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72)화 (72/394)

72화 

차에 올라타자 옆에 앉은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호텔로 바로 가도록 하지.”

“예.”

운전기사가 깍듯이 대답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고개를 틀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손목에서 묘한 손길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천사연이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근거려?

“뭐 하세요?”

“커프스링크도 잘 하고 왔길래.”

“하라고 보내신 거 아닙니까?”

“안 해도 큰 상관없는 거니까.”

그 말에 셔츠 소매에 채워진 커프스링크를 바라봤다.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세공된 커프스링크가 어두운 차 안에서도 반짝이며 빛났다.

“주셨으니 한 건데, 불만이시면 말씀을 하시죠. 지금이라도 빼게.”

“설마. 잘 사용해 주니 좋아서 그런 거지.”

천사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셔츠 소매에 가려진 손목 안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 간단한 행동에 어째서인지 목 뒤가 오싹해지며 어깨가 움찔 튀었다.

‘뭐지?’

알 수 없는 감각에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는데, 천사연이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로헌 길드도 갔다 왔으니, 이제 제이나 길드를 가 보고 싶을 텐데. 맞나?”

“예, 뭐…. 제이나 길드 게이트도 이상 현상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으니까, 갈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죠.”

“이번 파티에 홍시아 마스터도 참석할 테니 잘 얘기해 보면 자리 하나쯤은 비워 주겠군.”

“안 도와주실 겁니까?”

“데려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보다 살이 좀 찌는 게 좋겠군.”

말 돌리기는. 혀를 차며 잡힌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만 놓으세요. 언제까지 만질 겁니까? 이런 것도 다 성희롱입니다만.”

“이런. 삐쳤나?”

“헛소리도 그만하시고.”

피식 웃은 천사연이 순순히 손목을 놔주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무소속인 널 제이나 길드 게이트팀에 꽂아 넣어 주는 것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지. 제이나 쪽에서 먼저 원한다면 모를까.”

역시 이럴 때는 무소속이 불편하긴 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에서 본 홍시아를 떠올렸다. 만만찮은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길드에 들어와도 좋고.”

“됐습니다.”

고작 이런 일로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곳이 천사연 아래라면 더더욱 싫고.

‘저번 용병 고용 때 로헌이 아니라 제이나를 선택할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후회하기에는 로헌에서 발견한 게이트 이상 현상이 꽤 중요했다. 뒤틀린 공간과 정체불명의 문양까지 발견했고.

지난 일을 아쉬워해 봤자 남는 것도 없다. 차라리 이번 파티에서 홍시아를 잘 꼬드겨 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방해만 하지 마십쇼. 알아서 해 볼 테니까.”

내 대답이 의외였던지, 천사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기대해 보지.”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대기 중이던 호텔 직원들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가까이 붙어 서서 팔 붙잡아.”

코트를 뒤따라온 수행원에게 넘긴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숙여 내게 속삭였다.

‘아무리 파트너라지만, 남자끼리도 팔짱을 끼고 입장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아는 게 없는 나는 사고 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천사연의 말을 따랐다. 그의 팔을 살짝 붙잡고 호텔 입구로 들어서자,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로 넓은 홀이 드러났다.

“어서 오십시오. 파티장 입구로 안내하겠습니다.”

직원 한 명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홀 안쪽에 위치한 파티장 입구로 우리를 안내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조각된 파티장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중앙에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진 파티장이 나타났다.

“웬만하면 곁에 붙어 있도록 해. 정신 나간 놈들이 많으니.”

“잠깐, 그러면 홍시아 마스터는 언제 만나라고?”

천사연이 직원에게 받은 샴페인 잔을 내게 건네주었다.

“타이밍을 잘 노려 봐야지. 시간은 많으니 조급할 필요 없어.”

“…방해 안 하겠다는 말, 꼭 지켜.”

“물론.”

별걸 다 의심한다는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일단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태헌은 아직 안 온 것 같네.’

치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태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하태헌을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아는 척을 해도 괜찮을지 고민이 들었다.

하태헌이 먼저 아는 사이라고 말해 버린 상황이긴 해도 옆에 천사연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천사연 마스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검은 단발머리에 예민해 보이는 인상을 한 여자였다. 파티복이라기보다는 일하러 왔다는 느낌이 강한 정장 차림의 여자는 천사연과 짧게 악수했다.

“기대 안 했는데 참석해 주시다니, 놀랍군요.”

“섭섭한 말씀을. 한 명의 마스터로서, 파티를 주최해 준 관리 본부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흠.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뭐, 그래요. 이쪽 분은?”

무심한 어조로 대답한 여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도에서 묘하게 능청스러움이 느껴졌다. 천사연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쪽은 제 파트너, 한이결 능력자입니다.”

