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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3)화 (83/394)

83화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만든 굴업도 섬 게이트는 인천 소속이 되었지만, 벌어진 사건이 워낙에 특수한 터라 게이트 정보를 모든 길드 마스터에게 공개하기로 결정됐다.

지난 열흘간 게이트 내부를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한 게이트의 주인, IMS 길드의 마스터 김영석은 예정된 브리핑을 위해 서울에 있는 관리 본부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게이트 관리 센터장인 최미진과 S+급 몬스터를 상대하거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서울 길드 마스터들, 관리 본부 직원 몇이 전부였다.

“시작하죠.”

프로젝터 스크린이 내려오고 노트북이 켜진 것을 확인한 최미진이 김영석에게 손짓을 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크흠. 흠.”

헛기침하며 스크린 앞에 선 김영석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게이트 위치의 정확한 좌표부터 내부 규모, 발견된 식물형 아이템 재료 등 이어지는 정보들을 회의 참석자들이 지루한 표정으로 들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추가로 집계되는 자료는 관리 본부에 정식으로…….”

“김영석 마스터.”

“예, 예?”

브리핑이 끝을 보이자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하던 김영석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를 부른 이는 턱을 괴고 삐딱한 자세로 브리핑을 듣던 천사연이었다.

“몬스터 관련된 정보가 다소 부족해 보이는데. 이게 답니까?”

느긋한 말투로 찔러 오는 지적에 김영석이 마른침을 삼켰다.

‘진정해.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어째서인지 등줄기에 쭈뼛 소름이 돋았지만, 김영석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 이 이상으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시간이 부족하다라.”

천사연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꼬리 한쪽을 끌어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회의실 내부 분위기가 찬물을 뿌린 것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사흘 전인가…. IMS 길드 소속 연구팀이 몬스터 시체를 가져가서 아이템 제작 연구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예? 아, 아니….”

김영석이 크게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을 포함해 길드 수뇌부들만 알고 있는 정보를 천사연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시발, 뭐야! 어느 놈이 나불거린 거야? 설마 연구팀 놈들인가?’

김영석은 몬스터 시체를 제공해 줄 때만 해도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겠다며, 비열하게 웃던 연구팀장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침착해.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천사연 마스터. 그런 소문이야 언제든 돌지 않습니까? 고작 소문 하나로 이러시는 거면 곤란합니다.”

김영석이 화를 내며 따지자 천사연이 따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예상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니까…….”

그가 착용하고 있는 손목시계의 중앙을 툭툭 두드렸다. 허공에서 툭 떨어진 서류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 천사연이 서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김영석 마스터. 말 한번 잘했습니다. 고작 소문 따위로 사람 하나 조지는 거, 해서 안 될 일이죠.”

팔락.

“그래서 한번 찾아봤습니다. 공식적으로 등록하기도 전에 빼돌려서 써먹고 있는 재료가 있는 게 사실인가 궁금해서.”

“그, 그게 무슨…!”

“촉수 세포. 촉수 체액. 몬스터 표피. 몬스터 피. 몬스터 내장 기관에서 발견된 검의 일부분… 다양하게도 챙겨 먹었네. 계속 읽어 드릴까?”

김영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천사연의 말을 듣고 있던 최미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홍시아와 이주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요! 이건, 그러니까….”

“크지도 않은 게이트를 별 핑계를 다 대며 일주일이 넘도록 질질 끌길래, 난 또 아주 대단한 걸 준비하나 했습니다. 그게 고작 이딴 좀도둑질인 걸 알고 오히려 좀 실망스러웠고.”

신랄한 비난에 김영석이 목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소리쳤다.

“좀도둑질이라니! 이봐요, 천사연 마스터!”

“몬스터가 보여 준 디버프 능력이나 재생 능력은 물론이고, 알에 갇혀 있던 참석자와 그렇지 않은 참석자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석도 안 했더군요. 이해합니다. 몬스터 시체 빼돌리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거슬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 내자 김영석이 마땅한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벌벌 떨며 눈치를 보는 김영석을 향해 천사연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입만 호선을 그릴 뿐,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과 조롱이 짙게 드러났다.

“게이트 사건으로 피해자가 그렇게 많은데 이딴 짓거리를 했다는 게 참 대단합니다, 김영석 마스터. 이왕 할 거 들키지 않도록 제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럼 이런 좆같은 상황도 없었을 텐데.”

“그만하세요, 천사연 마스터.”

미간을 짚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끼어든 최미진이 급히 회의를 정리했다.

“천사연 마스터. 일단 그 자료는 저한테 주시고, 김영석 마스터는 저와 따로 대화 좀 하시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예에~ 고생, 고생.”

