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7)화 (87/394)

87화

“차수연 씨.” 

당황하는 차수연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앞은 제가 막아 볼게요. 뒤쪽 좀비들을 처리해 주세요.”

좀비 몬스터 상대는 나보다는 차수연이 효율적이다. 내 말에 차수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 분들하고 길을 뚫어 주시면 뒤따라갈게요. 마트 밖으로 나가서 구조 지원 폭죽도 사용해야 하니까.”

“알겠어.”

차수연이 능력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서자 강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옅어지며 다시 바늘이 날아들었다. 기운을 더 강하게 사용해서 바람으로 장막을 세웠지만, 바늘은 능력을 뚫고 날아왔다.

“큭…!”

손등에 화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커다란 바늘이 스치고 지나가자, 손등에 자상이 생기고 피가 흘러내렸다.

‘공격이 능력을 뚫고 날아온다. S급인가?’

대체 어떤 상대인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소설에서 이런 능력을 쓰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런 몬스터가 나올 게이트도 아니고.

‘왜 갑자기 저런 존재가 나타난 거지? 제이나 길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 아니면….’

눈을 노리고 날아드는 바늘에 급히 목을 꺾었다. 볼을 길게 찢고 지나간 바늘이 쨍강,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쓰라린 감각과 함께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이결!”

마트 입구 밖까지 좀비들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차수연이 나를 불렀다. 동시에 바늘 세 개가 목과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로 몸을 뒤로 날렸다. 마트 밖으로 빠져나오자 시체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괜찮아?”

“예.”

손바닥 중앙에 박혀 있는 바늘을 힘주어 빼냈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피가 울컥 솟구쳤다.

“구조 지원은요?”

“했어. 조금만 버티면…!”

“선배님!”

달려드는 좀비의 목을 베어 내던 팀원 한 명이 방금 내가 빠져나온 마트 입구를 가리켰다.

새까만 연기를 뚫고 기다란 장신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금발을 양 갈래로 묶고,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핑크빛 드레스 차림새의 여자가 양손 가득 바늘을 든 채로 우리를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과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피부. 차수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뭐야, 저거… 설마 인형이야?”

“아하하하!”

인형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끼긱. 목을 옆으로 꺾은 인형이 붉은 매니큐어가 발린 손을 들어 올렸다.

“아악!”

바늘을 날릴 줄 알고 긴장하고 있던 팀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인형 쪽으로 쭉 끌려갔다. 비명을 지르는 팀원의 팔에 감긴 얇은 줄을 발견한 나는 재빨리 바람을 칼날처럼 만들어 날렸다.

피잉!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이 끊어지면서 팀원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우리 주변에 가득 찬 은빛의 가느다란 줄을 발견했다. 마치 거미줄 같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낸 차수연이 강한 불을 피워 올려 줄을 태웠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아마 S급인 것 같습니다. 날아오는 바늘이 제 능력을 뚫었어요.”

“S급이라고? 하지만 인형이잖아. 설마 몬스터인 건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차수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S급 몬스터가 풍기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인형이었다.

“아하하하!”

웃음소리가 넓게 퍼지며, 인형이 양손을 들어 올려 휘둘렀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솟으며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차수연을 밀쳐 냈다.

“윽!”

차수연을 노리고 좁혀 들었던 줄이 그 대신 내 몸을 강하게 휘감았다. 허리와 두 팔이 붙잡힌 상태로 거칠게 바닥을 구르며 인형에게로 끌려갔다.

“한이결!”

오른쪽 어깨가 바닥에 쓸리며 흙먼지가 짙게 일었다. 끌려오는 나를 향해 인형이 손가락 사이마다 끼우고 있는 다섯 개의 바늘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늘이 빛을 받아 번뜩이는 그 순간,

“꺄아아악!”

짐승 울음소리와 함께 인형이 퍽 소리를 내며 밀쳐졌다. 다가올 고통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온 이를 바라봤다.

“우서혁 씨.”

크르릉.

내 부름에 거대한 늑대, 우서혁이 낮게 울며 몸을 숙였다. 끊어진 줄을 털어 내고 우서혁의 등에 올라탔다.

“한이결 능력자!”

구조 지원을 보고 온 홍시아와 길드원들이 차례로 도착했다. 홍시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인형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차수연에게 물었다.

“뭐야, 저건?”

“모르겠어요. 갑자기 등장해서.”

“몬스터는 아닌데.”

인형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나는 우서혁의 등에서 내려오며 홍시아에게 말했다.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인 것 같습니다.”

“인형술사라… S급 인형을 부리는 거면 상당한 실력자겠어.”

콰르릉!

홍시아가 채찍으로 땅을 내리치자, 번개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갈라지고 그 틈새에서 싸한 냉기가 올라왔다.

“캬각! 캬하아아악!”

인형이 턱관절을 아래로 길게 내리며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벌린 입속은 바늘과 똑같이 생긴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박혀 있었다. 마트 내부에서 발견한, 물어뜯긴 채 죽어 있던 좀비 몬스터 시체. 역시 저 인형의 작품이었나.

“우서혁 비서님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뒤로 빠져.”

“홍시아 마스터. 저번처럼 뒤에서 돕겠습니다.”

크릉.

