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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73)화 (73/394)
  • 73화

    19. 그 파티를 조심하세요

    천사연이 이주하 뒤에 서 있는 하태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축하 인사가 늦었군. 부마스터가 됐다지?”

    “감사합니다.”

    하태헌은 건조한 말투로 대답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 싸늘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어쩐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천사연을 만나서 그런 건가. 그렇게 불편함만 남긴 인사가 끝나고 우리는 테이블에 착석했다.

    “…….”

    제이나 길드와 블런 길드가 오지 않은 상황이라 넷만 자리한 서울 지역은 다른 테이블에 비해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계속됐다.

    ‘불편해…….’

    괜히 테이블 중앙에 놓인 꽃병만 노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제발 누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나는 슬쩍 천사연에게 눈짓했다.

    “음?”

    샴페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롭게 앉아 있던 천사연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뭘 모른 척하고 있어. 불편하다니까?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 봐. 의지가 담긴 뜨거운 시선에 천사연이 알겠다는 듯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니.”

    삭막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하태헌과 이주하가 천사연을 바라봤다. 그래. 날씨 얘기라도 해. 스몰토크라는 게 있잖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는 샴페인 잔을 들었다.

    “내 파트너 소개를 안 해 줬군. 이쪽은 한이결 능력자. 인사들 나누지.”

    “쿨럭…!”

    상상도 못한 대화 주제에 나는 마시던 샴페인이 사레들리며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천사연을 바라보던 하태헌과 이주하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천사연 이 새끼가….’

    목구멍에 아릿한 고통과 함께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거리는 내 등을 천사연이 가볍게 두드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괜찮은가?”

    “콜록, 괜찮…….”

    겨우 대답하며 천사연을 있는 힘껏 노려봤다. 주먹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꼴이 지금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게 분명했다.

    “예에, 알고 있어요. 한이결 씨. 용병으로 와 주셨으니까.”

    이주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 말고도.”

    “…….”

    “듣자 하니, 우리 이결이와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하던데.”

    자신을 향한 천사연의 말에, 하태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급히 끼어들었다.

    “그, 그게. 예전에 우연히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네. 우연히.”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하태헌이 나와 아는 사이라고 말하면 안 됐던 건데. 천사연은 나와 하태헌이 차수연 납치 사건으로 얼굴 정도만 봤다고 알고 있을 터라, 이런 궁색한 변명 말고는 갖다 댈 핑계도 없어서 난감했다.

    “그렇죠? 하태헌 씨.”

    “…….”

    절박한 내 도움 요청에도 하태헌은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러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까보다 배는 묵직하고 서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가 제일 늦은 건가?”

    그때, 발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어왔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금발의 화려한 미인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장 부렸으면 못 들어올 뻔했네. 안녕, 여러분!”

    시원스레 웃은 여자가 천사연과 이주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홍시아 마스터.”

    “오랜만이네. 이주하 마스터~”

    조명에 반짝이는 금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홍시아가 이주하와 악수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이 사람이 제이나 길드의 홍시아 마스터.’

    뛰어난 능력과 센스로 좋은 평가를 받는 S급 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홍시아를 뒤따라온 이가 힘차게 인사했다. 구불거리는 짧은 갈색 머리카락에 살짝 큰 안경, 베이지색 셔츠를 입은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홍시아와 함께 들어왔으니 제이나 길드의 부마스터 김나율일 것이다. 김나율은 원작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 인물이다.

    “하, 하태헌 부마스터도 오셨네요.”

    “예.”

    하태헌의 단답에도 김나율은 그저 좋은지,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김나율은 하태헌이 각성한 직후 우연히 만난 뒤로 그를 짝사랑하고 있다. 민아린이나 이주하보다 등장 빈도는 적어도 꾸준한 호감 표시로 원작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김나율 부마스터, 잘 지냈어?”

    “헤헤, 네. 이주하 마스터님도 잘 지내셨죠?”

    “나야 항상 똑같지, 뭐.”

    나름 알고 지낸 사이인지, 김나율과 이주하가 도란도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제야 다른 테이블과 비슷하게 화목한 분위기를 이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천사연 마스터는 웬일로 왔네? 게다가 파트너까지 챙겨 오고?”

    의외라는 홍시아의 말에 천사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넘길 만한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렇기야 한데, 해외에 눈 돌리느라 국내 게이트는 관심 밖 아니었어?”

    “게이트를 내버려 두고 신경 쓸 만큼 책임감 없지는 않아서.”

    “하긴. 생각해 보면 몇 개월 전에 새로 나타난 SS급 게이트도 레퀴엠이 가져갔었지.”

    얄밉네, 얄미워. 장난스럽게 말한 홍시아가 천사연 옆에 앉아 있는 내게 눈길을 줬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어머. 그쪽 혹시 한이결 용병?”

    역시 아는구나. 나는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째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반가워요. 나는 홍시아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한이결이라고 합니다.”

    “양손에 SS급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양손에 SS급이 다 여기 있잖아?”

    “…….”

    나는 반사적으로 하태헌의 눈치를 살폈다. 천사연이야, 저런 말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우리 한이결 능력자는 인기가 참 많군.”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눈썹 하나 까딱 않는 하태헌과 달리 오히려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오늘 파티도 같이 가 달라고 내가 어찌나 부탁했던지. 하마터면 혼자 올 뻔했어.”

