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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5)화 (85/394)

85화

22. 조심하라니까

제이나 길드에 속해 있는 G5 구역 게이트 내부는 무너진 건물과 텅 빈 거리, 혼탁한 연기로 가득했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폐허를 둘러보는데, 차수연이 이전에 내가 구해 줬던 인벤토리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착용했다.

“그건 뭡니까?”

워낙에 다양한 아이템을 들고 다니는 차수연의 성향을 알고 있던 터라, 반지는 무슨 효과가 있는지 궁금했다. 내 질문에 그녀가 씩 웃으며 반지가 끼워진 손을 들어 보였다.

“예쁘지? 이 조그마한 게 꽤 비싸. A급 버프 아이템이거든.”

“버프 아이템이면… 능력이 강해집니까?”

“맞아. 화기가 더 세져. 여기 게이트는 온통 시멘트랑 건물뿐이라 내가 눈치 볼 이유가 없거든.”

옮겨붙은 불은 제어하지 못하는 차수연은 이곳이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너도 뭐 하나 빌려줄까? 기다려 봐. 바람 능력이 쓸 만한 게…….”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고개를 저으며 가죽 가방을 뒤적이는 차수연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그 행동에 차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봤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둘은 오늘 처음 본 사이인 겁니다. 지금까지는 몰래 만나 온 거니까요.”

“으응. 그렇지.”

혹여 차수연도 하태헌처럼 나중에 가서 딴소리할까 봐 아예 못을 박아 뒀다. 나는 선두에 서서 홍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서혁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이런 귀찮은 연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우서혁 씨가 계셔서 어쩔 수 없어요. 천사연 마스터가 붙여 준 사람이라서요.”

“그, 나를 납치하라고 시켰던 사람이 천사연 마스터라고 했지? SS급 게이트를 얻어 내려고.”

“맞습니다.”

차수연은 납치됐을 당시에 하태헌과 내가 하는 대화를 옆에서 들었기 때문에 천사연이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새삼 신기하네.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아이템을 대가로 줬다고는 해도, 납치한 건 사실인데.’

…혹시 내가 불쌍한가? 날 볼 때마다 자주 안쓰러운 눈빛을 하던 차수연의 모습을 떠올리니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우서혁이라는 사람이 있으면 친한 척하지 말라는 거지?”

“맞긴 한데, 왠지 어감이 좀….”

찝찝해하는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차수연이 당당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나 연기 잘해.”

“그래 보이기는 해요. 인터뷰 영상 뜨는 거 보면 실제랑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 윽!”

세상 착하게 웃으며 인터뷰하는 영상이 떠올라 솔직하게 대답하던 나는 곧바로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무슨 손이 이렇게 매워?

“아픈데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얼얼한 등을 문지르는데, 홍시아와 대화를 끝낸 우서혁이 돌아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우서혁이 등을 짚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걱정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확인하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흠흠.”

우서혁의 눈치를 살피던 차수연이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갔다. 멀어지는 차수연의 뒷모습을 보는 내게 우서혁이 말했다.

“한이결 씨를 안전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다친 곳이 생긴다면 말씀 주십시오.”

“안전하게 지키라는 명령…. 천사연 마스터가 시킨 겁니까?”

“예.”

지키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거겠지. 한숨을 내쉬는데, 우서혁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명령이 아니더라도, 한이결 씨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겁니다.”

“네?”

“그간 지켜본 바로는, 한이결 씨는 게이트를 들어올 때마다 지나치게 무리하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 정도는…….”

“그 정도 맞습니다. 근래 들어간 게이트마다 크게 다쳐서 돌아왔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으음. 그러고 보니 우서혁과 같이 들어갔던 N42 구역 게이트나 N23 구역 게이트 둘 다 기절한 채로 나왔었지. 맞는 말이긴 하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번엔 조심하겠습니다.”

“예. 무리하지 마십시오. 홍시아 마스터에게도 미리 얘기해 놨습니다.”

진지한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홍시아랑 무슨 대화를 그렇게 길게 하나 했더니.

“어차피 이상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제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S급이 두 분이나 계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한이결 씨가 참여했던 게이트는 높은 확률로 이상 현상이 발견되더군요.”

“예? 그걸 어떻게….”

“한이결 씨가 참여했던 게이트 목록을 확인해 봤습니다. 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걸 왜 봐? 예상했던 거보다 더한 관심에 슬쩍 뒷걸음질 치며 우서혁과 거리를 벌렸다.

“어, 음… 일단 알겠어요.”

“예.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위급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저나 홍시아 마스터가 처리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영 신뢰가 가지 않는지, 우서혁은 몇 번이고 나서지 말라며 내게 신신당부했다. 천사연에게 명령을 받아서 이러는 건지, 원래 잔걱정이 많은 성격인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사이, 인원 체크와 무기 점검을 끝낸 팀이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대열 중간 지점에서 팀을 따라 움직이며 위를 바라봤다. 회색빛 연기에 가려진 흐린 하늘이 우울하게 일렁였다.

