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1)화 (81/394)

81화

21. 극과 극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인데…….”

인사를 끝내고도 자리를 뜨지 않던 이주하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다시 입을 열었다.

“태헌이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레퀴엠 마스터에게 정보를 팔아넘길 만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예?”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작스러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보를 팔아넘겨? 내가 천사연에게?

“사실 저도 이전까지는 당신을 의심했어요. SS급 코트를 태헌이에게 주고, 그걸 약점 삼아 휘두르려는 줄 알았죠. 그래서 천사연 마스터가 SS급 코트를 빌미로 태헌이를 협박했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화가 나기도 했고요.”

“…….”

이주하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심장 한구석에 사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그랬는데… 태헌이가 아까 게이트 지하에서 제게 말하더군요. 그런 비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당신을 한번 믿어 보겠다고. 코트 주인이 그러겠다는데 제가 의심해 봤자 뭐 하겠어요. 당신에게 목숨을 빚진 것도 사실이고.”

그동안 갑갑했던 속내를 뱉어 낸 듯, 이주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그동안 찝찝했던 사건들은 일단 묻어 두자고요. 저도 삐뚠 생각은 버리고 당신을 제대로 알아 갈 테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와 악수했다.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했어요. 이만 가 볼게요. 다친 곳 치료 잘 받아요.”

이주하가 후련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떠나가는 이주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사연이… 협박했다고? 하태헌에게?’

그것도 내가 구해 준 SS급 코트를 빌미로?

화한 분노가 가슴을 집어삼키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고개를 숙이며 싸늘하게 식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울컥거리며 목구멍 너머로 치솟았다.

‘그래서…….’

그래서 하태헌이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봤던 건가. 용병 일로 로헌 길드를 찾아갔던 그날부터, 유독 내게 차갑게 대하며 혼란스러워하던 하태헌의 태도가 떠올랐다.

“하, 시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욕설을 뱉어 내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알고 있었잖아. 천사연은 원래 그런 새끼라는 걸. 좀처럼 진정되지 않은 감정이 너무나도 짜증스러웠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주변 모든 것을 아무 죄책감 없이 이용하고도 남을 쓰레기라고, 분명 알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한이결?”

천천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친 채로 날 바라보고 서 있는 천사연이 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우습게 느껴졌다.

“왜 그러지? 어디가 더 아픈 거라면…….”

“오지 마.”

가까이 다가오려는 그를 멈춰 세웠다. 천사연이 내 싸늘한 시선에 눈가를 좁혔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분위기가 나와 천사연 사이에 내려앉았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본 천사연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잠깐 사이에….”

“…….”

“누가 다녀간 모양인데.”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뱉어 내지 못했다. 대화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나와 천사연은 그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일 뿐인데.

‘저딴 새끼한테 배신감을 느끼는 내가 멍청한 거지.’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착잡한 심정은 자꾸만 내 기분을 끝도 없이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말해, 한이결.”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말도 천사연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자 천사연이 가면처럼 걸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윽…!”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맞닿은 피부가 꽤 차가웠다.

“열이 또 오르잖아.”

“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 지랄일까.”

“으… 아, 아파!”

손목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자 천사연이 힘을 살짝 풀었다. 그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순순히 말하면 아플 일 없을 텐데.”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웃었다. 지금 지랄맞은 게 누군데. 짜증 나는 새끼.

“너랑 관련 없는 일이니까 신경 꺼.”

그래. 이건 그저 나와 하태헌 사이의 일이다. 너 같은 놈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어.

천사연이 불쾌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 그때, 낯선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이결 씨?”

아까 내게 응급 처치를 해 준 힐러였다. 천사연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그는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간 이동 설치가 다 됐다고 하네요. 부상자부터 이동할게요.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구급차도 대기시켜 뒀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지.”

나 대신 대답한 천사연이 손목을 놓으며 대신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어깨를 부축해 왔다. 손목을 잡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뿌리치고 싶었지만, 또 어떤 식으로 고집을 부려 올지 모르는 터라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천사연에게 부축을 받으며 공간 이동이 설치된 곳으로 이동했다. 바닥에 새하얗고 둥근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앞에 최미진이 서 있었다.

“한이결 능력자.”

다크서클이 짙게 낀 얼굴을 한 최미진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무난한 대답을 하자 최미진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예?”

“해야 할 일을…….”

“거기까지 하지.”

천사연이 드물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천사연의 심기가 사나운 상태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최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요.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바로 이동하시죠. 천사연 마스터께서도 함께 가실 겁니까?”

“그러지.”

