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나는 내 옆에 바싹 붙어 있는 민아린을 조용히 불렀다.
“민아린 씨…….”
“네?”
“좀 떨어져서 걸으면 안 될까요?”
“어머, 너무하세요.”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절 말썽 부리는 애 취급하는 민아린 씨가 더 너무한데요…….”
“애 취급이라뇨? 섭섭한 소리를. 그냥 말도 없이 어디 가실까 봐 무서울 뿐이에요.”
“안 가요. 안 갑니다. 너도 이제 좀 놔.”
내 말에 오른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김우진이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봤다. 뭐 인마.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잖아요.”
“신경 안 쓰시는 거 다 알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
결국 나는 양팔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을 바라봤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아선 몬스터를 근접팀이 해치우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B급을 유지하던 등급 수치가 훅 떨어져서 이번 몬스터는 C급이었다. B급이어도 재미없을 판에 C급을 상대하게 된 길드원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몬스터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전투가 끝나자 민아린은 힐러들과 함께 근접팀 케어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감시자가 한 명 사라진 틈을 타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려서 박건호가 말한 숨겨진 길이 어딨는지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는 못 가더라도, 나중에 천사연의 허락을 받고 혼자 오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알아 두면 이득일 것이다.
“……한이결.”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김우진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주변에 눈치 빠른 사람들만 있어서 그런가, 김우진도 날이 갈수록 눈치가 좋아지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아니, 내가 뭘?”
시치미를 떼며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김우진은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뾰족하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를 살살 내리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고 게이트 들어오면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 놓고 혼자 어디 갈 생각이나 하고…….”
“그거야.”
이 정도로 난이도가 쉬워질 줄은 몰라서 그랬지. 등급 수치 깎이는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면, 2층은 A급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몬스터 등급이 떨어졌다고 해도 나는 C급이라서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
“맞는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넌 항상 조심해야 해.”
“그래. 그러니까 나 두고 어디 가지 마. 무섭다고. 알겠어?”
김우진이 내 팔을 힘주어 잡았다. 녀석의 얼굴에서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서운 건 진짜인가 보다.
‘너무 내 생각만 했나.’
김우진은 나 하나만 믿고 들어왔을 텐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허락한 것도 나고 지켜 주겠다고 한 것도 나였다.
“……알겠으니까 팔 좀 놔줘라. 어디 안 가.”
“혼자 게이트 돌아다니겠다는 말도 다신 하지 마.”
그건 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 죽여 말했다.
“다른 때야 위험한 게 사실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내 계획도 나쁘지 않아. 나는 능력 특성상 몬스터를 마주쳐도 도망칠 수 있고. 솔직히 다들 왜 반대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
“너…….”
김우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뭘.”
“효율만 생각하잖아. 등급 수치가 변해서 게이트 위험도가 많이 떨어졌다는 건 나도 알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가려는 곳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위험하면 도망가겠다는…….”
“한이결.”
김우진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게이트를 신경 쓰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랑 상관없는 문제였으면 이렇게까지 관여하지 않았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
“…….”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김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상 현상이 확인된 게이트 자료를 모으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가 보려고 하고……. 당연히 알아챌 수밖에 없잖아. 나는 네 옆에만 붙어 있는데.”
김우진은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내게 담담한 비난을 던졌다. 오해라는 변명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김우진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네가 뭘 원하든 다 해 줄 수 있는데.”
“…….”
“너 자신을 이런 식으로 내던지는 건 돕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막을 거고.”
나는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내렸다. 김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게이트는 망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다행히 지금까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빠른 대처와 운이 따랐을 뿐.
게이트 내부 변화로 인해 난이도 예측이 힘들어지면서 클리어에 부담을 느끼는 능력자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하나하나 따져 보고 있자면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앞뒤 안 가리고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좀 번거롭고, 아슬아슬하더라도 최대한 많이 파헤치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나. 그 과정에서 다치더라도 어차피 치료받으면 금방 나으니까.
……게이트 이상 현상의 원인이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김우진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야 재밌으니 뭐가 원인이든 상관없어.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군.」
천사연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김우진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 거절의 몸짓에 김우진도 입을 다물었다.