***

크르륵, 키륵!

키아아악!

먼지를 뒤집어쓴 좀비들이 무너진 건물 사이를 원숭이처럼 뛰어넘으며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A급 그레이 좀비였다. 좀비치고 생김새가 뚜렷하며 달리는 속도가 빠르고 힘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몬스터였다.

A급 근접 능력자도 부담스러울 만큼 신체 능력이 뛰어난 몬스터라, 원거리팀 모두가 나서서 서포팅을 해야 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는 이는 불 능력자, 차수연이었다.

수십 마리씩 우르르 몰려오는 좀비 떼가 차수연의 능력에 모조리 불타올랐다.

그아아악, 크악! 몸에 불이 붙은 좀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우왕좌왕했다. 그사이 근접팀이 신속하게 좀비들을 때려잡았다.

좀비가 불에 약하다는 거야,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이 게이트는 재앙으로 멸망한 도시 곳곳에 여러 좀비형 몬스터가 존재하고, 중앙으로 갈수록 몬스터 등급이 높아지는 구조였다. 좀비 몬스터들은 상대가 일정 반경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 사방에서 달려들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않고 쉴 틈 없이 주변을 살펴야 했다.

“좋아~ 끝, 끝!”

마지막 좀비 한 마리까지 처리하는 데 성공한 차수연이 씨익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나는 능력으로 불에 활활 타오르는 좀비 시체를 한곳에 모았다.

“역시 우리 수연이. 데려오길 참 잘했다니까?”

“으아으~ 아파요!”

홍시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차수연의 말랑한 볼을 쭉 잡아당기자, 차수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애교를 담아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친자매처럼 보였다. 홍시아가 차수연보다 연상에 키도 커서 그런가.

바싹 타오른 좀비 시체 가까이에서 몬스터 등급을 확인한 측정 능력자가 밝은 얼굴로 홍시아에게 보고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수치도 안정적이에요.”

“다행이네.”

제이나 길드도 이상 현상을 몇 번 경험해 봐서 그런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듣던 홍시아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차수연이 입을 삐죽였다.

“어차피 여기 게이트는 이상 현상이 생겨 봤자 좀비밖에 없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요?”

“어허. S급이면 조심할수록 좋은 거, 몰라?”

홍시아는 잡아당긴 여파로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차수연의 뺨을 콕 찌르며 날 돌아봤다.

“한이결 능력자도 고생했어. 그때도 말했지만, 능력이 참 여러모로 쓸모가 많네. 게이트 끝날 때까지 잘 좀 부탁해.”

“맡겨 주세요.”

차수연의 불이 엄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제어해 준 내게 홍시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사연 마스터가 부탁할 만하네. 덕분에 이번 게이트는 편하게 클리어할 수 있겠어.”

…누가 뭘 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천사연 마스터가 무슨 부탁을 했습니까?”

“응? 얘기 안 들었어?”

“네. 그냥 게이트 가라고만….”

홍시아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래? 굳이 안 했나 보네. 하긴. 그런 소리 나서서 할 만한 성격은 아니긴 하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불안한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옆에 서 있던 우서혁이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자세히 말해 줄 만한 게 없기는 한데. 저번 주에 관리 본부 회의 끝나고 천사연 마스터가 말을 걸더라고. 부탁 하나만 하자면서. 천사연 마스터가 나한테 뭘 부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좀 놀랐지.”

“그 부탁이… 게이트 참여입니까?”

“뭐, 그렇지? 게이트에 자리가 비었으면 한이결 능력자를 용병으로 고용해 보는 건 어떻겠냐 해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에 턱 걸렸다. 홍시아가 주는 서류를 그저 전해 줄 뿐이라고 말하던 천사연의 뻔뻔한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나한테 뭘 어쩌고 싶은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 이제는 원망스러운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속에 풍랑이 치듯 속이 마구잡이로 뒤집히며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할 바 모르고 흔들리는 감정에 마땅히 대답을 못 하는 내게, 홍시아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천사연 마스터가 부탁했다고 해서 무작정 한이결 능력자를 용병으로 고용한 건 아니야. 말을 들어 보니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받아들인 거지. 오해하지는 말고.”

“…그럼요. 그런 오해는 안 합니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부드럽게 웃어 주자, 홍시아가 내게 상큼한 윙크를 보내고는 등을 돌려 근접팀에게로 갔다. 뒤에서 대화를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차수연도 우서혁 때문에 끝내 다가오지는 못하고 홍시아를 뒤따라갔다.

“한이결 씨.”

“예?”

지친다. 순식간에 몰려온 피로감에 멍하니 서 있는데, 곁에 서 있던 우서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어… 뭐가요?”

목덜미를 쓸며 어색하게 대답하자, 무언가 고민하던 우서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마스터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손을 휘휘 저으며 재빠르게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눈치 빠른 우서혁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릿한 고통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무의식적으로 있는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톱이 깊게 박혔던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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