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시야가 여러 차례 번쩍이고, 아득한 정신 사이로 이루 말할 수 없을 고통이 밀려왔다.
휘둘러지는 몬스터의 손에 제대로 얻어맞은 나는 이렇다 할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삐이―, 이명과 함께 뜨겁고 질척한 것이 얼굴 위로 주룩 흘렀다. 흐릿한 시야에 빠른 속도로 내리꽂히는 검이 보였다.
콰앙!
억지로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 과정에서 미처 추스르지 못한 하태헌의 코트가 땅에 떨어졌다.
“허억, 헉….”
일어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계속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무너졌다. 디버프로 시력마저 감소했는지, 눈앞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쿠궁! 쿵!
간발의 차로 피한 공격의 여파로 몸이 붕 떠올라 땅바닥을 굴렀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힘겹게 눈을 떠 나무를 태우는 불꽃과 새까만 연기 속에 서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바라봤다.
“하아…….”
식은땀을 닦아 내며 겨우 몸을 바로 세우고, 녹슨 것처럼 삐걱거리는 기운을 억지로 움직였다. 휘잉, 손에서 시작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점점 주변에 퍼져 나갔다. 벼락으로 인해 생겨난 불이 바람을 타고 몸집을 부풀렸다.
쉽게 당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공격이 통하지 않은 상대로는, 이마저도 쓸데없는 짓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계속 그래 왔으니까 새삼 놀라울 것도 없네.’
아무리 쓸데없다 해도 손 놓고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하태헌을 바라봤다. 그가 촉수 앞으로 다가가 검을 들었다. 그 순간에 맞춰 공중으로 뛰쳐 올랐다.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한 기운이 불안정하게 비틀렸다. 고통을 참아 내며 아까처럼 나무를 바람으로 들어 올려 몬스터에게 날렸다. 콰직, 몬스터의 몸에 부딪힌 나무가 산산조각이 났다.
키에에에엑!
몬스터가 짜증스럽게 울어 댔다. 나는 몬스터가 지하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계속해서 나무를 던져 댔다.
“아악!”
콰르릉! 바로 뒤에 벼락이 꽂히며 등에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었다. 고통에 몸을 움츠리는 찰나, 몬스터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큭, 으윽…!”
기다랗고 딱딱한 몬스터의 손이 온몸을 칭칭 둘러 감았다. 그 상태로 몬스터 가까이 끌려가자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짙은 악취가 맡아졌다.
나를 들어 올린 몬스터가 얼굴 살점을 벌렸다. 검은 액체에 잔뜩 젖은 네 갈래의 얼굴 살점에는, 기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미세한 바늘 수백 개가 돋아 있었다. 발아래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능력도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몬스터의 단단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으, 흑.”
점점 가까워지는 몬스터의 얼굴에 공포감이 이성을 잠식했다. 쿵! 쿵!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식은땀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다리부터 그대로 삼켜지려던 그 순간.
키아아아악―!
갑자기 몬스터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거울을 확인한 나는 촉수를 무참히 잘라 내는 하태헌을 발견했다. 몬스터가 중심을 잃고 몸을 크게 비틀거렸다. 내 몸도 그에 맞춰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정신을 놓을 만큼 온몸에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하태헌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알에 꽂혀 있던 수많은 촉수가 단번에 잘려 나가자 몬스터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등급이…!’
떨어지고 있다. 몬스터와 가까이 있던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온몸을 압박하고 있는 몬스터의 손아귀 힘도, 느껴지는 공포감도 방금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태헌이 마지막 남은 촉수까지 깔끔하게 정리하자, 몬스터가 얼굴에서 검은 피를 왈칵 쏟아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반신에 달린 촉수들은 하태헌의 공격으로 모조리 잘려 나간 채 단면을 보이며 꿈틀거렸다.
그 틈에 몬스터의 손에서 몸을 반절 꺼내 능력을 사용했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물론 등급이 떨어졌다 해도 상대는 S급.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삐걱거리는 기운을 움직여 미리 한군데 모아 둔 거대한 불을 바람으로 끌어왔다. 뜨거운 불이 바람을 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발아래로 보이는 불이란 불은 모조리 끌어와 몬스터를 향해 쏟아부었다.
S+급 벼락으로 생겨난 불이었다. S급으로 등급이 하락한 몬스터 상대로 충분히 통할 것이다.
쿠륵, 꿀럭, 쿠르럭…!
내 예상대로 온몸에 불이 붙은 몬스터가 검은 액체를 쏟아 내며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손아귀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겨우 빠져나온 나는 흙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헉….”
눈앞에 온몸이 불에 집어삼켜져 타오르고 있는 몬스터가 보였다. 검은 연기가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겨우겨우 움직임을 보였던 기운이 다시 굳어 가고, 몸이 뻣뻣해졌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겨우겨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꼴, 좋다… 이 새끼, 야.”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몬스터를 비웃으며 눈을 감았다. 상체가 옆으로 쓰러졌다.
