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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80)화 (80/394)

80화 

잠시간 한이결의 상태를 살펴보던 천사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한이결의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뻣뻣하게 굳은 기운이 느껴졌다. 디버프 능력에 당한 건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협력자로군.”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은 천사연이 모로 누워 있는 한이결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반듯한 자세로 눕게 된 한이결의 위로 올라탄 천사연이 그의 볼을 매만졌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순한 얼굴이 보였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며 천사연이 싱긋 웃었다.

여기저기 다치고 망가져 있긴 하지만, 자신이 사 준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 있는 한이결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꽤나 괜찮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이결을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는데.

“진짜 이름은 언제쯤 들키려나. 응? 한이결.”

새하얀 뺨을 장난치듯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매번 자신이 건드리는 대로 반응을 보이는 그 모습에 천사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꼬리를 휘었다.

얼굴을 붙잡은 채로, 왼손을 내려 한이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전처럼 깍지를 껴서 잡은 손에 천천히 자신의 기운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읏.”

손바닥을 타고 질척한 기운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한이결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듯한 미간이 구겨지고,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천사연은 그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으, 아… 흐윽.”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살짝 떠진다. 드디어 마주한 부드러운 캐러멜색 눈동자가 천사연을 향했다.

“하, 태헌 씨…?”

“…….”

디버프 효과 때문에 혀가 굳은 듯, 살짝 어눌한 발음으로 내뱉어진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천사연은 웃는 얼굴 그대로 한이결의 손을 더 힘주어 잡으며 왈칵, 기운을 한 번에 쑤시듯 밀어 넣었다.

“아? 헉, 으, 으윽…! 아…!”

흐릿한 시선으로 천사연을 올려다보던 한이결의 허리가 확 휘었다. 아파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천사연은 심술부리듯 멈추지 않고 계속 기운을 집어넣었다.

“그, 만… 그만…! 나 힘, 힘들…….”

“참아.”

한이결이 제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버둥거렸다. 그 몸을 힘주어 억누르며 천사연이 타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는 거잖아. 얌전히 받아야지. 응? 남들은 받고 싶어도 못 받는 귀한 건데.”

“읏, 아, 안… 더는…! 흐으!”

“하하, 이것 봐.”

손바닥을 타고 들어간 천사연의 뜨거운 기운이 한이결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쌌다. 디버프 로 굳었던 기운이 천천히 풀어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거워하는 주인과 다르게, 흘러나오는 기운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천사연이 입가에 비웃음을 달았다.

“이렇게 잘 받아먹을 거면서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고…. 거짓말이 버릇이 됐나 보네.”

“흐으윽…! 아, 으윽…….”

말도 안 되는 비난에도 한이결은 평소처럼 반박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질질 흘렸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한이결을 응시하며 천사연은 기운이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허억, 헉….”

기운 넣는 것을 멈추자 한이결이 얼굴을 붙잡힌 채로 벌벌 떨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살짝 젖어 있는 게, 더 밀어붙였으면 참지 못하고 울었을 게 뻔했다. 약간 아쉬움이 들었다.

“천사연…….”

이제야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준다. 천사연은 어딘가 비틀렸던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응.”

“이, 개 같은… 새끼야.”

덕분에 디버프 효과에서 벗어난 한이결이 선명해진 눈동자와 정확한 발음으로 욕설을 뱉어 냈다.

“하아, 내가 이거… 다신 하지 말라고 했잖아…….”

기운은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나빴다. 천사연은 바닥난 기운을 채우기 위해 바르르 떨리는 그의 팔찌에 힐끔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난 그러겠다고 대답한 적 없던 거 같은데.”

“꺼져, 재수 없는 놈아…….”

짜증을 담아 천사연을 노려보던 한이결이 지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손에 닿아 오는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에서 시작된 열이었다. 기운이야 팔찌로 어떻게든 된다지만, 상처는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천사연은 축 늘어진 한이결을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를 받치고, 상체는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치솟는 열에 두통이 밀려오는지 한이결이 안긴 채로 개새끼처럼 끙끙거렸다.

그를 안은 채로 나갈 길을 찾으려 주변을 살피던 천사연은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SS급 코트를 손에 쥔 채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하태헌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별 상관은 없다. 천사연은 일부러 보란 듯이 한이결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하태헌의 미간에 힘이 들어가며 검은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천사연은 그가 느끼는 감정의 결을 알아챘다. 후회.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코트를 힘주어 잡은 하태헌이 등을 돌렸다. 그가 가는 길 앞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것을 발견한 천사연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뒤를 따라 걸었다.

***

몽롱한 정신 사이로 여러 명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으…….”

“더 자.”

바로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 왜…….”

너한테 안겨 있어. 뒷말은 거의 속삭이듯 나왔다. 용케 들은 천사연이 어딘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기껏 디버프 효과도 없애 줬는데 기절을 해 버리니. 안아 들고 올 수밖에.”

“여기 어딘데….”