우서혁이 뒤로 물러서지 않는 내게 못마땅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꼬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다쳤는데, 괜찮겠어?”

“네.”

곧바로 대답하자 우서혁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완전체로 변신한 건 좋은데 말을 못 해서 그런가, 답답해 보이기는 하네.

“걱정 마세요. 능력만 쓰겠습니다.”

“그래. 우서혁 비서님.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눈앞에 인형부터 치우는 게 우선이야. 한이결 능력자가 도우면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잖아.”

홍시아의 말에 우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거대한 늑대라서 무서운데, 미간까지 찌푸리니까 더 험악했다.

“하하….”

어째 나중에 잔소리를 들어도 단단히 듣겠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능력을 끌어 올렸다. 우서혁과 홍시아의 몸이 바람에 감싸지는 동시에, 홍시아가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채앵!

날아오던 바늘 여러 개가 가죽 채찍에 막혀 아래로 떨어졌다. 바늘을 모조리 날린 인형이 입을 쩍 벌리고 이빨을 뽑아냈다. 한 번에 열 개를 뽑아내자 새빨간 피가 잇몸에서 울컥 쏟아졌다.

“무슨 인형이 피를 흘려?”

징그러운 광경에 홍시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우서혁이 쫓았다.

“아하하하하!”

인형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홍시아와 우서혁을 보고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양손을 교차했다. 피잉, 허공에 얼기설기 처져 있던 은빛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길을 가로막았다.

“귀찮게!”

빼곡하게 쳐져 있던 은빛 줄이 홍시아의 채찍질 한 번에 후두둑 끊어졌다. 그사이, 경로를 살짝 틀어 옆으로 달려간 우서혁이 인형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콰지직!

인형의 오른팔이 우서혁의 이빨에 무참히 씹히며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잔뜩 뭉개진 팔을 부여잡고 인형이 턱을 벌렸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마치 어린아이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인형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 비명에 모두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차수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

“아파! 아파! 아파아!”

달각! 달각!

인형이 턱을 과격하게 움직이며 아이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차수연과 몇몇 길드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마치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인형술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홍시아가 채찍을 휘둘러 인형의 두 발목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쿠웅! 팔에서 붉은 피를 줄줄 흘리는 인형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취향 한번 지독하네.”

곧바로 목을 노리고 날아든 채찍을 인형이 재빨리 피했다.

“쯧!”

빠른 몸놀림으로 홍시아와 거리를 벌린 인형이 쥐고 있던 바늘을 날렸다. 홍시아의 어깨에 바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늘이 계속 날아드는데도 홍시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홍시아의 몸놀림에 집중하며 바람의 세기를 좀 더 높였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홍시아의 모습에 인형이 주춤 물러선 순간, 그녀가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타이밍에 맞춰서, 속도가 빨라지도록 채찍도 바람으로 휘감았다. 먹이를 노리고 달려든 뱀처럼 채찍이 인형의 왼팔을 정확하게 집어삼켰다.

콰득!

냉기에 얼어붙은 팔이 마치 석고상처럼 새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두 팔을 잃게 된 인형이 끄윽,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아파! 아파! 죽여 버릴 거야! 죽일 거야!”

냉기가 풀린 왼팔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인형이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홍시아에게 음산한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홍시아가 전투하는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던 우서혁이 인형 뒤에서 달려들었다. 콰직! 우서혁의 이빨에 상체가 무참히 씹힌 인형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축 처졌다.

크릉.

우서혁이 진저리를 치며 인형을 바닥에 뱉어 냈다. 흙바닥 위를 구르는 인형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을 적셨다.

“휴우, 끝인가?”

인형과 술사 사이에 연결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홍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서혁이 커다란 앞발로 인형의 머리를 툭 치고 내게 걸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스터!”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뒤로 물러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길드원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우선 부상자는 힐러한테 치료부터 받고, 나머지는 전투 준비 미리 해 놔. 아무래도 클리어 속도를 높여야겠어.”

“네!”

홍시아의 명령을 들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을 바라봤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던 인형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된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괴상한 모양새에 불안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때, 손등에서 부드러운 털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아직도 늑대 상태인 우서혁의 황금빛 눈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왜요?”

무언가 용건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기울이자, 우서혁이 커다란 혀로 내 손바닥을 핥았다. 그제야 바늘에 꿰뚫렸던 손바닥이 떠올랐다.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구나.

끄으응.

그가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낑낑거렸다. 당장 힐러에게 치료를 받으라는 의지가 느껴져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이따가요. 지금은 홍시아 마스터가 치료받고 있고, 다른 길드원도 다쳐서…….”

“한이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우서혁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차수연이 다가와 팔을 잡아당겼다.

“부상자 주제에 여기서 뭐 해? 치료받으러 가자.”

“엇, 아니. 잠깐….”

옆에서 우서혁이 듣고 있는데도 거리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수연의 말투를 지적하기도 전에 힐러에게로 질질 끌려갔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중에 받아도…….”

“제일 만신창이인 주제에 무슨 소리야?”

만신창이라니….

그렇게 나는 홍시아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힐러에게 치료를 받았다. 팔짱을 낀 채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차수연의 뒤로 아직 늑대 모습인 우서혁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