“고생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시아와 이주하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법을 저지른 의혹을 받게 된 김영석은 최미진의 호출을 받고 온 직원에게 붙잡혔다.

“어휴, 기 빨려 죽겠네.”

이주하와 함께 복도로 나온 홍시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영석 마스터가 멍청한 짓을 하긴 했는데, 천사연 마스터도 장난 아니네. 평소에는 저런 거에 관심 두지 않았던 거로 아는데.”

그 말에 이주하도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오늘따라 엄청 예민해 보이고.”

“성격 더러운 거야 하루 이틀 아니긴 한데, 오늘은 티를 좀 내긴 하더라.”

잠시 고민하던 이주하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웃지도 않고…. 무슨 일 있나?”

“그때도 굴업도 섬 게이트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아까 말하는 거 보면 김영석 마스터가 저지른 짓, 진작에 눈치채고 있던 것 같은데. 왜, 그 A급 용병. 한이결 능력자였나?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 잡느라고 엄청 고생했는데, 김영석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냉큼 빼먹으려고 한 거잖아.”

“그런가…?”

한이결 능력자. 이주하는 그 이름을 듣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붕대를 칭칭 둘러맨 날렵한 몸매와 능글맞은 성격에 어딘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저렇게 대신 화낼 정도면 한이결 능력자를 꽤 아끼나 봐.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도는 건가?”

“소문?”

홍시아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 죽여 설명했다.

“레퀴엠 길드는 부마스터 자리가 비어 있잖아.”

“으응.”

“그 자리에 한이결 능력자를 앉힐 거라고 기자들이 떠들고 다니더라. 이미 소문 쫙 퍼졌다면서.”

“부마스터 자리에 한이결 능력자를?”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놀라는 이주하에게 홍시아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소문일 뿐이니까, 확실한 건 아닌데…. 지금 상황을 보면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천사연 마스터가 이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던 상대가 지금껏 없었잖아.”

그 말에 이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사연 마스터와 꽤 친밀해 보였지. 한이결이 힐러에게 응급 처치를 받는 동안 곁에 바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던 천사연의 모습은 꽤 인상 깊었다.

“근데 왜 길드에 소속시키지 않고 용병으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는 거지? 진짜로 부마스터 자리에 앉힐 계획이면 조금이라도 빨리 데려와야 편할 텐데.”

“음…….”

“전부터 느꼈지만, 천사연 마스터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던 이주하가 넌지시 말했다.

“한이결 능력자가 들어가기 싫어하는 거 아냐?”

“에이.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다른 길드면 몰라, 레퀴엠인데. 아무튼 재밌어.”

이주하는 어쩐지 복잡해지는 감정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한이결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상대였다.

뻔뻔하게 웃으면서 다가와 경계하는 하태헌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란 도움은 모조리 쏟아붓는 사람. 언제나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하태헌이, 한이결만 보면 자꾸만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홍시아 마스터.”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동시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천사연이 서 있었다.

“응?”

“잠깐 대화 좀 하지.”

“나랑? 대화를?”

천사연과 몇 년을 알고 지내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인 터라, 홍시아는 물론이고 이주하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천사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럼… 난 먼저 갈게. 천사연 마스터, 다음에 뵙죠.”

“그러죠.”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이주하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갔다. 둘만 남자 홍시아는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천사연에게 물었다.

“뭔데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아?”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부탁이라고? 관심을 보이는 홍시아를 향해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

하태헌과 만난 이후로, 일주일간 나를 괴롭혔던 불편한 감정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솔직히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누구도 가 보지 못했던 하태헌의 집에 초대받은 것도 모자라, 와인까지 한잔하다니.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오해도 풀고 하태헌과 사이도 가까워졌겠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소파에 드러누운 나는 김우진이 새로 가져다준 자료를 읽었다.

2개월 전부터 시작된, 서울에 속한 게이트의 절반을 클리어하는 계획은 슬슬 끝이 보였다. 이제 남은 반절의 게이트도 클리어가 완료되면,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게이트와 아닌 게이트를 분류할 수 있다.

‘그렇게만 돼도 지금보다 훨씬 안정되겠지.’

즉, 지금까지 했던 만큼만 더 고생하면 된다.

할 만한데? 게이트 문제만 해결되면, 그동안 미뤄 뒀던 한이결의 과거도 알아볼 여유가 생길 거고.

“나쁘지 않네.”

읽던 자료를 덮으며 눈을 감았다.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낮부터 저녁까지는 김우진도 훈련실에 가 있어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기분 좋게 만끽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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