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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6)화 (86/394)

86화

  

게이트로 들어온 지 이틀째. 나는 차라리 게이트를 들어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천사연의 행동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멱살을 붙잡고 따져 묻고 싶은 욕구가 엄청나게 샘솟았다. 분명 전자 기기가 작동하는 바깥이었으면 냅다 전화부터 걸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태헌의 SS급 코트를 알아챘는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협박을 했는지, 제이나 길드 게이트는 왜 얻어다 준 건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이런 상황은 영 성격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상처를 받고 아프더라도, 제대로 부딪혀서 대화하는 게 훨씬 나았다.

‘물론, 그 자식이 순순히 말해 줄 리 없겠지만.’

날 볼 때마다 뺀질뺀질한 웃음을 짓는 천사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멱살을 붙잡고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따져 물으면 그 자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저번에 멱살 한번 잡았던 것 같은데. 그때 천사연이 뭐라고 했었지?’

이마를 짚으며 지난 기억을 되짚어 봤다. 분명 그때는…….

-흠. 이 자세는 뭐지? 키스라도 해 주려고?

아, 이 개 같은….

겨우 이어 가던 진지한 생각의 흐름이 뚝 끊겼다.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이번 게이트를 빌미로 천사연이 내게 뭘 요구할지 예상해 두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엄청 위험한 게이트에 보낸다거나, 저번 길드장 모임처럼 뭔가 둘이서 할 만한 걸 요구한다거나.

“한이결 씨.”

한참을 끙끙거리며 천사연 생각을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우서혁이 돌아왔다. 손에는 못 보던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드십시오.”

게이트에 들어온 지 이제 이틀밖에 안 됐는데도 우서혁은 제이나 길드원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방금까지도 우서혁 주변에 여성분들이 엄청 모여 있었던 것 같은데.

“우서혁 씨가 받은 건데, 절 주셔도 괜찮습니까?”

“거절하는데도 주신 거니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역시 뻔뻔한 면이 있다니까. 거절하기도 애매해서 살짝 웃으며 음료수 병을 땄다. 오렌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음료수는 새콤한 맛이 났다.

“맛있네요.”

“피곤할 때는 달고 새콤한 것을 먹으면 효과가 좋습니다.”

“확실히 그렇죠.”

내 맞은편, 부서진 기둥에 앉은 우서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무심코 받아 보니 예전에도 먹었던, 피로를 풀어 주는 연한 하늘빛 사탕 아이템이었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내가 탐을 냈었던.

“한이결 씨는 게이트 내부에서는 웬만하면 잠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먹어 두는 편이 낫습니다.”

“고마워요.”

입에 사탕을 넣고 우물거리자, 저번처럼 머릿속이 금방 시원해졌다.

“저도 한이결 씨와 마찬가지로 게이트 내부에서는 편히 잠들기 어려워서, 항상 갖고 다닙니다.”

“이번에도 어디서 사는지 안 가르쳐 주실 거예요?”

“예. 죄송합니다.”

“몇 개 더 주시는 것도…?”

“죄송합니다.”

그럼 그렇지.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우서혁이 저번과 다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필요할 때마다 제게 오시면 드리겠습니다.”

그러기엔 게이트가 아니면 딱히 필요 없는데.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남용하실 위험이 너무 크군요. 저한테 부탁하시면 한 개씩 드리겠습니다.”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고민했다. 확실히 일반 커피나 드링크보다 효과가 좋긴 한데….

“그럼 최소한 두 개씩 주시는 건?”

슬쩍 협상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우서혁은 단호했다.

“한 개 이상으로는 안 됩니다. 부작용이 있습니다.”

“부작용이 뭔데요?”

“모르시는 편이 좋습니다.”

“…….”

짜게 식은 눈으로 우서혁을 바라봤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저러니까 어째 알고 싶다는 마음만 치솟는데. 다음에 주변 사람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힐러인 데다 아는 게 많은 민아린은 대답해 줄 것 같은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방긋 웃었다. 내가 더 이상 알려 달라고 고집부리지 않자, 우서혁이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의외로 순진하시군.

“흠흠. 한이결 씨?”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존댓말을 하는 게 영 어색한지 새침한 표정을 한 차수연이었다.

“예?”

“잠깐 괜찮아요?”

입고 있는 가죽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로 삐딱하게 선 차수연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불량 고등학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씀하시죠.”

“팀원 중에 5명을 뽑아서 B 구역으로 정찰을 하러 가야 하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길드원 한 명이 있어서요.”

“아아. 알겠습니다.”

말뜻을 알아채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우서혁이 내 팔을 붙잡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네?”

“한이결 씨는 쉬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생각도 못 한 전개인지, 차수연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계속 구경하다가는 나중에 차수연이 삐쳐도 단단하게 삐칠 거 같아서,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서혁 씨, 어제부터 계속 몬스터 상대하셨잖아요. 저는 딱히 한 것도 없이 쉬었고.”

“하지만.”

“저도 이 정도는 해야 눈치가 안 보이죠.”