    천사연이 눈꼬리를 축 내리며 슬픈 표정으로 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잠깐만요.”

    부탁을 하긴 뭘 해? 우리 거래한 사이잖아.

    “뭐야. 둘이 진짜 친한가 봐? 천사연 마스터가 이러는 거 처음 보네.”

    “워낙에 특별한 상대라.”

    ……오늘 아주 작정했구나?

    “하. 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괜히 샴페인만 들이켰다. 그냥 신경 끄자. 그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안녕하세요, 참석자 여러분. 저는 관리 본부 게이트 관리 센터의 장을 맡은 최미진입니다.”

    단상에 올라온 최미진이 마이크를 들었다.

    “게이트 이상 현상이 지속되면서, 관리 본부는 해결책으로 비공개였던 정보를 일부 공개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대처 방안을 세우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최미진 뒤로 거대한 빔 스크린이 내려오고, 지도 하나가 떠올랐다. 지역별로 게이트 위치가 표시된 이미지였다.

    “본래 규정상 각 지역끼리 공유할 수 있는 게이트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한계를 좀 더 넓히려고 합니다.”

    “지역 간에 공개하지 않았던 게이트 특성이나 클리어 팁을 밝히라는 겁니까?”

    경기도 지역의 한 길드 마스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불편한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미 미국과 중국,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이 방식으로 전 지역 게이트 관리에 나섰습니다.”

    “그건 압니다만, 그쪽 놈들도 그렇게 좋은 결과는 못 얻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대구에서 온 참석자가 끼어들었다. 최미진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상황이 바뀐 이상 뭐든 시도해 봐야 앞으로가 달라지겠죠. 변화가 달갑지 않다고 해서 지난 방식을 고수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지역마다 좀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제주도는 아무리 봐도 불리하기만 한데. 저기 어디냐, 부산이나 서울 같은 곳은 더 풀고.”

    “아니. 서울은 그렇다 쳐도 부산이 거기에 왜 낍니까? 까도 대전이나 인천이 까야지.”

    “뭐야? 부산 새끼들 양심도 없네. 광안리에 있는 게이트에서 새로 발견된 해양 몬스터가 몇십 마리나 되는 걸 뻔히 아는데.”

    “꼬우면 부산 내려오시든가. 다른 지역 게이트에서 나온 아이템 죄 수거해 가는 양아치놈들이 누구한테 시비야?”

    부산 지역 참석자의 신랄한 말에 인천 참석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광경에 같은 테이블에 있던 권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발. 양아치? 말 다 했어?”

    “다 했다, 이 새끼야. 좆같으면 덤벼.”

    갑작스럽게 터진 싸움에 모두 당황하기는커녕, 흥분한 표정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래. 싸워라, 싸워!”

    “이제야 좀 재밌네.”

    “인천 저 십새끼들, 부산놈들 말대로 허구한 날 삥이나 뜯고 앉아 있는데. 실력이나 제대로 보이겠어?”

    최미진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비가 걸린 부산과 인천 참가자들이 다 같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전투를 앞두고 피어오른 열기가 화려하게 꾸며진 파티장 내부에 감돌았다.

    “저래도 괜찮은 겁니까?”

    “뭐, 아예 기대하고 오는 놈들도 있으니까.”

    홍시아가 턱을 괸 채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콰르릉! 회색빛 연기를 휘감은 검과 기다란 장총이 부딪치자 땅이 울리며 내부가 흔들렸다. 그걸 기점으로 여러 명의 참가자가 능력을 쓰며 무기를 휘둘렀고, 부서진 테이블과 꽃병이 여기저기 튀어 올랐다.

    “다들 계속 앉아 계실 겁니까?”

    방어막 두르듯 바람을 주변에 감싸며 물었다. 와장창! 쿵! 별의별 소음이 들리며 나뭇조각과 유리 조각이 날아왔지만 바람에 모조리 막혔다.

    “굳이 자리를 떠야 할 이유는 모르겠군.”

    “모르겠다니…. 이 난장판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천사연을 포함해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정말.

    “저는 이런 위험한 곳은 더 있고 싶지 않은데요.”

    “저런. 까탈스럽기도 하지.”

    말장난할 때냐?

    “헉…!”

    능력자의 기운이 담긴 의자가 바람을 뚫고 날아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 의자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태헌이 휘두른 손에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 계속 계실 거면 혼자라도 나가겠습니다.”

    이러다가 진짜 피 보겠다. 부서진 의자 조각을 보며 말하자 천사연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건 안 되지.”

    “그럼 뭐라도…. 잠깐, 검은 왜 꺼냅니까?”

    시계를 툭툭 두드린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그나마 릴리스의 검이 아닌 S급 검이긴 한데, 그걸로 뭘 하려고?

    “왜 꺼내긴.”

    천사연이 자연스럽게 검날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이 상황을 정리해 주면 되지 않나.”

    “뭐? 아니, 잠깐! 하지 마요!”

    나는 기겁하며 금방이라도 손바닥을 베어 내려 하는 천사연의 팔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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