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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67)화 (67/394)

67화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허억, 헉.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힘겹게 앞으로 기어갔다.

끼이이익-

꺄아악!

살려… 도망…….

기괴한 울음소리 사이로 비명이 들려왔다. 어디에서 가스가 폭발했는지, 머리 아픈 냄새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아슬아슬하게 벽에 매달려 있던 ‘3-17’이라 써진 주소 판이 삐걱 소리를 냈다.

“흐으…….”

더듬더듬 매만진 옆구리에서 질척한 피가 묻어 나왔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공포심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여, 연아… 흑, 연아…….”

다친 곳이 아팠지만, 그보다 동생이 더 급했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동생이 금방이라도 죽을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살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눈앞의 남자에게 울며 빌었다. 붉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던 남자가 시선을 내려 날 바라봤다. 새하얀 얼굴에는 불처럼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도, 동생. 동생이라도… 제발…….”

급히 뱉은 그 말에 남자가 눈썹 한쪽을 슥 올렸다.

뚜벅. 내게 한 걸음 다가오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피가 묻어 있는 검날이 번뜩였다.

“으…….”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었다. 남자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허억…!”

숨을 크게 들이켜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미약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햇살이 드리워진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인가.’

옆구리를 매만졌다. 꿈속과 다르게 치료를 받아 멀쩡해진 피부가 느껴졌다.

천천히 꿈에서 봤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불에 타오르던 판자촌. 좁은 골목과 가파르게 경사진 바닥.

그 한가운데 다친 한이결과, 쓰러져 있던 여동생. 둘 앞에 서 있던 검을 든 천사연까지.

오랜만에 보게 된 한이결의 과거였지만, 지나치게 단편적이라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쩔 수 없나.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와 보는 곳은 아니었다. 레퀴엠 길드 내부 병실. 낯익은 내부에 긴장을 풀었다.

몬스터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곧바로 기절한 터라,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따 민아린이나 김우진이 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각 지역의 마스터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대부분은 참석한다는 반응을….”

“음?”

병실로 들어온 이들은 천사연과 우서혁이었다. 따분한 표정으로 우서혁의 브리핑을 듣던 천사연은 일어나 있는 날 발견하자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께서 일어나셨군.”

“…왜 얼굴 보자마자 시비입니까?”

징그러운 소리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는데, 뒤에 서 있던 우서혁이 물어 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상처가 심했던 옆구리는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능력자가 있어서 좋았다. 힐러가 없었다면 한 달은 몸져누워야 할 만큼 큰 부상이었으니까.

“서류 정리해서 대표실에 올려놔. 이따 보고 다시 얘기하지.”

“예.”

우서혁을 병실에서 내보낸 천사연이 침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잠시 멈칫했다.

가까이에서 천사연의 얼굴을 보니 어쩔 수 없이 꿈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검을 든 천사연에게 여동생을 살려 달라 애원하는 한이결을 생각하던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서혁 비서를 포함해서 클리어팀 모두가 걱정 많이 하더군. 민아린 힐러와 김우진은 말할 것도 없고.”

“음….”

나중에 따로 찾아가서 멀쩡한 얼굴이라도 보여 줘야 하나. 기절하기 직전, 놀라서 내게 달려오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좀 미안하네.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됐지?”

“오늘로 이틀째군.”

그나마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를 천사연이 묘한 웃음을 띤 채 바라봤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대.

“그래서 뭔데? 찾아온 이유가.”

“이런. 평범한 병문안인데. 귀중한 협력자가 몸져누웠는데 당연히 와 봐야 하지 않나.”

웃기고 있네.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천사연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미간을 약간 좁혔다.

“용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말 문병 목적도 있어. 무엇보다 이번에는 위험하기도 했으니.”

“위험하다니. 내가?”

“치유 능력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상이 심할 경우에는 수술을 받아야만 힐러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말이었다.

힐러들이 사용하는 치유 능력의 경우, 찢어진 살점을 붙이고 아물게 할 수는 있어도 뒤틀리거나 부서진 상태를 원상 복귀시킬 수는 없었다. 그건 엄연히 ‘복원’ 능력자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내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의학의 힘이 필요했다. 섣불리 치유 능력으로 아물게 했다가는 상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었다.

“N23 구역에서 병원까지 거리는 2시간 정도지. 다친 너를 박건호가 자신의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해서 데려갔더군. 신호위반도 했다던가.”

“…….”

“그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사진 찍힌 것은 당연하고. 민아린 힐러는 수술실도 따라 들어가더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수술이 끝나자마자 치유해야 한다면서.”

“…그.”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내 예상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나 보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나름의 변명을 꺼냈다.

“어쩔 수 없었어. 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김우진이 다쳤을 거야. 어차피 누구 한 명 다칠 거라면 C급보다는 A급이 낫잖아.”

