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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2)화 (82/394)
  • 82화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 방에 혼자 남은 나는 아주 오랜만에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숨겨 놨던 핸드폰을 꺼내 들고 딱 하나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길게 이어진 연결 음이 거의 끊길 때쯤에 겨우 연결됐다.

    “접니다, 하태헌 씨.”

    […그래.]

    내가 연락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하태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식으로 대화를 터야 할지 고민하는데, 의외로 하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예?”

    [돌아가서 치료는 잘했나?]

    “음…. 네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상태가 안 좋기는 했나 보다. 하태헌이 이런 걸 다 물어봐 주고. 입가에 미소를 단 채로 본론을 꺼냈다.

    “요즘 많이 바쁘십니까?”

    [어느 정도는.]

    “그, 한번 만났으면 좋겠는데.”

    하태헌이 눈앞에 있지도 않은데 어쩐지 눈치가 보였다. 괜히 목덜미를 쓸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하태헌이 어딘가 놀리는 어투로 말했다.

    [데이트?]

    “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이전에 데이트 운운하며 불러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놀리는 거 맞잖아. 젠장.

    “네, 뭐… 데이트. 네.”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하태헌이 언제 놀렸냐는 듯 평소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럼 지금 보지.]

    “지금요?”

    [나와.]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저번에는 더 늦게 만난 거로 아는데.]

    그렇긴 하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3분. 막 자정을 지나간 시간이었다.

    “저야 그편이 더 좋기는 한데. 안 피곤하세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

    그래, 너 잘났다. SS급이라 이거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번에 만났던 곳에서 보도록 하지.]

    “저번이라면… 호텔 근처요?”

    [그래. 일단 만나서 대화할 만한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낫겠군.]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후, 핸드폰을 침대 매트리스 밑에 다시 숨기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하얀 티셔츠에 조금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며 방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입김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저번처럼 창틀을 밟고 밖으로 빠져나오며 능력으로 몸을 띄웠다.

    ‘대화할 만한 장소로 이동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로헌 길드로 가겠지?’

    바람에 흩날리는 카디건을 추스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길드로 오라고 하면 될 텐데.

    동쪽으로 20분 날아가면 나타나는 호텔 옆 골목. 전과 같은 위치에 세워진 하태헌의 차를 발견한 나는 땅으로 내려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하태헌 씨.”

    허리를 굽혀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하태헌을 보며 웃었다. 그는 웬일로 정장 차림이 아닌, 검은 목티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쉬다 나오신 겁니까?”

    조수석에 앉아 거리가 가까워지자, 살짝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하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가시게요? 길드?”

    안전벨트를 매며 묻자 하태헌이 핸들을 돌리며 무심히 대답했다.

    “집.”

    “예?”

    집? 누구 집?

    “…설마 하태헌 씨 집이요?”

    “그래.”

    당황한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하태헌은 폭탄 발언을 던져 놓고는 예사로운 태도로 운전을 했다.

    “저를 집에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지금요?”

    “안 될 건 뭐가 있지?”

    “…….”

    안 될 건… 없긴 하지. 헛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긴. 우리 관계가 평범하진 않으니까. 대화할 장소가 마땅치 않기는 해.’

    소설 속 하태헌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이주하나 민아린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그런 엄청난 장소를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만난 내가 가도 되는 건가? 이주하나 민아린처럼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무리 집주인이 초대했다지만 나 같은 놈이 함부로 가기에는…….

    ‘…그만하자.’

    하태헌에게 부담스럽다고 말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속으로 별생각을 다 한다. 창에 비친 하태헌의 옆모습을 힐끔 보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래도.’

    기분이, 꽤 괜찮았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며 괜히 헛기침했다. 운전 중인 하태헌이 잠깐 내게 시선을 보낸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

    삐비빅. 삑.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른 하태헌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혼자 사십니까?”

    회색빛 소파와 검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널따란 거실을 둘러보며 묻자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카디건을 벗어 건네주며 뻘하게 웃었다.

    “앉아 있어라.”

    “네.”

    엉거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하태헌이 놔둔 것처럼 보이는 책 한 권과 장식장 위로 보이는 벽걸이 TV, 그리고 작은 선인장 화분 두 개.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필요한 가구와 물건만 딱딱 놓여 있는 게 마치 하태헌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간 거실을 구경하고 있으니, 카디건을 놓고 주방에 들어갔던 하태헌이 돌아왔다.

    “그건… 와인입니까?”

    그의 커다란 손에는 각각 와인 한 병과 와인 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얼떨결에 하태헌이 건네주는 와인 병을 받아 든 나는 라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이거 엄청 비싼 와인인데, 오픈해도 괜찮습니까?”

    “어차피 선물 받은 거라.”

    하태헌은 와인에 조금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오프너를 이용해 코르크 병마개를 제거했다.

    바를 몇 년 운영하면서도 돈 좀 만진다는 놈들이 놀러 올 때나 준비했던 비싼 와인을 하태헌의 집에서 마시게 되다니. 와인 잔에 담긴 향을 맡는 내게 하태헌이 물었다.

    “곁들일 음식은 딱히 준비된 게 없군.”

    “아, 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와인이면 오히려 뭔가를 곁들이는 게 맛을 해칠 수도 있다. 디캔터를 하지 않아 살짝 아쉬웠지만, 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와인 잔에 담긴 레드 와인을 바라보다, 뒤늦게 제정신이 들었다.

