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달빛이 비치는 어두운 집 안,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발, 좆같은 새끼들… 내가 누군 줄 알고…….”
남자가 입을 벌릴 때마다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잔뜩 망가진 정장 차림으로 연거푸 와인을 들이켜던 남자는 이내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와인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와인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남자는 이번에는 앞에 쌓여 있던 와인병까지 마구잡이로 던지고, 테이블도 엎어 버렸다.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한동안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하아…….”
쿠구구궁, 쿠궁!
술에 취한 상태로 흥분하니 기운이 멋대로 튀어 올랐다. 조절되지 않은 능력 탓에 건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남자는 두 눈을 꽉 감았다. 자신을 노려보던 경멸 담긴 시선이 떠올랐다.
-못난 놈.
-아, 아버지!
-당장 나가라. 내가 먼저 찾을 때까지 찾아오지 마.
-자, 잠깐만요! 아버지!
-어쩌다 저런 쓸데없는 것을 자식이라고…. 에잉, 쯧.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이럴 리가 없다. 지금껏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만큼은 자신을 챙겨 줬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 막 정치계로 들어온 애송이 중에 아버지가 유난히 예뻐하는 놈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설마 제 자식을 버리고 다른 놈을 키우겠다는 건가?
“시발… 시발!”
쿠구구궁!
욕설과 함께 땅이 한 번 더 울렸다. 남자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다 엎어 버릴까? 자신의 능력이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그래, 저딴 쓰레기 같은 새끼들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왕 부숴 버릴 거라면 짜증 나는 관리 본부부터…….
“아니. 아니지.”
남자의 광기 어린 눈이 번뜩였다.
천사연 그 새끼.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던 더러운 고아 새끼. 그 새끼부터 조져야….
“이런. 집 안 꼴이 돼지우리 같군요.”
“……!”
킬킬거리고 웃던 남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너, 넌 뭐야!”
새까만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낯선 이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상대방 얼굴에 씌워진 새하얗고 매끈한 가면을 본 남자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 이 새끼 어디로 들어왔어? 경호하는 놈들은 뭣 하는 거야? 당장…….”
“시끄럽군요.”
상대방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와 동시에 남자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당황한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만지며 낑낑거렸지만, 입술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한국의 S급 능력자, 강승건 맞습니까?”
남자, 강승건이 공포에 질려 창백한 얼굴로 우당탕 넘어졌다. 눈앞에 있는 이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몬스터를 상대로도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에 강승건은 허우적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흥건한 와인에 미끄러져 헛발질할 뿐이었다.
“하하, 웃기는 꼴이네요. 더럽고 냄새나고 멍청하고…. 돼지우리에 딱 맞는 남자.”
가면을 쓴 이가 바닥을 뒹구는 유리잔과 와인병을 대충 발로 치우며 뚜벅뚜벅 다가왔다. 검은 구두가 달빛에 매끈히 빛났다.
“저도 이딴 더러운 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협조해 주신다고 대답만 한다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읍… 으읍!”
“대답은?”
벌어지지 않는 입을 가린 채 읍읍거리던 강승건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상대방이 흡족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으, 으읍…?”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 위에 올려진 것은 기묘한 색의 구슬이었다. 검푸른 빛무리가 일렁이는 구슬은, 보기만 해도 만지고 싶지 않은 본능이 솟구쳤다.
“듣자 하니 얼마 후에 관리 본부에서 파티 하나를 주최한다던데.”
“…….”
“당신도 참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블런 길드 마스터.”
그 은밀한 속삭임에 강승건이 떨리는 눈으로 상대방을 올려다봤다. 가면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으로 웃는 새까만 입을 보고 있자니 뇌가 뭉개지는 것처럼 눈앞이 일그러졌다.
“자,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어느새 구슬은 강승건의 손아귀 안에 놓여 있었다. 두 손으로 구슬을 쥔 강승건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다.
***
[지난 며칠간 가장 화제가 됐던 인물, 레퀴엠 길드 소속 김우진 능력자의 공식 발표가 진행 중입니다. 김우진 능력자는 지난 21일, 측정 센터에서 정식으로 A급을 확정받아 정해진 등급이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며…….]
소파에 누운 채로 TV를 켜자,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천사연과 김우진이 화면에 나타났다.
[많은 분이 질문 주셨지만, 등급 상승에 대해서 알려 드릴 정보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 얻어 낸 결과이고…….]
공격적으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김우진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인기 좀 많아지겠네, 김우진.’
그전에도 나쁘지 않았지만, A급이 되면서 체격이 확실히 좋아졌다. 거기다 차려입기까지 하니 외모가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김우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내려놨던 서류를 다시 들었다. 김우진이 공식 발표하러 가기 전 받아다 준 게이트 자료였다.
“음?”
제이나 길드의 C급 게이트가 B급으로 상승했다는 내용을 한창 읽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우진이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는데. 민아린도 오늘은 바쁘다고 했고.
‘누구지?’
자료를 치우고 문간으로 나가 보니 천사연의 수행원 중 한 명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마스터께서 전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선물을 보내겠다던 천사연의 말이 떠올랐다. 수행원에게 건네받은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딱히 둘 테이블이 없어서 일단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대충 던져두기엔 상자가 너무 고급스러웠다.
