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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4)화 (84/394)

84화

  

“아오….”

어째 혼자서 쉬려고 할 때마다 누가 찾아오는 기분인데. 투덜거리며 문을 여니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수행원이 내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께서 부르셨습니다.”

“…….”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진탕에 처박혔다.

굴업도 섬 게이트 사건 이후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천사연의 소식에 일부러 관심을 꺼 뒀던 터라 어떤 이유로 날 부르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가기 싫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천사연과는 협력 관계인 이상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달만 버티자.’

서울에 있는 모든 게이트를 해결한다면 이 협력 관계도 얼추 끝이 보이겠지. 그때야말로 천사연의 곁에서 벗어나 이곳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행원의 뒤를 따라 곧바로 최상층으로 향하니, 마침 대표실에서 나오는 우서혁과 눈이 마주쳤다.

“한이결 씨.”

내게 곧바로 다가온 우서혁이 내 몸을 위에서 아래로 차분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굴업도 섬 사건에 관한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크게 다치셨다고 하더군요.”

“잘 치료받았습니다. 멀쩡해요.”

“다행입니다. 마스터를 뵈러 오셨습니까?”

“네. 부르셔서요.”

그 말에 우서혁이 어딘가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우서혁 씨?”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마스터께서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으십니다.”

“예?”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기울였다. 기분이 안 좋다고? 천사연이?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며칠 되셨습니다.”

“음, 그런가요?”

“예. 혹여 쓸데없는 일로 꼬투리를 잡아 온다 해도 오늘만큼은 이해하고 넘어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

대체 기분이 나쁘면 어떻길래 이런 걱정을 하는 건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적당히 잘 상대해 볼게요. 보기 싫다고 안 만날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

내 말에 우서혁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우서혁은 이미지에 맞지 않게 꽤나 뻔뻔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네.”

잠깐의 대화를 나눈 우서혁이 떠나가고, 혼자 남겨진 나는 대표실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두 달만 버티자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들어가려니 한숨만 나왔다.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억지로 피며 대표실 문을 열었다.

“왔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천사연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천사연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뭐야. 기분 안 좋다며. 평소랑 다를 바가 없는데?

“어, 뭐….”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입가에 웃음을 단 채로 날 바라보던 천사연이 말문을 열었다.

“그간 잘 쉬었나?”

“어. 왜 불렀어?”

한가하게 근황 얘기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건너뛰자 천사연이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내게 건넸다.

“이건…….”

“이번에 제이나 길드에서 클리어를 진행하는 게이트다.”

서류를 받아 펼쳐 보니 상세히 적혀 있는 게이트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G5 구역에 위치한 S급 게이트. 차분히 내용을 살피던 나는 몰려오는 찝찝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음?”

“이걸 왜 나한테 줘?”

내 말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알아챘는지 천사연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원하던 것 아니었나? 제이나 길드 게이트.”

“네가 주는 건지 홍시아 마스터가 주는 건지 묻는 거야. 제이나 길드에서 내게 정식으로 보낸 용병 제안이냐고.”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

천사연이 주는 거라면 받을 생각 없다. 이거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덥석 받았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굴업도 섬 게이트 사건으로 홍시아에게 나름 존재감도 알렸으니, 천사연이 주는 게이트를 무리해서 받을 필요는 없어.’

거절하자. 그렇게 결정 내렸을 때, 천사연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홍시아 마스터에게 받아 온 서류인데. 필요 없으면 버리든가.”

“홍시아 마스터가 준 서류라고? 직접?”

“……그래.”

오. 그렇다면 정식으로 들어온 용병 제안이잖아.

마침 잘됐다. 슬슬 게이트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는데. 심지어 참여자 목록을 보니 홍시아 마스터도 있잖아? 흡족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용건 끝났으면 간다.”

서류를 챙긴 내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자, 천사연이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심기가 언짢아진 것이 딱 보였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군. 들어온 지 5분도 안 지났는데 가겠다고 하는 꼴을 보아하니.”

“뭐, 좀?”

어딘가 뼈가 느껴지는 말에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바쁘니까 그만 말 걸고 보내 줘, 이 자식아.

“너무하네. 그래도 열흘 만에 겨우 시간 내서 만나는 건데.”

“너랑 내가 간만에 얼굴 본다고 반가워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천사연이 재밌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참 섭섭한데, 이결아.”

“허…….”

마치 연인을 달래듯 사분사분한 말투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우서혁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천사연은 평소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재수 없는 것도 여전하고.

‘물론 우서혁 씨가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긴 한데…….’

어째 밀려오는 찝찝함에 슬쩍 천사연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보니, 웃고 있는 눈과 달리 미간은 좀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신경 쓰지 말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궁금증을 단호하게 끊어 냈다. 천사연이 진심으로 웃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와 관련된 일에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G5 구역 게이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천사연이 다른 말을 꺼냈다.