“어쩔 수 없었다, 라.”

천사연이 느긋한 몸짓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한이결. 내가 저번에 분명 말했을 텐데. 너 자신을 돌보지 않는 채로 움직여 봤자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다른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이게 최선이었어. 네 말대로 2시간 가까이 피를 흘려야 하는데, 일반인과 다를 게 없는 김우진이 그걸 어떻게 버텨?”

“내 눈에는 네가 김우진보다 훨씬 허약해 보이는데.”

“…….”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 자식이….

대답 없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자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좋냐?

“어쨌든 앞으로는 더 조심해 줬으면 좋겠군. 결국 뒤처리는 내 몫이라.”

“귀중한 협력자가 아프다는데 그 정도도 안 해 주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네가 김우진을 걱정하는 만큼, 김우진도 널 걱정할 테니.”

“…….”

“네가 기절해 있을 때 다들 어떤 표정을 하는지 직접 봤으면 오히려 좋았겠어. 그럼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더라도 고민 정도는 하겠지.”

“알았다고….”

잔소리 엄청 하네.

김우진이나 민아린에게 잔소리 들을 때보다 더한 정신공격에 피곤해하는데,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이결 씨!”

조금 지친 얼굴을 한 민아린이 날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급히 다가왔다.

“민아린 씨.”

“깨어나셨으면 호출 벨을 누르시지! 몸은 좀 어때요? 불편한 곳 있어요?”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살짝 웃으며 말하자 민아린이 그제야 안도하며 옆에 앉아 있던 천사연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걱정 많이 했어요, 이결 씨.”

“죄송합니다. 제가 기절한 뒤로 별일 없었습니까?”

“네.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 전투 장소가 1층에 있는 숨겨진 길 안쪽이더라고요. 3층으로 올라가니 무너졌던 바닥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어서 게이트 출구를 통해 바로 빠져나왔어요.”

“다행이네요.”

“큰 부상도 이결 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요.”

“…….”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소를 지은 채 나와 민아린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 이만큼 걱정하는데도 매번 나서는 게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에요. 별로 와닿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짐짓 슬픈 표정을 짓는 민아린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날 걱정해 주는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은 항상 갖고 있다. 딱히 무언가 해 준 게 없는데도 이토록 신경 써 줘서 놀랍기도 하고.

내가 쩔쩔매자 민아린이 울상을 지워 내며 미소 지었다.

“장난이에요.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근데 김우진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민아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천사연 또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분명 큰 부상은 나밖에 없다면서. 순식간에 경직된 분위기에 급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딨습니까? 김우진.”

“이결 씨.”

머뭇거리면서도 쉽사리 알려 주지 않는 민아린의 모습에 머릿속 한구석이 차갑게 식었다.

“설명해 주세요. 혹시 제가 기절하고 난 뒤에 다른 몬스터라도 나타난 겁니까? 그래서…….”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난 천사연이 굳어 있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왔다.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군.”

“아.”

그제야 민아린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놀라셔서 그런걸요.”

나와 달리 침착함을 유지한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진 씨는… 다친 건 아니지만, 상태가 좋지 않기는 해요.”

“무슨 뜻입니까?”

내 뒤에 서 있는 천사연의 반응을 살핀 민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손짓했다.

“직접 보는 편이 빠르겠죠. 우진 씨는 바로 옆 병실에 있어요. 같이 가요.”

병실에 있다니.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망설임 없이 민아린의 뒤를 따랐다.

옆 병실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김우진이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가 이마를 짚어 봤다.

“단순한 열이 아니에요.”

손바닥에 닿아 오는 피부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김우진을 보며 민아린이 침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기운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어요. 한계 이상으로 불어난 기운이 심장을 공격하고 있는 상태예요.”

“원인이 뭡니까?”

“여러 전문가 분이 다녀가셨지만…….”

민아린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기운이 비정상적으로 날뛰는 원인도,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결 씨가 수술실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괜찮으셨어요. 수술이 끝난 뒤로 갑자기 쓰러지셔서.”

“그럼 하루 넘게 이 상태라는 거군요.”

“네. 해열제를 투여해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요. 다행히 우진 씨가 버텨 주고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기운을 잡아 주지 못하면….”

“…위험하다는 겁니까?”

민아린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살려야 해.’

이런 경우는 소설에서도 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레드 마켓에 불법 물약을 파는 제작자가 있다고 하던데, 그를 찾아봐야 할까. 아니면 일본에 있는 S급 복구 능력자에게 연락해 보는 건? 기운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 아예 복구를 시켜서…….

‘아니야. 가능성이 너무 낮아.’

다양한 시도를 해 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초조함에 주먹을 꾹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한이결.”

뚜렷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천사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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