***
으흠, 흠. 부드러운 허밍이 어두운 복도에 찬찬히 울렸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산책 나온 것처럼 느긋이 걷던 천사연의 앞에 굳게 닫힌 문이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나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끼이익. 녹슨 쇳소리가 울리는 문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간 천사연이 기다란 장검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흐음.”
넓게 펼쳐진 방의 정체는 서재였다. 다만 책장마다 빽빽이 들어찬 것은 책이 아닌 인형이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액세서리로 꾸며진 구체관절인형 수백 개가 촛불에 번들거리며 빛났다.
“아, 어쩐지 기분이 좆같더라니…….”
천사연은 차분하게 지나간 시간을 셈했다. 그래. 이 짜증 나도록 지겨운 순간이 또 왔다.
키득.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키득. 키득.
한번 시작한 웃음이 서재 가득 퍼져 나갔다. 끼기긱!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인형의 얼굴이 천사연을 향해 동시에 비틀렸다. 서재 첫 번째 책장, 두 번째 줄 가운데에 있는 노란 금발의 인형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를 보고 놀라지 않네.”
다른 인형이 말을 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비명을 지를 텐데.”
“뭐지? 뭐지?”
“재미없어.”
“난 재밌어.”
“흥미로워.”
“재수 없어! 죽여 버리자!”
“조심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죽여! 씹새끼!”
서재 안이 인형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게 차올랐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천사연이 빙긋 웃었다.
“아벨.”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인형들이 고개를 달각달각 움직였다.
“내 이름을 알아.”
“어떻게? 어떻게?”
“저 더러운 입으로 나를 불렀어!”
“진정해. 신께서 말씀하셨잖아. 우리를 알고 있을 거라고.”
“불길해. 죽이고 싶어.”
“죽일까? 죽여도 돼?”
인형의 대화를 들으며 천사연이 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익숙한 고통이 뒤따르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질척하고 새빨간 피에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파티장부터 이 게이트까지, 재미있는 걸 만들어 냈네. 덕분에 눈치 못 챘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릴 기세로 불이 치솟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인형 하나가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뜨거워! 뜨거워!”
“멍청한 너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할 계획이고…. 그래. 사마엘이 움직였군.”
끄르륵. 끄륵.
결국 인형 하나가 녹아내렸다. 기괴하게 흘러내린 얼굴 사이로 눈알이 데굴 굴렀다.
투두둑. 투둑.
책장에서 일제히 떨어진 인형이 녹아내리는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와 천사연의 다리에 매달렸다.
“죽이자! 죽이자!”
“목에 칼을 꽂아 넣어!”
천사연이 달라붙어 오는 인형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인형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약하기 그지없다. 아벨이 자주 사용하는 정찰용 인형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사마엘의 역겨운 가면을 떠올리던 천사연은 불쾌한 숨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아아악! 아악!”
“아파! 아파! 아파!”
“죽여! 죽여 버려!”
“살인자! 살인자! 죽어!”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살점 찢어지는 소리나 튀어 오르는 새빨간 피가 사람을 베어 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저주했다.
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인형 손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그 위를 날카로운 검날이 망설임 없이 지나간다. 뚝 잘린 단면에서 빨간 피가 쏟아졌다.
서재 안이 순식간의 지옥으로 변했다. 어린아이의 비명이 가득 채워지고, 피가 튀어 오르며, 불이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무료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천사연은 이 모든 일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목적이 아니군.”
어쩐지 갈림길에서 왼쪽이 유난히 거슬리길래 와 봤더니. 사마엘이 깔아 둔 교묘한 덫에 걸린 것이다.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한이결과 하태헌을 떠올렸다. 하태헌 혼자라면 모를까, 한이결도 함께 있으니 순순히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 아….”
“그윽… 긱…….”
끄륵. 꾸륵.
바닥에 흩어진 인형의 신체 조각이 불에 모조리 먹혔다. 피 냄새가 가득한 서재를 뒤로하고 천사연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인형의 피로 잔뜩 더러워졌다.
되돌아온 갈림길은 텅 비어 있었다. 헤어지기 전, 위험시에는 돌아오라고 분명 말해 뒀는데.
‘돌아올 만큼 위험한 일이 없거나, 아니면 도망칠 틈도 없을 만큼 급한 상황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천사연은 아까처럼 가벼운 허밍을 흥얼거리며 한이결과 하태헌이 들어갔던 오른쪽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보다 더 길고 지루한 복도를 지나 그 끝에 다다랐다.
“이런.”
넓게 펼쳐진 눈앞의 광경에 천사연이 입꼬리를 유려하게 끌어 올렸다. 온몸이 탄 채로 죽어 있는 거대한 몬스터의 시체가 보였다. 하태헌의 작품은 아니었다.
‘한이결이 능력으로 불을 끌어와 죽였군.’
대충 둘러만 봐도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눈에 훤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잔뜩 무너지고 망가진 주변을 설렁설렁 걸어가며 근처를 둘러보던 천사연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작은 몸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두 눈을 꾹 감은 채 기절해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힘든 전투를 치렀는지, 잔뜩 엉망이 된 채로 누워 있는 꼴이 어쩐지 웃겼다. 버림받은 동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이결.”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지만, 서재에서와는 다르게 불쾌함이 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