    ‘……잠깐. 왜 자연스럽게 와인을 마시게 된 거지?’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급격히 찾아온 이성에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하태헌 씨. 제가 할 얘기가 있는데요.”

    “와인이 별로인가?”

    “아뇨. 와인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술은 없다.”

    그러니까… 와인이고 뭐고 우리가 왜 지금 술을 마시냐고요….

    맞은편에 앉은 하태헌을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알고 있다.”

    내 말을 끊어 낸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SS급 코트 때문이겠지.”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낮게 가라앉았다. 한숨을 겨우 삼켜 내며 목덜미를 쓸었다.

    “…예. 제가, 좀 섣불리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SS급 코트가 하태헌 씨의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죄송합…….”

    “한이결.”

    “예?”

    “시선 돌리지 말고 날 봐.”

    그 말에 불안함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하태헌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는 내 생각만큼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왜 사과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

    “이주하 마스터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천사연이 코트 가지고 협박을 했다고.”

    “그래. 네 말대로 천사연 마스터가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협박을 했었지.”

    문득, 섬에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굴던 천사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려는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근데 그게 네가 사과할 일인가?”

    “그건…….”

    “D8 구역에서 코트를 얻어 냈을 때, 네가 말했었지. 무슨 이유로 접근했건 결과는 SS급 아이템이라고.”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하태헌의 모습에 어색한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저렇게 재수 없게 말했었나?

    “천사연이 협박한 일은 나와 천사연 사이의 문제지. 거기에 네 사과는 필요 없다. 코트는 최대한 문제없이 공개할 방법을 찾는 중이고.”

    “그래도….”

    “아니면, 천사연이 저지른 일을 네가 대신 사과할 만큼 둘이 각별한 사이라도 되나?”

    질문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럼 됐군. 사과하지 마.”

    하태헌의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무릎 위에 올려놨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내가 그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변명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천사연이 코트를 알아챈 것도… 정말 몰랐습니다. 절 의심하신 것도 이해합니다. 숨기는 것도 많고…….”

    “아니. 증거도 없이 찝찝하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의심한 건 내 잘못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말한 하태헌이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고 널 온전히 믿겠다는 건 아니다. 그건 다른 문제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덧붙인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과한 바람은 가져 본 적도 없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하태헌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대며 내 앞에 놓은 와인 잔을 향해 턱 끝을 까딱였다.

    “마셔.”

    “음….”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이 중요한 대화가?

    최악의 경우, 몇 대 얻어맞을 각오까지 했던 나는 아리송한 마음으로 와인 잔을 들었다.

    ‘나름… 하태헌도 내게 미안해서 이러는 건가?’

    어쨌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하태헌의 눈치를 살피며 와인을 한 입 마셨다.

    “……!”

    오, 괜찮은데. 내 표정이 밝아지자 그제야 하태헌도 다시 와인 잔을 들었다.

    하태헌과 함께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지만, 이전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그와 마주한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내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

    와인 잔을 다 비워 갈 때쯤, 드물게도 하태헌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남은 와인을 마신 나는 빈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봤다.

    “네?”

    “굴업도 섬 게이트 내부에서.”

    갑작스러운 대화 주제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태헌을 멀뚱히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자, 그가 잠시간 망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사연이, 뭔가를 하던데.”

    “천사연이요?”

    워낙 개 같은 짓을 많이 해서 뭘 말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자, 하태헌이 다 마신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설명을 더했다.

    “지하에서 이주하 마스터와 홍시아 마스터를 구해 낸 후, 바로 네게 갔었다.”

    “아. 그랬나요? 그러면….”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던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태헌이 촉수를 잘라 내 준 덕분에 죽지 않고 몬스터를 처리했지. 그 이후는 뒤늦게 도착한 천사연이 내게 기운을…….’

    거기까지 생각하자, 불길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설마.

    “기절한 너를 눕힌 채로 천사연 마스터가.”

    “자, 잠깐만요!”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황급히 하태헌의 말을 끊어 냈다.

    “하태헌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런 거?”

    “그냥, 제가 디버프에 걸려서 풀어 주느라고 그런 거예요. 자세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걸 어떻게 풀어 줄 수 있는 거지?”

    “…….”

    그것만큼은 대답해 주기 싫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하태헌은 집요했다.

    “어떻게 풀어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뜨거운 시선에 옆얼굴이 뚫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보지 마. 내가 널 어떻게 이겨. 한참을 버티던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대답을 뱉어 냈다.

    “…저도 제대로 아는 건 아닌데요. 천사연 말로는 SS급은 상대방한테 기운을 넘겨줄 수 있다고 합니다.”

    “흐음.”

    예상대로 하태헌은 꽤나 흥미로워하며 날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져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와인 마시다가 갑자기 기운을 왜 받습니까? 그리고 그거 엄청 아프… 아픈 건 아닌데, 불편해요. 진짜 웬만한 상황 아니면 받기 싫습니다. 천사연한테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한 겁니다.”

    질색하며 거절하자 다행히 하태헌은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묘하게 아쉬워 보이는 게, 기회만 되면 해 보겠다고 덤빌 게 눈에 훤했다.

    ‘괜히 알려 줬어…….’

    눈물을 삼켜 내며 솔직하게 대답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아무쪼록 하태헌의 기운을 받게 될 상대가 내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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