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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76)화 (76/394)

76화 

선택하긴 뭘 선택해? 갑작스러운 말에 멀뚱히 천사연을 바라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하태헌을 번갈아 가리키며 웃었다.

“같이 갈 사람을 골라야지.”

“…그걸 제가 왜 고릅니까?”

“A급인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나. 물론 등급을 제외하더라도 하태헌은 나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을 텐데?”

천사연의 말에 하태헌을 돌아보자, 그가 뭘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제가 고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저는 누구와 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다는 듯 눈썹을 살짝 내린 천사연이 곧이어 검을 하태헌에게 겨누었다.

“한이결이 선택하지 않으니 우리끼리 결판을 지어야겠군, 하태헌.”

“뭐라고요?”

황당한 결론에 어이가 없어지는데, 하태헌은 거절은커녕 바라던 바라는 듯이 능력으로 만들어 낸 검을 쥐었다.

이 미친놈들이 뭘 하려는 거야?

“진짜 아까부터 두 분 다 왜 이럽니까? 이 상황에서 왜 싸워요, 대체!”

“우리 둘이 싸우는 게 싫은 거면 고르면 되지 않나.”

“그냥 안 싸우면 되는 거잖습니까…….”

나는 피곤이 몰려와 이마를 짚었다. 천사연이나 하태헌이나, 묘하게 비슷한 놈들끼리 붙어 있으니까 나만 고생이었다.

저 둘이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아까의 내가 멍청했다. 이제 보니 이 자식들은 기회만 되면 한판 뜰 의지가 차고 넘쳤다.

평소라면 이성적으로 상황을 고려할 하태헌도 이상하게 천사연이 엮이면 감정적으로 변한다니까.

서로를 노려보는 천사연과 하태헌 사이로 따끔거리는 기운이 풀풀 풍겼다. 이놈들 진심인가 봐. 상황을 지켜보며 눈치만 살피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고를게요.”

내 결정에 천사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왜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된 거야….’

천사연과 하태헌을 두고 고르기보다, 복도 끝에 보이는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보며 고민했다.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하태헌 씨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내 선택이 예상외였던 듯, 하태헌이 날 바라봤다. 반면 천사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흐음.”

잠시간의 정적 후,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날 선택하지 않다니. 지난날 우리가 함께했던 좋은 기억은 나만 갖고 있나 보군.”

“헛소리하지 마시고요.”

천사연은 처음부터 내 선택을 알아챘을 것이다. 나와 천사연은 어차피 협력 관계니, 같은 곳을 가기보다는 갈라지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더 많아질 테니까.

눈꼬리를 휘며 웃은 천사연이 왼쪽 문을 가리켰다.

“그럼 난 이쪽 길을 혼자 가 보도록 하지.”

“네.”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겠지만 어쩔 수 없군…….”

“…….”

“나는 선택받지 못했으니까…….”

“그만하시죠.”

눈가를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이유가 이거였다. 천사연이라면 선택받지 못한 그 순간부터 놀려 댈 게 뻔했다.

만족할 만큼 놀렸는지 천사연이 본론을 꺼냈다.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규칙을 정해 놓고 가는 게 좋겠군.”

게이트 내부에서는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흩어지면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말뜻을 알아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다시 여기 갈림길에서 모이기로 하지. 위험시에는 뒤로 빠지고.”

“알겠습니다. 그쪽도 무리하지 마세요.”

아무리 천사연이라 해도 처음 오는 게이트 내부를 혼자 돌아다니는 상황은 좀 걱정스러웠다. 내 말에 천사연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나랑 가 주든가.”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 자식이….

“먼저 출발하시죠.”

꺼져 달라는 의미를 담아 왼쪽 문을 정중히 가리켰다. 내 반응이 웃기는지 큭큭 웃음을 흘린 천사연이 왼쪽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음, 우리도 갈까요.”

입만 열었다 하면 헛소리를 늘어놓는 천사연이 사라지자마자 귀신같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약간 머쓱함을 담아 하태헌에게 오른쪽 문으로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이 좀 더 어두워졌다. 나와 하태헌은 아무런 대화 없이 복도를 걸었다.

아까 하태헌이 먼저 허리를 안아 올 때는 좀 친해진 건가 생각했는데, 단둘이 남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그… 하태헌 씨. 제가….”

“오늘 파티.”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데, 하태헌이 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설마 올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천사연 마스터의 파트너로.”

말투가 평소보다 더 딱딱해서 그런가, 어째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긴. 자신을 돕겠다던 놈이 라이벌과 팔짱 끼고 파티에 나타난 상황 아닌가. 나 같아도 기분 나쁠 거 같긴 하다.

“사정이 좀 있어서요.”

레퀴엠에 소속된 김우진의 얘기를 하태헌에게 해 줄 수는 없는 터라 슬쩍 얼버무렸다. 무엇보다 천사연과의 거래 내용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내 성의 없는 대답이 거슬렸는지, 하태헌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예?”

“설마 이번에 벌어진 일도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

무슨…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했으면 이렇게 당했겠습니까?”