“아아. 반가워요. 저는 관리 본부의 게이트 관리 센터장, 최미진이라고 합니다.”

게이트 관리 센터장? 최미진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한이결입니다.”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천사연 마스터가 웬일로 왔나 했더니…. 재밌군요.”

“예?”

“아닙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군요.”

나와 천사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최미진이 이만 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멀어져 가는 최미진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천사연에게 슬쩍 물었다.

“왠지 거물인 것 같은데…….”

“최미진 센터장 정도면 그렇긴 하지. 관리 본부 임원 중에 그나마 쓸 만하기도 하고.”

평가와 달리 천사연의 표정은 어딘가 시원치 않아 보였다. 최미진이 괜찮은 인물이긴 해도 좋아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딱 봐도 서로 안 좋아하는구만.’

최미진도 성격이 꽤 세 보였으니 천사연과 안 맞을 것 같긴 하다. 속으로 혀를 차며 샴페인을 홀짝이는데, 새로운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야, 천사연 마스터! 이게 얼마 만입니까?”

“권지훈 마스터.”

갈색 머리에 처진 눈을 한 인상 좋은 남자였다. 생글거리는 눈웃음과 오른쪽 볼에 있는 점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의 2년 만에 뵙는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천사연이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그야말로 사회생활의 표본과도 같은 표정과 몸짓이었다.

“제 파트너 한이결 능력자입니다. 평소 능력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권지훈 마스터라면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겠군요.”

근황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자 천사연은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권지훈의 따듯한 갈색 눈동자가 날 향했다.

“그럼요. 반갑습니다, 한이결 능력자. 부산에서 사계 길드를 관리하고 있는 권지훈이라고 합니다.”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천사연 마스터와 함께 활약하는 영상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실제로도 보고 싶군요.”

“하하…….”

이어지는 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놈의 영상….

“그보다 의외입니다. 천사연 마스터가 이런 자리를 다 오고.”

“무시하기에는 취지가 워낙 좋아서 말입니다.”

“하긴, 게이트 이상 현상으로 모두가 고생 중이니 말입니다. 부산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아요.”

다 마신 잔을 내려놓은 권지훈이 새 샴페인 잔을 들며 물었다.

“서울 지역은 레퀴엠 외에 참석한 길드가 없습니까? 로헌이나 제이나 길드 마스터가 아직 보이지 않네요. 블런은 뭐, 안 온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고.”

“글쎄. 저는 잘 모르겠군요. 딱히 서로 연락하지는 않아서.”

“곧 회담이 시작될 텐데… 엇.”

그때였다. 나와 천사연이 들어온 후로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파티장 문이 열리며, 새까만 정장을 맞춰 입은 남녀 한 쌍이 걸어 들어왔다. 로헌 길드 마스터 이주하와 부마스터 하태헌이었다.

앞머리를 넘기고 장신구 하나 달지 않은 깔끔한 차림새의 하태헌과 허리까지 내려오는 결 좋은 검은 생머리에 단정한 미인 이주하는 누가 보기에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하태헌에게 에스코트 받으며 입장한 이주하는 곧바로 최미진에게 걸어가 악수했다. 거리가 멀어서 대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서로 밝게 웃는 얼굴이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주하와 함께 들어온 이는 하태헌 능력자군요. 아, 이제는 부마스터라고 불러야 하던가요?”

넋 놓고 하태헌과 이주하를 보던 나는 권지훈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도, 실제로 하태헌을 보게 되자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뭔가 좀, 천사연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진정하자는 마음으로 남은 샴페인을 훅 들이켰다.

“흠흠. 안내 사항 전달드립니다.”

파티장 앞 단상에 선 최미진이 내부를 둘러보며 마이크로 말했다.

“10분 뒤에 게이트 진행 상황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참석자 분들은 지역별로 표기된 테이블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로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건가?

“이런.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두 분.”

안내를 들은 권지훈이 같은 지역 마스터들과 모이기 위해 자리를 떠나갔다. 웅성거리며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천사연에게 물었다.

“…나는 너랑 같이 앉아야 하는 거지?”

“당연한 걸 묻는군.”

천사연이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냐고?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야, 표면적으로 따지면 아무 문제 없지. 그냥 나만 불편할 뿐이니까.

“그럼 가 볼까. 우리 테이블은 저쪽이군.”

“아, 아니. 아직 제이나 길드는 오지도 않았는데. 좀 천천히 가도….”

이거 놔, 이 자식아!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은 채로 천사연이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름대로 다리에 힘을 줘 봤지만 웃기는 꼴로 질질 끌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아.”

우리와 마찬가지로 테이블로 오던 하태헌과 이주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주하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발견한 천사연이 부드럽게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이주하 마스터.”

“…그렇군요, 천사연 마스터.”

이주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애써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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