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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78)화 (78/394)
  • 78화

      

    합의가 끝나자, 하태헌은 홍시아가 안전하게 지하 입구에 다다를 수 있도록 몬스터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까다롭다.’

    몬스터 코앞까지 다가가 검을 휘두르면서도, 쉽사리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는 하태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몬스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가 붙잡힌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내가 눈치챈 하태헌의 움직임을 홍시아가 몰라볼 리 없었다.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로 몬스터를 상대하던 홍시아가 몬스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자리를 이동했다.

    크으아아악!

    하태헌과 홍시아가 번갈아 가면서 건드려 대자 몬스터가 분노 어린 소리를 내지르며 두 팔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한층 거칠어진 움직임에 홍시아가 재빨리 몬스터의 시선에서 벗어나 아래로 이동했다.

    망설임 없이 계단 앞까지 날아간 홍시아가 나와 하태헌을 돌아보며 조심하라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능력을 회수했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땅에 착지한 홍시아는 몬스터가 눈치채기 직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홍시아가 안전하게 지하로 내려간 것만으로도 작전의 반절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버티느냐인데…….’

    홍시아가 촉수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몬스터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때까지 몬스터를 계속 상대해야 한다.

    몬스터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하태헌을 불렀다.

    “하태헌 씨, 저랑 같이 움직여요!”

    홍시아도 없으니, 하던 대로 하태헌에게 안겨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내 외침에 하태헌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공중에 떠 있는 터라 평소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하태헌에게 안기기 위해 올려다보며 두 팔을 뻗었다.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붙잡으려던 하태헌이 순간 묘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

    “하태헌 씨?”

    갑자기 왜 이래? 끌어당겨 주지 않는 하태헌을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꾹 다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뭡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다.”

    머뭇거린 게 이상할 만큼, 하태헌이 내 몸을 단호하게 끌어안았다. 팔로 하태헌의 목덜미를 감싸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공격은 못 하니까, 피하기 쉽게 해 줄게요.”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도록 바람의 강도를 높였다. 하아아악! 몬스터가 울부짖자 아까처럼 벼락이 여기저기에서 내리꽂혔다.

    벼락이 꽂힌 나무에서 불이 치솟으며 새까만 연기가 올라왔다. 아래는 벼락을 맞아 타오르는 나무로 가득 찼다.

    키이이익!

    몬스터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갈라진 얼굴을 꽃잎처럼 쫘악 펼쳤다. 그러더니 손을 중앙에 집어넣었다.

    꿀럭, 꿀럭.

    제 손을 깊게 삼킨 몬스터의 얼굴에서 이상한 액체가 울컥 쏟아졌다. 그 징그러운 광경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몬스터가 천천히 손을 꺼냈다. 검은 액체에 질척하게 절여 나온 것은 새로운 검이었다.

    부서졌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검을 꺼내 든 몬스터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후웅, 머리 위를 지나가는 거대한 검을 피해 날며 하태헌에게 말했다.

    “아까처럼 검은 부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검을 드니 몬스터의 공격 반경이 굉장히 넓어졌다. 단순히 팔을 휘두르는 것 이상으로 패턴도 다양해져서 피하는 게 까다로워졌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태헌이 옆으로 들어오는 검을 막아 냈다. 끼이익, 검날이 부딪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역한 냄새가 확 풍겼다.

    “우욱…….”

    몬스터 검에 묻어 있는 액체가 원인이었다. 홍시아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던 몬스터의 피, 디버프 능력이다.

    눈앞이 흐려지고 현기증이 일며, 기운이 크게 흔들렸다.

    “한이결!”

    바람이 잠깐 끊기자 나와 하태헌의 몸이 훅 떨어졌다. 급히 다시 능력을 사용했지만 아까처럼 강한 바람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죄, 송…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코트로 계속 가리고 있어.”

    혀가 딱딱하게 굳어 발음이 뭉개졌다. 어물어물 사과하며 하태헌의 말대로 코트 소매를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몬스터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은 액체가 근처로 튈 때마다 피부에 바늘이 꽂히는 것처럼 따끔한 고통이 지속됐다.

    “하, 태헌 씨.”

    조금 풀린 혀를 움직이며 거울을 가리켰다. 참석자들을 비추고 있는 거울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 홍시아였다.

    “지하가 맞았나 보군.”

    “다행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홍시아가 참석자들에게 꽂혀 있는 촉수를 잘라 내 주기만 한다면 곧바로 몬스터를…….

    끼이이이익―!

    그때였다. 홍시아가 거울에 비치자, 몬스터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거칠게 울부짖으며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쩌억, 네 갈래의 찢어진 얼굴이 활짝 펼쳐지고 온몸이 새까맣게 변했다.

    “이게 무슨…!”

    몬스터의 피부를 타고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간 검은빛이 촉수까지 변화시켰다. 불투명했던 촉수 안에 새까만 액체가 부글부글 차오르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룩거렸다.

