

“카렌을? 너무 아까운데.”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 남자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갖고 싶다며. 그 정도는 투자해야지.”

“흐응.”

“내가 직접 움직이면 편했겠지만…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내가 올 동안 제대로 붙잡아 두려면 카렌 정도는 써야지.”

달각. 달각.

고민하듯 턱을 움직이던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좋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강승건에게 말했다.

“가 보세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승건 마스터.”

“예, 예!”

강승건이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뗀 남자는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벽 한 면을 꽉 채운 화면에서 아까와는 다른 영상이 재생되었다.

[꼴, 좋다… 이 새끼, 야.]

으흠, 흠. 허밍을 부드럽게 흘리며 남자가 의자에 등을 길게 기댔다. 곧 만나게 될 새로운 장난감이 너무나도 기대됐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형의 등장 이후, 홍시아는 휴식 시간을 크게 줄이고 게이트 클리어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가 더 지난 사흘째 되는 새벽, 모든 좀비 몬스터를 소탕하고 게이트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고생들 했어.”

게이트 밖으로 나온 홍시아는 제일 먼저 쉴 틈 없이 싸우느라 지친 팀원들에게 한마디 건넸다. 선두에서 제일 많이 움직이고 전투를 치른 홍시아는 피부가 살짝 거칠어진 것 빼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마스터.”

제이나 길드 부마스터, 김나율이 저편에서 곧바로 달려왔다. 게이트 주변은 이미 통제했는지, 몇몇 경호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김나율이 내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홍시아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홍시아가 김나율이 건네주는 붉은 뱀 가죽 클러치 백을 받아 들었다.

“길드 본부로 곧장 가 봐야 할 것 같아.”

들고 있던 채찍을 클러치 백에 집어넣으며 홍시아가 말했다. 뭔가 했더니, 저게 인벤토리인가 보군.

“길드 본부요?”

“게이트 내부에서 일이 좀 있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하는 김나율에게 다시 클러치 백을 돌려준 홍시아가 우서혁을 바라봤다.

“우서혁 비서님. 이번 사건, 천사연 마스터에게 보고해야 하지?”

“예.”

“으음.”

단호하게 나온 대답에 홍시아가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시간 고민하던 홍시아는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어차피 관리 본부에도 알려야 하니, 그게 그거긴 한데. 일단 보고하기 전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우리 김나율 부마스터도 같이.”

“알겠습니다.”

제이나 길드 소속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이라, 타 길드인 우서혁과의 입장이 애매해지기는 했다. 분명 우서혁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보고하려고 할 텐데. 그걸 천사연도 원할 테고.

홍시아와 김나율, 우서혁이 함께 듣는 이가 없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대화를 시작했다. 모쪼록 별문제 없이 잘 합의되어야 할 텐데.

“한이결.”

우서혁이 자리를 비우자, 차수연이 내게 곧장 다가왔다. 슬쩍 주위를 살핀 차수연이 소리 죽여 물었다.

“너 이제 뭐 할 거야?”

“예?”

뭘 하다니?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쉬러 가겠죠? 여기서 더 할 것도 없는데.”

“그래?”

“네. 왜요?”

차수연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머뭇거렸다. 딱 봐도 용건이 있는 표정에 이유를 묻자,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너 별로 피곤하지 않으면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까 해서. 게이트 도느라 삼 일 넘게 제대로 못 먹었잖아.”

“밥 먹자고요?”

“싫으면 말고…….”

좀 피곤하긴 했지만, 식사를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를 뭐 이렇게 눈치를 보며 하는 거지?

“좋습니다. 뭐 먹고 싶으신 거 있어요?”

내가 순순히 승낙하자 차수연이 활짝 웃으며 고양이 같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피자! 스파게티랑 같이! 치즈 엄청 들어간 거로!”

“양식 좋아하세요?”

“평소에는 관리하느라 잘 안 먹는데… 꼭 게이트만 갔다 오면 당기더라고.”

음. 몸이 고생하면 먹고 싶어지는 음식이 있긴 하지.

“내가 잘 아는 가게가 있어. 내부가 좀 작기는 해도, 꽤 유명한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라 맛 하나는 괜찮거든.”

“전 상관없습니다.”

“알겠어. 그럼 바로… 아, 잠깐만.”

대화하던 차수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르르 진동하는 것을 보아하니 전화가 온 듯했다.

“여보세요? 응.”

차수연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내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고 통화하고 오라고 손을 휘휘 저어 주자 등을 돌려 저편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혼자 남게 된 나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차수연을 기다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정이 생겼지만, 어차피 레퀴엠 길드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근데 이러면 우서혁 씨에게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차수연이랑 밥을 먹으러 간다 그러면 분명 이상한 오해를 할 텐데. 그렇다고 말도 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입가를 만지며 어떻게 해야 오해 없이 차수연과 밥을 먹으러 간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봐.”

“……?”

고개를 돌려보니 언젠가 본 듯한 생김새의 남자가 창백하게 질린 채 날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 부른 거 맞나?

“한이결 능력자, 맞나?”

“누구십니까?”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올 텐데. 의아해서 묻자, 남자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나를 몰라?”

“…아.”

저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보니 기억났다.

“강승건 마스터?”

내가 아는 체하자 강승건이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입을 비틀어 웃었다. 짙은 다크서클에 창백한 얼굴.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홍시아 마스터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홍시아…?”

“예. 홍시아 마스터는 저 안쪽에 계십니다.”

혹시나 해서 묻자, 강승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킬킬거렸다. 왜 이러지?

“괜찮으십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어째 꺼림칙해서 강승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며 고개를 숙인 채로 무어라 중얼거리던 강승건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쿨럭, 그래. 홍시아 마스터 만나러 온 거 맞아. 길드 관련해서 급한 일이 생겼는데… 내가 보다시피 몸이 안 좋아서 부축을 좀 해 줬으면 좋겠군.”

“…….”

부축해 달라고?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찝찝했다.

차분하게 강승건의 모습을 살폈다.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 퀭한 얼굴, 계속 흘리는 식은땀, 불안한 시선 처리.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때 호텔 파티에서도 강승건을 봤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마저도 수상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대신 경호원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쪽이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부축 정도는 바로 할 수 있잖아.”

“무슨…!”

강승건이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들며 팔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에 고통이 밀려왔다.

“놓으시죠.”

역시 느낌이 좋지 않다. 이를 악물며 벗어나려고 힘을 줬지만, 강승건은 손을 놓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쥐었다. 강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시발, 눈치 빠른 새끼. 뭐? 경호원을 불러? 좆같은 새끼가…….”

“강승건 마스터, 크윽! 이거 놓….”

“닥쳐!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누굴 우습게 보고…….”

말이 안 통한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 건지, 금세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던 강승건이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꺼내 든 것은 알 수 없는 액체가 든 주사기였다.

“강승… 읏!”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그 움직임을 금방 눈치챈 강승건이 주사기를 거침없이 내 목에 꽂아 넣었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가, 뻐근한 감각이 목에서부터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허억…….”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내 몸을 강승건이 받아 냈다. 잇새로 욕을 내뱉자마자 눈앞이 훅 꺼지며 정신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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