“우서혁을 보내도록 하지. 같이 다녀오도록 해.”

“필요 없어.”

“이미 홍시아 마스터와 합의된 사항이야. 데려가.”

천사연이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김우진이 아닌 우서혁을 감시용으로 붙이겠다 이건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새삼 실망의 감정도, 항의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은 게이트를 확인해 볼 목적뿐이라 감시를 붙여도 상관없었다.

“10분 지났네. 간다.”

이제는 정말로 그와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천사연도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서류에 기재된 날짜에 맞춰 G5 구역으로 향했다. 오전 중에 처리할 일이 있다는 우서혁을 뒤로하고 먼저 출발했다.

택시를 타고 2시간가량 달려서 G5 구역에 도착하자, 인파 사이로 인터뷰를 진행 중인 홍시아 마스터가 보였다.

“뭐야, 한이결?”

홍시아를 제외하고 딱히 아는 사람이 없는 터라 혼자 멀뚱히 서 있는데,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차수연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차수연 씨.”

“네가 왜… 설마 게이트에 참여한다는 용병이 너야?”

반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네. 차수연 씨도 이번 게이트에 참가하는 겁니까?”

“마스터가 간다니까 따라왔지. 놀랐어. 너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색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좋네요.”

그 말에 차수연이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흐흥, 말은 잘해.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해 놓고서.”

아차. 그제야 마지막으로 차수연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번호를 달라고 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거절했었지.

“음… 제가 좀 바빴어서. 이제라도 애원하면 주십니까?”

혹시 몰라 챙겨 온 핸드폰을 꺼내며 말하자 차수연이 코웃음을 쳤다.

“주겠니? 버스 떠나도 한참 전에 떠났는데.”

한 번만 봐 달라는 뜻을 담아 차수연을 지그시 응시하며 눈썹 끝을 살짝 내렸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그때는 제가 정말 죄송했습니다.”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차수연에게 바싹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번에 주시면 진짜! 오래 간직할게요.”

노력이 통했는지, 차수연이 귓불을 살짝 붉히며 능청스럽게 고민하는 척했다.

“글쎄, 어떡할까.”

“한 번만 봐주세요. 번호 주시면 제가, 윽…!”

“이놈!”

차수연을 살살 꼬드기며 번호를 얻어 내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거칠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허리가 앞으로 꺾일 정도로 강하게 상체를 짓누른 범인은 바로 홍시아였다.

“어머, 한이결 능력자? 미안!”

내 얼굴을 확인한 홍시아가 급히 어깨를 놔주며 말했다.

“웬 놈이 우리 수연이한테 껄떡대나 싶어서 치워 주려고 한 건데. 설마 한이결 능력자였을 줄이야.”

그런 이유라면야. 얼얼한 어깨를 만지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전 껄떡댄 게 아닌…….”

“뭐, 이해해. 우리 수연이가 좀 예쁘긴 하지. 그래도 이제부터 게이트 들어가야 하는데, 자제해 주면 좋겠어.”

“예? 잠깐만요. 이게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오해에 급히 해명하려던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홍시아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우서혁이었다.

“우서혁 씨? 언제 오셨어요?”

“3분 전쯤에 도착했습니다.”

“어, 그럼….”

“한이결 씨. 저도 홍시아 마스터와 같은 의견입니다. 남녀 간에 호감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이왕이면 게이트 클리어 이후에 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황당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홍시아와 우서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악수했다.

“레퀴엠 길드의 우서혁 비서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클리어하는 동안 잘 부탁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오해를 산 것도 모자라 해명할 기회까지 날아가 버렸다. 차수연이 멍청하게 서 있는 내게 다가오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 우리 마스터가 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성격이라…. 정 그러면 내가 대신 말해 줄까? 너 애인 있다고.”

“…….”

젠장, 그러고 보니 그 문제도 있었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하태헌 씨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 난 정말 다 이해한다니까. 물론 내가 예전에 하태헌 씨를 조, 조금은 좋아했지만 그건 정말 지난 일이고… 나는 임자 있는 사람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

“아뇨, 진짜로 아니에요.”

“그래. 알겠으니까 핸드폰이나 줘 봐. 번호 찍어 줄게.”

“…….”

내가 안쓰러웠던지, 차수연이 삐친 척은 그만두고 옆구리를 콕콕 찔러 왔다.

“여기요….”

눈물을 삼켜 내고 남들 못 보게 슬쩍 핸드폰을 차수연에게 넘겨줬다. 차수연이 민아린과 비슷한 속도로 재빠르게 번호를 저장했다. 어떻게 저렇게 손가락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둘 다 참 신기했다.

“자, 다들 준비 끝냈지? 이제 출발하자!”

그사이, 선두로 나선 홍시아가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우서혁과 차수연과 나란히 서서 게이트 내부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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