***
몬스터 처리가 끝나자 박건호는 잠을 자고 내일 이동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모닥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내 곁으로 민아린이 다가왔다.
“이결 씨, 우진 씨랑 또 싸우셨어요?”
“……음, 싸웠다기보다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던데요.”
나는 길드원들을 도와 주변을 정리 중인 김우진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불편했던 그 대화 이후, 김우진은 여전히 내 곁에 붙어 있었지만 평소처럼 이런저런 말을 하거나 팔을 붙잡지 않았다.
나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김우진은 설명을 원하지만 해 줄 수가 없었으니까.
“저한테 섭섭한 게 있나 봅니다.”
“뭐가 섭섭한 건지 설명 안 들어도 알겠네요.”
“…….”
어째 뼈가 느껴지는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민아린 씨도…….”
“저는 뭐. 이결 씨가 고집부렸으면 모르겠지만, 안 가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나중에 따로 와 볼 생각을 하던 나는 괜히 찔려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민아린이 화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꽤 무서웠다.
“저번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해 보여서 끼어들 수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죠.”
“그럼 다행이겠지만……. 우진 씨가 대충 넘어갈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걸요.”
“안 풀린다면 어쩔 수 없고요.”
김우진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일로 나한테 실망하고 멀어진다면 속이 좀 쓰리기야 하겠다만.
“방금 말도 우진 씨가 들으면 엄청 서운하겠어요.”
“쉽게 포기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남이 노력한다고 변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민아린이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미소 지었다. 침묵이 찾아온 나와 민아린 사이에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가 울렸다. 타오르는 노란 불빛을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덧붙여 말했다.
“어쨌든 주변 분들의 걱정을 사면서까지 따로 행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김우진은…… 잘 해결해 볼게요.”
“흠. 좋아요. 믿어 볼게요.”
장난스럽게 대답한 민아린이 몸을 일으켰다.
“좋은 꿈 꾸세요, 이결 씨.”
“민아린 씨도요.”
민아린이 내게서 떠나가자, 정리를 끝내고도 괜히 방황하던 김우진이 돌아왔다.
“김우진.”
머뭇거리며 내 곁에 앉은 김우진의 표정은 딱 보기에도 안 좋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자.”
“조금만 이따가…….”
조용히 모닥불만 바라보던 김우진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했던 얘기.”
“어.”
“…그냥, 말하기 싫은 내용을 억지로 들으려고 그런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하고…….”
“넘겨짚지 마. 따로 사정이 있어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김우진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도 내 목숨 중요한 건 잘 알고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
뭔가 더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김우진은 마음을 바꿨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자리가 준비된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온종일 게이트 내부를 돌았으니 C급인 김우진에게는 꽤 고된 일정이었을 터다. 내 예상대로 김우진은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쉬며 잠들었다.
나를 포함해 깨어 있는 이가 몇 안 되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아른거리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그동안 겪어 온 게이트를 차례로 떠올렸다.
‘내가 들어온 게이트마다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게이트에 이상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50%. 확률상 문제가 있는 게이트만 걸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조사해야 하는데…….’
내가 게이트에 끼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처럼 직접 게이트 내부로 들어와서 조사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본래 계획은 하태헌을 최대한 빨리 키운 이후, 천사연이 그에게 시선을 뺏긴 틈을 타 도망가려고 했는데.
도망은커녕 천사연이랑 협력 관계를 맺고 게이트를 전전하고 있으니……. 심지어 하태헌에게는 밉보인 상태고.
소설을 이용해서 미래를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라 계획을 세워 봤자 틀어질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무작정 움직이는 것보다는 대충이라도 생각해 두는 편이 좋았다.
김우진이 가져다준 자료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부분 외워 뒀기에 원하는 정보만 기억해 내기는 쉬웠다.
‘제이나 길드.’
레퀴엠 길드와 로헌 길드와 비교했을 때, 이상 현상 게이트가 가장 적게 발견된 길드였다. 이번 게이트를 해결한 뒤에 제이나 길드 게이트를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천사연에게 부탁하면 어떻게 자리 하나 정돈 만들어 주겠지. 어느 등급의 게이트를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왔다.
“우서혁 씨.”
“안 피곤하십니까?”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자, 우서혁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