“알겠습니다. 그럼 한이결 능력자. 나중에 또 뵙죠.”

최미진을 뒤로하고 천사연과 함께 공간 이동 진 위에 섰다. 공간 이동 진은 설치도 까다롭고 이동할 수 있는 인원수에도 제한이 있어서, 나처럼 부상자가 있는 경우에만 사용됐다.

바닥을 빛내던 새하얀 빛이 점점 더 커지며 나와 천사연의 몸을 집어삼켰다.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차오르자 현기증이 일며 몸이 비틀거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휘청이는 몸을 뒤에서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체온이 느껴졌다.

***

호텔 바닥 전체에 발동된 공간 이동 능력으로, 다수의 능력자가 동시에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게 된 전대미문의 사건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 능력자들 대부분이 길드 마스터라는 소식에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까지 한국으로 몰려와 여기저기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하는데, 일개 무소속 능력자에 불과한 나와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당시, 인천으로 건너온 나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를 타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은 후, 힐러에게 치료를 받아 상처 하나 없이 회복할 수 있었다.

병원까지 동행한 천사연은 힐러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나를 길드로 데려다주고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히 바쁘겠지.’

천사연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 마스터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게이트 내부로 이동시킨 방법은 물론이고 범인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상태니 이런 소란은 한동안 계속되겠지.

소파에 누운 채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데,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부스스 눈을 뜨니 몸 위에 올라탄 김우진이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이런 짓을 하는 거 보니 김우진이 아니라 분신인가.

능력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김우진은 분신 하나를 상시 꺼내 놨다. 본인은 그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듯 보이지만 뭐, 어쨌든 연습은 필요하니까.

“무거워….”

타박에도 김우진 분신은 그저 웃으며 상체를 숙여 안겨 왔다. 한숨을 내쉬며 등을 토닥여 주는데, 주인이 득달같이 달려와 분신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일어나.”

“싫어!”

싸늘한 김우진의 말에 분신이 소리쳤다. 처음에는 어딘가 맹해 보이던 분신은 김우진의 노력 끝에 제법 의사 표현이 확실해졌다. 내게 엉겨 붙는 건 여전했지만.

“너도 귀찮게 굴면 쳐 내야지, 왜 받아 주고 있어?”

몸 위에 눌어붙어 있던 분신을 기어코 떼어 낸 김우진이 이젠 내게 잔소리를 했다. 이건 좀 억울한데.

“뭐 어때서 그러냐. 어차피 네 분신인데.”

“분신은 분신이지, 내가 아니잖아.”

이게 무슨 말이지?

“분신은 쳐 내고 네가 안겨 오는 건 내버려 두라는 거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김우진의 눈초리가 한층 더 뾰족해졌다.

“당연한 거 아냐?”

“그게 그렇게 되나…?”

묘하게 찝찝한 논리였지만 어디가 이상한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리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결 씨~.”

지난 일주일간 매일같이 놀러 와서 출석 도장을 찍는 민아린이었다. 민아린이 문을 열어 준 분신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어 준 후, 내게 다가왔다.

“오늘도 여전히 누워 계시네요.”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죠.”

누운 채로 민아린을 반기자 그녀가 웃으며 내게 쿠키 박스를 건넸다.

“휴가 끝난 동료가 사 온 쿠키예요. 이결 씨 단 거 좋아하니까 맛있게 드실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요.”

“고마워요.”

오, 쿠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쿠키 박스를 받았다. 간식 최고.

그 와중에 분신이 쿠키 박스를 여는 내게 다가와 붙어 앉았다.

“우유랑 같이 먹어.”

김우진이 우유가 담긴 컵을 테이블에 놔 주었다. 안겨 오는 분신을 토닥이며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좀 나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저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은 민아린이 우유를 가져다준 김우진의 손에 쿠키를 쥐여 주며 말했다.

“네. 호텔 사건 이후로 계속 우울해하셨잖아요. 무기력증도 좀 보였고.”

“음…….”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티가 났구나. 민아린이 일주일간 매일같이 온 이유가 있었다.

김우진도 말만 안 했을 뿐 진작 알아챘겠지. 저래 보여도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이니까.

“그냥, 좀… 걱정하실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요.”

내 표정을 살피는 민아린과 김우진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마음을 정하지 않아 지지부진하게 문제를 끌어안고 있었더니, 괜히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게 만들었다.

우유를 마시며 천사연과 하태헌을 떠올렸다. 천사연은… 아직은 만나기 싫고. 하태헌은 슬슬 한번 연락해 봐야겠다. 이래저래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더 끌어 봤자 내 속만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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