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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75)화 (75/394)
  • 75화 

    찝찝한 표정으로 내려온 내게 하태헌이 물었다.

    “어떻지?”

    “일단 북쪽 끝에 건물 하나를 발견하긴 했는데요.”

    저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눈동자만 굴리는 내게 하태헌과 천사연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건물이 생긴 게 좀 특이해서요. 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생겼습니다.”

    “동화 속 성이라.”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듯, 천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 세고비아에 있는 알카사르성 같은 건축물을 말하는가 보군.”

    “스페인 세고… 뭐요?”

    “세고비아에 있는 알카사르성. 여러 동화의 영감이 되어 준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지.”

    다시 들어 봐도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떨떠름한 나를 대신해서 하태헌이 대답했다.

    “국내에 그런 건축물이 발견된 게이트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내 기억으로도 없군. 최악의 경우, 해외 게이트도 염두에 둬야겠지. 일단은 북쪽으로 가 보는 게 좋겠어.”

    나는 잠시 넋 놓고 천사연과 하태헌이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뭐야. 서로 정상적으로 대화하잖아?’

    좀 더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릴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럴 상황이 아니긴 했다. 사이 나쁜 박건호와 우서혁도 게이트 내에서는 어느 정도 서로 협력을 하지 않나. 이 둘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는 한시름 덜며 둘에게 말했다.

    “다 같이 제 능력으로 날아가죠. 그게 더 빠르니까.”

    그 순간, 천사연과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 반사적으로 주춤 뒷걸음질 치는데, 하태헌이 먼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확실히, 그게 좋겠군.”

    “어….”

    나는 가까이 다가온 하태헌을 놀라서 바라봤다. 전투 중이 아닌 상황에서 하태헌이 먼저 내 허리를 안아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기쁜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조금은… 친해졌다고 봐도 되는 건가, 이거?’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괜히 헛기침하며 능력을 쓰려는데, 이번엔 뒤에서 어깨와 목이 한쪽 팔에 감싸졌다.

    “…뭡니까?”

    “그쪽보다는 이쪽 품이 더 익숙할 텐데.”

    “…….”

    뒤에 선 천사연이 날 내려다보며 살살 눈웃음을 쳤다. 하태헌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음.”

    원치 않게 앞뒤로 둘러싸여 버렸다. 이런 이상한 자세로는 날다가 한 명 떨어트릴 것 같은데.

    “이거 자세가…….”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모르는군. 이것도 많이 양보해 준 건데. 이결이는 아예 품 안에 안기는 걸 좋아해서.”

    천사연도 웃으며 받아쳤다. 이놈들이 지금 뭐 하는 거지?

    “두 분 다 그만하시죠.”

    대화가 왜 이따위야. 나는 서늘한 표정의 하태헌과 웃고 있으나 목소리가 딱딱한 천사연을 힘주어 밀어냈다.

    “어차피 이런 자세로는 능력 못 쓰니까 좀 떨어져요. 그냥 손만 잡아도 충분합니다.”

    “흠. 신체 접촉 없이 따로 떨어져서 가는 건 어떻지?”

    “그건 조금… 힘을 나눠야 하는데 집중력이 떨어지면 계속 이동하긴 위험해서요. 둘까지는 괜찮아도 셋은 힘듭니다.”

    “둘로 나누는 건 괜찮다니, 나쁘지 않군. 내게 안긴 상태로 하태헌만 띄우면 되겠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제안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 자식이 진짜.

    “아니, 그냥 셋이서 손잡고 가면 된다니까요?”

    “편하게 안겨 가면 좋지 않나?”

    “안 좋습니다.”

    잠시간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하태헌이 입을 뗐다.

    “원한다면 업어 주겠다.”

    “…천사연 마스터의 제안과 뭐가 다릅니까?”

    하태헌 너마저 이럴래? 한숨을 내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저 혼자 갑니다. 손만 잡고 가든가, 둘이서 사이좋게 뛰어오든가. 둘 중 하나 하시죠.”

    “매정하긴.”

    “…….”

    붙어 있는 몸을 떼어 내며 손을 내밀자, 둘 다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잡아 왔다. 왼손은 천사연이, 오른손은 하태헌이 차지했다. 그래도 두 명 다 뛰어오긴 싫은가 보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날렸다는 생각에 지체할 것 없이 능력을 사용해서 몸을 띄웠다.

    ***

    숲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하자, 아까 발견했던 성이 나타났다. 거대한 성문 앞에 내려온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생각보다 크네요.”

    적의 침입을 막는 높다란 성벽과 길고 뾰족한 지붕으로 된 내부 건물.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보던 왕성 자체였다.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성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로 살짝 열려 있는 성문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지나갔군.”

    “우리도 들어가 보죠.”

    성문 가까이 다가간 나는 혹시나 해서 성문을 밀어 봤다. 크기에 비해 손쉽게 밀렸다. 내가 밀어낼 정도라면, 웬만한 파티 참석자들도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 말고도 이쪽으로 온 참석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게이트 내부가 그리 넓어 보이진 않았으니 확실히.”

    천사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서 봤을 때 이곳을 제외하면 딱히 있는 것도 없었다. 우리처럼 숲으로 떨어진 다른 이들이 성으로 모여들 가능성이 컸다.