    오싹한 공포에 반사적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이쪽 상황을 모르는 홍시아가 촉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곧이어 망설임 없이 휘둘러지는 채찍에 나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안 돼!”

    새빨간 채찍이 촉수를 가로지르자 잘린 촉수에서 새까만 액체가 콸콸 쏟아졌다. 코앞에서 액체를 마주한 홍시아가 몸을 뒤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벼락을 피하며 거울을 보고 있던 하태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잘린 촉수에서 불투명한 액체가 기절한 홍시아 위로 뚝 떨어졌다. 물방울처럼 홍시아를 감싼 그것은 둥근 알 모양으로 변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홍시아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최악이군.”

    하태헌이 몬스터의 검을 쳐 내며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꾹 감으며 기침을 뱉어 냈다.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코트로 입과 코를 막는다고 해도 디버프 능력을 모조리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시간 능력을 쓰면서 기운까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손목 위 팔찌의 진동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홍시아까지 붙잡혀 버린 지금, 나와 하태헌 둘이서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천사연을 데려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사이에 알에 갇힌 이들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태헌 씨.”

    그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이번에는 하태헌 씨가 지하로 내려가 주세요.”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었는지, 하태헌의 대답은 빨랐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S+급이다. 너 혼자 버틸 수 없어.”

    “아뇨,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나는 심장을 매만졌다. 몬스터가 가진 디버프 능력으로 인해 심장을 감싼 기운이 뻣뻣하고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계속 버텨 봤자 상황만 나빠집니다. 아무도 구해 내지 못하고 결국엔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검이 스쳐 지나갔다. 하태헌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하태헌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참석자들과 나를 저울에 올려 두고 누가 더 중요한지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하태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내 몸을 띄우자 기운이 두 배로 소모되며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가세요. 하태헌 씨가 정말 절 걱정하신다면, 지금 할 일은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구해 주고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날 응시하던 하태헌이 시선을 돌려 거울 속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은 채로 알 속에 갇혀 버린 홍시아와 김나율, 마지막으로 이주하까지 확인한 그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고 바로 오겠다.”

    그래. 이래야 주인공이지.

    나는 진심으로 안심하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제가 도망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요. 무조건 버틸 테니까, 믿고 다녀오세요.”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하태헌이 곧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 그가 뒤에 있는 지하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몬스터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아야 했다.

    위로 높게 올라가 몬스터의 정면에 섰다. 우리가 둘로 나뉘자 혼란스러운 것처럼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몬스터가 날 발견하고는 경계하듯 날카롭게 울었다.

    하아아악!

    짙게 웃으며 기운을 한 번 더 끌어 올렸다. 땅을 가득 채운 쓰러진 나무들이 내가 있는 곳까지 떠올랐다.

    하태헌은 몬스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공격을 못 했지만, 나는 상황이 다르다. A급인 내 능력으로는 백날 공격해 봤자 S+급 몬스터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 좋았다. 상처 없이, 시선만 잡아끌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자~ 여기 보세요.”

    띄워 올린 나무들을 몬스터에게 집어 던졌다. 갑자기 나무에 얻어맞게 된 몬스터가 짜증스럽게 포효했다. 나를 낚아채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몬스터의 손을 피하며 이번에는 바람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공격했다. 역시나 정통으로 맞춰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지금 내 모습은 비유하자면 모기 정도는 될까. 최대한 넓은 공간을 활용해서 공격을 차분히 피했다. 후웅, 귓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몬스터의 검에 머리카락이 살짝 잘려 나갔다.

    “으윽!”

    검에서 풍기는 악취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숙여 다음 공격을 피했다. 그사이, 안전하게 몬스터 뒤로 이동한 하태헌이 지하로 들어갔다.

    하태헌이 무사히 지하로 내려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둘러놓은 바람을 곧바로 끊어 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좀 틔었다.

    키에에에엑!

    하태헌이 지하로 내려간 것을 알아챘는지, 몬스터가 아까처럼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후우,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S+급의 디버프 능력은 SS급인 하태헌에게 통하지 않으니까.

    역시 그를 보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몬스터가 이번에는 허리를 뒤로 꺾으며 갈라진 얼굴 살점을 최대한 벌렸다. 그 행동에 불길한 감각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서둘러 뒤로 몸을 빼려던 그 순간, 몬스터가 얼굴에서 짙은 연기를 뿜어냈다.

    “…컥, 쿨럭!”

    엄청난 속도로 배출된 새까만 연기가 주변에 가득 퍼져 나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연기 속에 갇혀 버린 나는 목구멍으로 치솟은 기침을 뱉어 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몸에 감각이 붕 떴다. 가득 들이마신 디버프 연기에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능력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았다.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돌려 빠르게 다가오는 몬스터의 손을 바라봤다.

    “아, 이거…….”

    좆 됐는데.

    뻐억, 골을 흔드는 강한 충격과 동시에 눈앞이 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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