내 말에 우서혁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동안은 표정 변화가 없어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우서혁은 고민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는 듯 보였다. 표정이야 무뚝뚝한 그대로지만.

“괜찮습니다. 위험할 일도 없을 거고요.”

우서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자 그가 내 키에 맞춰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갔다 올게요. 가요, 차수연 씨.”

커다란 체구로 멀뚱히 서 있는 우서혁을 뒤로한 채 차수연을 따라갔다. 정찰 갈 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며 차수연이 내게 소리 죽여 말했다.

“레퀴엠 마스터가 붙인 사람이라더니, 확실히 엄청 신경 쓰네. 너 대신 자기가 가겠다고 하고.”

“음, 명령받은 것도 있지만…….”

내가 허구한 날 다치고 기절해서 더 그런 것 같은데. 차마 이것까지 말하진 못하겠어서, 말꼬리를 흐리며 머쓱하게 볼을 쓸었다.

“뭐, 아무튼.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근처만 확인하는 거라서 금방 끝나.”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인 후, 팀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북동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B 구역이었다.

“B 구역에는 큰 마트가 하나 있어. 마트 내부까지 둘러봐야 하는데… 대체로 비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긴 해야 해. 몬스터가 몰려오면 자칫 둘러싸일 수도 있어서.”

곁에서 차수연이 들려주는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목적지로 이동했다.

그 말대로, 1층짜리 넓은 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 수십 대의 자동차와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마트 내부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B급 두 명은 중앙으로 오고, A급 세 명이 앞뒤, 옆을 지킵시다. 별일 없겠지만 그래도 주변을 항상 살피세요.”

“네!”

“예!”

차수연의 말에 팀원들이 군기가 바짝 든 채 대답했다.

오~ 맨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며 짐짓 놀란 척을 하자, 차수연이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봤다.

내 눈에는 차수연이 여동생같이 귀여웠지만, 차수연은 엄연히 유명하고 인기 많은 A급 능력자였다. 그러고 보니 별명도 있지 않나? 뭐였지? 홍염의 여제였던가?

처음에는 그 별명이 유치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선두에 설 테니까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차수연의 손에서 새빨간 불길이 화르륵 타오르자, 어두웠던 마트 내부가 조금은 밝아졌다.

찌직. 한 걸음 내딛자 바닥에 널려 있던 유리 조각이 밟혔다.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움켜쥔 채 주변을 살피던 길드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나 봐요.”

“조심. 한두 마리 숨어 있을 수도 있어요. 일단 더 들어가 볼게요.”

팀원들의 뒤를 지키며 따라 걸었다. 마트 바닥엔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었고, 매대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팀원들의 말처럼 몬스터가 나타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트 내부를 계속해서 살펴보던 중, 짙은 어둠이 드리운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잠깐, 저건 뭐지?’

나는 곧바로 선두에 서 있는 차수연을 불렀다.

“차수연 씨. 잠시만요.”

“응?”

내게 다가온 차수연이 불을 이용해서 내가 가리킨 곳을 밝혔다. 그곳엔 입을 벌린 채 말라비틀어진 좀비가 죽어 있었다.

“이건…….”

“시체가 이상합니다.”

목과 팔다리에 거칠게 물어뜯긴 흔적이 있었다. 차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죽일 수 있는 능력자는 팀에 없어. 왜 이런 시체가 나왔지?”

우리가 죽이지 않은 몬스터 시체가 나왔다는 건, 팀원이 아닌 누군가가 게이트 내부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차수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가능한 일입니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길드에서 관리하는 게이트에 들어가는 놈은 없어. 불법이니까. 게이트 입구는 항상 지키는 인원이 따로 있기도 하고.”

“눈을 피해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거군요.”

“그렇기는 하지. 일단 마스터에게 보고해야겠어.”

시체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있던 차수연이 몸을 펴며 대기 중이던 팀원들에게 말했다.

“더 볼 건 없어 보이니, 이만 돌아갑시다. 이 몬스터 시체만 따로 보고를….”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내 시선에 무언가 반짝 빛나는 것이 걸렸다. 반대편에서 차수연의 미간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오는 물체에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차수연 씨!”

“으윽!”

채앵!

차수연이 내 품에 안기는 동시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바닥에서 들려왔다. 재빨리 확인해 보니 날아온 물체는 뾰족하고 긴 바늘이었다.

“물러서세요!”

“아악!”

그걸 시작으로 어둠 너머에서 바늘이 빠른 속도로 여러 개가 날아왔다. 제일 앞에 서 있던 팀원 한 명이 팔뚝에 바늘이 꽂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한이결!”

차수연이 내 품에서 빠져나오며 불을 크게 피워 올렸다. 그 의미를 알아챈 나도 능력을 끌어 올려 차수연의 불을 바람으로 휩쌌다. 내 능력과 차수연의 능력이 합쳐져 엄청난 불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적의 시야 가렸어. 이 틈에 부상자 챙기고, 구조 지원 폭죽 사용해!”

“차수연 선배님! 뒤쪽에서 몬스터가…!”

그으으, 그어억!

좀비 울음소리가 마트 입구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는지, 수십 마리의 좀비 몬스터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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