    성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널따란 정원이 드러났다. 수풀이 관리되지 않아 무릎까지 올라왔고, 중앙에 세워진 분수대는 잔뜩 깨지고 지저분한 것이 묻어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바스락. 바스락.

    무성하게 자란 수풀과 나뭇잎을 치우며 앞으로 나아간 우리는 문양이 새겨진 성의 입구를 발견했다. 삼각형 가운데에 동그라미가 새겨진 독특한 생김새의 문양이었다.

    나는 찝찝함에 얼굴을 찌푸리며 한탄했다.

    “이런 문양을 발견할 때마다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게이트일수록 문양도 자주 발견되긴 했지.”

    “이곳이 게이트인 건 확실해졌네요.”

    “그래.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기대되는군.”

    “별걸 다 기대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몬스터들의 등급이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했던 N23 구역 게이트에서도 이런 문양을 발견했었지.

    입을 벌린 해골과 그 주변을 감싼 검은 연기. 원래도 있었냐는 내 질문에 박건호는 처음 보는 거라고 대답했었다.

    ‘그 문양을 발견하고 나서, 지금껏 본 적 없던 기운을 흡수하는 몬스터가 나타났었고.’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게이트마다 발견되는 문양이, 어떠한 힌트라도 되는 걸까.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양만 노려보자, 천사연이 정신 차리라는 듯 문양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어.”

    “…역시 그렇겠죠.”

    한숨을 내쉬며 문양이 새겨진 문을 힘껏 밀었다. 쿠구궁, 문을 반쯤 가리고 있던 나무 덩굴이 후드득 떨어지며 성 내부가 드러났다.

    “의외로 깔끔한데요.”

    정원이 워낙에 관리가 안 되어 있어서 내부도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드러난 넓은 홀은 누군가 청소한 것처럼 깨끗했다. 홀 가장 안쪽으로 걸어간 우리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에 가득 쌓인 돌무더기를 검으로 툭툭 두드린 천사연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올라가는 길은 막혀 있군.”

    “지하부터 가 봐야겠네요.”

    그 말에 대답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살펴봤다. 위험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주변을 밝힐 만한 건 필요해 보였다.

    “횃불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내 능력이 있는데 굳이.”

    “타 죽을 일 있습니까?"

    불 밝히는 용도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질척거리고 뜨겁잖아. 뒤를 가로막은 채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천사연을 밀쳐 내며 홀 중앙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다행히 구석에 낡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콰직!

    능력으로 망설임 없이 테이블을 부순 나는 한 손으로 쥘 만한 테이블 다리를 챙겼다. 테이블 다리를 들고 하태헌을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역시 척하면 척이라니까.

    D8 구역 게이트에서 했던 것처럼, 테이블 다리에 불을 붙이고 바람으로 한번 휘감자 쓸 만한 횃불이 탄생했다.

    “갈까요?”

    횃불을 든 김에 앞장서서 내려갔다. 지하답게 습한 공기와 먼지 쌓인 돌 내음이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넓은 지하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층보다 확연히 붉어진 벽과 틈새에 자라난 검은 이끼 사이로,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보였다.

    “발자국이 있는 걸 보면 누가 왔거나 몬스터가 등장한다는 건데…. 깊게 내려온 것치고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 게 이상하네요.”

    일반적인 게이트라면 몬스터가 등장해도 진작에 등장해야 할 텐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클리어한 지 얼마 안 된 게이트거나, 제대로 만들어진 게이트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군.”

    “등급 외 게이트를 말하는 건가.”

    천사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을 얹으며 지하 내부를 둘러봤다.

    등급 외 게이트. 소설에서도 나왔던 게이트다. 몬스터가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는 텅 빈 게이트로, 아직 국내에는 발견되지 않은 게이트였다.

    “미국에서는 등급 외 게이트를 능력자 훈련용으로 개조시키는 연구가 한창이더군.”

    “능력자 훈련용이요?”

    “게이트 내부는 아무리 부서지고 무너져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본래 모습으로 복구되니까. 등급 외 게이트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으니, 활용 가능성이 더 다양하겠지.”

    “확실히 나쁘지 않네요.”

    등급 외 게이트가 없는 한국 같은 경우는 C급이나 D급 같은 최하위 등급 게이트를 막 각성한 공격형 능력자들의 훈련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도 등급 외 게이트가 나와 주면 좋을 텐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훈련이니 몬스터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하겠지만, 훈련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테니 말이다. 등급 외 게이트가 떠서 훈련할 장소가 많아진다면 많은 능력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는 등급 외 게이트인 걸까요?”

    내 의문에 천사연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우리는 계단을 내려왔던 시간과 비슷할 정도로 꽤 오래 걸었다. 방이라고 생각했던 지하 공간은 알고 보니 넓은 복도였고, 정면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잠시만요.”

    화르륵.

    무언가를 발견한 내가 팔을 뻗어 횃불로 앞을 비췄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갈림길이군.”

    복도 끝에 다다르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과 오른쪽.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떡할까요?”

    우리의 선택지도 두 가지로 갈렸다. 지금처럼 세 명이 움직일 것인가, 둘로 찢어질 것인가.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툭툭 움직이던 천사연이 하태헌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여기서 나뉘는 편이 좋겠군.”

    “전 상관없습니다.”

    하태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럼 한이결.”

    “예?”

    “선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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