“…이게 뭐야.”
안에 든 것은 정장 세트였다. 새하얀 셔츠부터 구두, 커프스링크, 시계까지. 정장이 이런 식으로 상자에 담겨 있는 것을 처음 본 터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선물이라더니 파티에 입고 갈 의상을 보내 준 모양이다. 살짝 청색빛이 도는 검은 재킷을 꺼내 살펴봤다.
더블 브레스티드 형식으로 격식을 강조하면서도 그렇게 무겁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손에 와닿는 느낌도 거칠지 않은 게, 가격이 꽤 나가는 정장임이 틀림없었다.
이전 버릇대로 옷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정했군. 붉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프스링크까지 확인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 입어 보진 않았지만 불편한 곳 없이 몸에 딱 맞을 것이 분명했다. 천사연 정도면 한이결의 신체 사이즈쯤이야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맞춤으로 제작했겠지.
‘이렇게 제대로 제작하려면 최소한 한 달은 필요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해 둔 거야.’
어째 또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거래까지 했는데 무를 수도 없고.
아무튼 입고 갈 옷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정장은 잘 보관하기로 했다.
천사연이 알려 준 파티 날짜는 다음 주 토요일. 전국의 길드 마스터가 모두 모이는 만큼, 천사연이 곁에 있다 해도 혹여 책잡히지 않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이나 길드도 당연히 올 테고, 로헌은… 하태헌이 참석하겠지.’
부마스터가 되었으니 안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제이나도 부마스터가 따로 있으니 파트너로 데려올 거고.
생각해 보면 서울에 있는 길드 중에서는 레퀴엠만 부마스터 자리가 비어 있다. 천사연이 워낙에 일을 잘하니 딱히 필요 없긴 하지. 그래도 부마스터가 있었으면 내가 끼어들 필요 없었을 텐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갈 수 있게 돼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좋긴 한데, 종일 천사연과 붙어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 골치가 아팠다.
‘제발 내가 감당 가능한 사고만 생겨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끝나고 바로 오는 거지?”
파티 참석 당일, 정장을 입는 내내 곁에서 알짱거리던 김우진이 시무룩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그렇겠지.”
“안 가면 안 되는 거고?”
“그것도 그렇지.”
김우진에게는 천사연과 했던 거래 내용을 말해 주지 않았다. 김우진이 더는 내게 죄책감이나 부채감 따위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거래를 통해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보다 더 무리할 것이 뻔했다. 지금도 단련실을 다녀올 때마다 축 늘어져서 녹초가 되는데, 여기서 더 자신을 채찍질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알았어….”
내 단호한 대답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김우진은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재킷과 똑같은 색의 넥타이를 조이고, 커프스링크를 셔츠 소매에 달았다. 예상대로 정장은 한이결의 몸을 날렵하게 감쌌다.
왼손에 착용하고 있던 A급 팔찌를 오른손으로 옮기고, 빈 손목에 시계를 찼다. 액세서리까지 모두 갖춘 후 전신거울로 상태를 점검했다. 나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능숙해?”
그 일련의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우진이 목덜미를 붉히며 투덜거렸다. 살짝 뜨끔했지만, 모른 척 담담히 대꾸했다.
“옷 입는 게 거기서 거기지.”
문으로 걸어가자 김우진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주인 일 나갈 때 마중 나오는 강아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갔다 올게.”
“으응.”
김우진을 뒤로하고 방을 나온 나는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미리 안내받은 대로 지하 4층에서 내리자 수행원들과 함께 서 있는 천사연이 보였다.
“흐음.”
가까이 다가가자 천사연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시선에 떨떠름히 물었다.
“…뭡니까?”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
미간을 찌푸리며 천사연의 정장을 살펴봤다. 검은 셔츠와 회색빛이 섞인 채도 낮은 베이지색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똑같은 더블 브레스티드 정장에 검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으니, 적당히 무거우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파티라는 장소에 맞게 앞머리 반절을 넘겨 이마를 드러낸 천사연이 거리를 벌리고 서 있는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윽…!”
몇 걸음 다가가자 그가 넥타이를 낚아채 가볍게 잡아당겼다. 허리가 뒤로 살짝 꺾이며 천사연과의 거리감이 훅 가까워졌다.
“넥타이도 맬 줄 알고.”
“그야, 당연…….”
“넥타이 들고 찾아올 줄 알았는데. 정장 입는 방법을 아나 보군. 이럴 줄 알았으면 가터벨트도 보낼 걸 그랬어.”
그러고 보니 받고 나서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었지.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꿈도 크시네요. 설령 맬 줄 모른다 해도 마스터를 찾아갈 일은 없습니다.”
“왜? 잘 알려 줄 자신 있는데.”
자꾸만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천사연의 손을 뿌리치며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시 조였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출발이나 하죠.”
“그러지.”
천사연이 웃는 낯으로 차 문을 손수 열어 줬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야. 천사연이 기분이 좋을수록 그만한 부작용을 겪어 온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