“모르지. 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남들을 속여 넘기는 놈이니까.”

어느새 하태헌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쏘아지는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제가 하태헌 씨에게 신뢰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는 않아요.”

“쓸데없는 짓?”

“제가 이번 일과 연관돼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상한 억측하지 마세요.”

짜증을 담아 말하자 하태헌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억울하면 제대로 설명해 봐라. 벗어나고 싶다던 천사연과 함께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뭔지.”

하태헌은 내가 게이트 이상 현상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무소속이라 더 이상해 보일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하태헌 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하태헌이 그것 보라는 듯, 비웃음을 담아 날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리어 묻고 싶어졌다.

“제가 의심스러운 놈인 거 이해하는데요.”

“…….”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면, 믿을 마음은 있습니까?”

어째 하태헌이 아닌 나한테 상처 되는 말 같은데, 이거.

“아니잖아요. 어차피 설명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상대에게 왜 설명해야 합니까?"

“그럼.”

조용히 내 말을 듣던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는다면 말해 줄 건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과 달리,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극히 담백했다.

“대답해, 한이결.”

“…….”

“말해 줄 거냐고.”

“…저도 믿어 준다는 확신 없이는 말하기 싫습니다.”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렇게 보면 나와 하태헌은 닮은 구석이 참 많았다. 지난한 삶이 상대방을 쉽게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태헌은 아무 대답 없이 날 응시했다. 뭐라고 반응해 올까 싶어 긴장하는데, 그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내 뒤를 바라봤다.

“하태헌 씨?”

“조용히.”

하태헌이 어둠으로 가득한 복도 정면을 신중히 바라봤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뭔가 들리는 겁니까?”

A급인 내게는 들려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SS급인 그는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다. 내 질문에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확실치는 않아. 아마 전투 중인 것 같군.”

전투 중이라면, 몬스터뿐만 아니라 사람도 있다는 건가? 혹여 위험한 상황일 수 있다. 나는 횃불을 버리고 하태헌에게 바싹 붙어 말했다.

“바로 가죠.”

굳이 설명이 없어도 말뜻을 알아챈 하태헌이 몸을 끌어안았다. 바람으로 하태헌을 감싼 나는 속도를 높여 복도를 가로질러 날았다.

쿠우웅!

복도 끝에 가까워지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하태헌 씨, 여기…….”

복도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도저히 지하라고 생각할 수 없는, 흙바닥 위에 침엽수가 가득한 숲이 보였다. 복도와 달리 이곳은 새하얀 빛으로 밝았지만, 공기 중에 보랏빛 가루가 가득 날아다니고 짙은 안개가 퍼져 있었다.

“윽…!”

그때, 피부가 바늘에 찔린 듯이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날아다니는 저 가루가 몬스터의 능력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자, 하태헌이 인벤토리에서 SS급 코트를 꺼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하태헌 입으라고 구해 준 건데 어째 내가 더 많이 입네.’

코트를 감사히 받아 입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거대한 인간형 몬스터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타 버린 성냥처럼 둥글고 새까만 머리와 뼈대만 남은 기다란 두 팔. 하반신은 해파리처럼 불투명한 촉수들이 땅에 박혀 있고, 손에는 여러 갈래로 뾰족이 돋아난 검이 들려 있었다.

그중,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몬스터 뒤로 보이는 원형의 거울이었다. 거울은 허공에 뜬 채로 마치 태양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뭐야. 하태헌 마스터?”

시야를 가리는 안개와 독 가루를 헤치고 홍시아가 나타났다. 눈앞의 몬스터와 한바탕했는지, 숨이 약간 거칠었다.

나와 하태헌을 발견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한이결 능력자까지 있잖아? 둘 다 방금 도착했나 보네?”

“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하태헌의 품에서 나오며 묻자, 홍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이주하 마스터와 같이 있었는데…. 실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이주하가 있었다는 말에 하태헌이 나섰다.

“저 몬스터의 능력 중 하나야. 바닥에 무작위로 검은 구멍이 나타나는데, 그걸 밟으면 순식간에 사라져.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단순한 공간 이동 능력인 것 같긴 한데.”

“어디로 이동됐는지는 모릅니까?”

홍시아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방 안을 최대한 뛰어다니면서 살펴보니까 몬스터 뒤쪽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거든? 거기가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이주하 마스터뿐만 아니라 다른 파티 참석자들도 그곳에 있겠군요.”

“그렇지.”

나는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몬스터를 바라봤다. 손끝을 저리는 익숙한 공포감. S+급인 게 확실했다.

“그런데 둘뿐이야? 오면서 다른 사람 못 봤어?”

“천사연 마스터도 같이 있었습니다. 오다가 갈림길에서 팀을 나눴어요.”

“아, 거기. 나도 오면서 봤어. 그럼 지금은 우리 셋이서 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거네?”

홍시아가 가죽 채찍을 힘주어 잡으며 싱긋 웃었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손에 들린 핏빛 채찍은 상당히 흉흉했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몬스터는 S+급. S급인 홍시아와 SS급인 하태헌의 조합이면 충분히 잡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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