“지하. 게이트 출구도 찾아냈어. 지금은 알에 갇힌 참석자들을 꺼내고 있고. 이제 몇 명 안 남았군.”

그런가.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쿨럭, 쿨럭! 뭐야?”

“…여기가 게이트 내부라고?”

“굳이 깊게 박아서 찢어 내지 않아도 충분히 꺼낼 수 있어. 그래, 그 정도로.”

“여기 알 두 개 더 발견!”

“누가 벌인 짓인지 아직 모르는 건가?”

지하실 내부는 참석자들의 대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다들 바빠 보이는데, 나만 편하게 안겨 있는 거 같아서 불편했다.

“내려 줘…….”

“안 돼.”

내가 내려가겠는데 네가 뭔데 안 된다고 하냐. 내려가기 위해 낑낑거리며 몸에 힘을 줬지만, 엉덩이와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천사연의 팔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천사연이 말 안 듣는 어린애 대하듯 한소리 했다.

“가만히 있어.”

“아니, 괜찮으니까 놔 봐.”

“등에 상처가 커. 이마도 찢어졌고. 또 기절하고 싶지 않으면 말 들어.”

어쩐지 등이 지나치게 화끈거린다 했더니. 한창 몬스터를 상대할 때, 바로 등 뒤에 내리꽂혔던 벼락을 떠올렸다. 그때 다친 건가.

천사연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모든 참석자가 구해지고 게이트 출구로 탈출할 때까지 반강제로 그에게 안겨 있어야 했다.

미리 게이트 밖으로 나가 응급 센터와 관리 본부에 연락을 취한 하태헌과 이주하 덕에, 여러 지원팀이 헬기를 타고 빠르게 도착했다.

게이트가 생겨난 위치는 인천시에 속해 있는 섬 중 하나인 굴업도였다. 관광객이 오고 가긴 해도 워낙 사람이 적은 섬이라, 한 달 전에 생겨난 게이트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절벽 아래, 구석진 곳에 떠 있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저런 위치면 모를 만하네.’

참석자 중 가장 크게 다친 나는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힐러를 만났다. 내 상태를 확인한 힐러는 내상의 위험이 크니 병원부터 가 보라고 말하며, A급 지혈 붕대로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나는 붕대를 감은 맨몸에 흰 셔츠를 어깨에 걸친 채로 뒷정리에 여념 없는 참석자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중 제일 바빠 보이는 건 아무래도 하태헌과 홍시아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몬스터를 상대했던 둘은 관리 본부 관계자부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론까지, 다양한 이들에게 불려 다니며 상황 설명을 했다.

나도 끌려갈 뻔했지만, 찾아오는 사람마다 곁에 서 있는 천사연의 싸늘한 웃음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 허겁지겁 멀어지는 언론 관계자를 바라보며 천사연에게 말했다.

“인터뷰 정도는 상관없는데.”

“그 꼴을 하고?”

꿈도 꾸지 말라는 단호한 대답에 머쓱해졌다. 손목에 꽂혀 있는 링거를 괜히 만지작거리는데, 옆에서 관리 본부 관계자가 급히 다가왔다.

“천사연 마스터, 죄송하지만 잠시 와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천사연이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게 무시당한 관계자가 안쓰러워진 나는 천사연의 팔을 밀었다.

“가세요. 저 혼자 좀 쉬게.”

“…금방 다녀오지.”

다시 안 와도 되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관계자의 안내를 따라 천사연이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손님이 찾아왔다.

“흐흠. 그… 한이결 능력자?”

헛기침과 함께 다가온 사람은 이주하였다. 그 뒤로 김나율도 보였다. 이 둘이 나한테 무슨 일이지.

“몸은 좀 어떠세요?”

이주하는 내게 먼저 말을 거는 이 상황이 어지간히 어색한지, 시선을 어디 한곳에 두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두 분도 별문제 없으십니까?”

“네. 저희야 뭐…….”

머뭇거리며 대답한 이주하가 숨을 푹 내쉬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헌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위험할 때 나서서 몬스터를 상대하셨다고.”

아,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도 하태헌 씨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김나율이 한 걸음 다가오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래도요. S+급 몬스터를 혼자서 막아 내신 거잖아요. 게다가 다치기도 하셨고.”

“아, 이건….”

이마에 붙어 있는 커다란 거즈를 반사적으로 가렸다. 이게, 이렇게 붙여 둘 정도로 다친 게 절대 아닌데. 천사연이 치료해 준 힐러한테 자꾸 잔소리해 대서.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스터께서도 인사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직접 오고 싶어 하셨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이해합니다.”

“나중에 같이 게이트 클리어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한 김나율은 나와 악수를 한 후, 홍시아의 곁으로 갔다. 대화하는 동안 끼어들지 않고 서 있던 이주하가 올곧은 눈빛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저도 김나율 부마스터와 같은 마음이에요. S+급 몬스터를 혼자 상대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진지한 눈빛에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며 쑥스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이주하에게 내 이미지가 좀 변한 모양이다. 뻔뻔한 납치범에서 협력을 잘하는 능력자 정도로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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