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둠 사이로 새하얀 빛이 들어오는 출구가 보였다.
그곳으로 나가자 처음 하태헌이 빠졌던 14번째 방의 검은 구멍이 발아래로 드러나고, 눈앞에는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길드원들이 있었다.
“부, 부마스터!”
“세상에! 두 분 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르르 몰려드는 길드원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때였다.
쿠구궁!
“어엇!”
“문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길드원들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와 하태헌,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며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도록 하지.”
방을 빠져나와 홀로 이동하자 다른 방을 갔던 2팀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일단 다른 방을 모두 처리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태헌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떨어진 곳에서 S+급 몬스터를 마주쳤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에는 목격자가 너무 많은 터라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나았다.
무엇보다 나와 하태헌이 사라지고 난 뒤로, 3시간 동안 14번째 방 안에 갇혀서 전전긍긍했을 1팀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 주는 게 맞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설명을 들은 길드원들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부마스터와 한이결 씨 상태가…….”
길드원 한 명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전투를 치르면서 잔뜩 구르느라 지금 꼴이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하태헌은 얼굴에 묻은 핏자국 말고는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게이트 이상 현상으로 공간이 뒤틀렸고, 그래서 발견하지 못했던 몬스터를 마주친 것으로 추측한다.”
하태헌의 설명을 들으며 뒤로 시선을 돌렸다. 여신상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홀 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다. 뒤틀린 공간 너머의 여신상과 지금의 여신상.
‘분명 여기 홀에서도 여신상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그렇다면 저 여신상도 몬스터가 될 수 있는 건가?’
뒤틀린 공간에서 하태헌이 발견했던 문양도 수상했다. 정말로 그 아래에 아이템이 숨겨져 있다면, 꽤 높은 등급을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은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S급 정도만 돼도 좋겠다. 방어용은 SS급 코트가 있으니까, 공격용 아이템으로다가.’
S급 무기를 들고 전투하는 하태헌을 상상하니 꽤 기분 좋았다.
심각한 로헌 길드원들 사이에서 홀로 딴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길드원 한 명이 나를 힐끔거리며 질문했다.
“근데, 부마스터. 한이결 씨와는 무슨 사이예요?”
“…….”
아차.
그제야 하태헌이 떨어졌을 때 내가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이름을 부른 것도 모자라 구하려고 냉큼 뛰어내렸었지. 확실히 이번 게이트에서 처음 마주친 상대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떡하지.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난감한 표정으로 하태헌을 바라봤다. 내가 먼저 나서서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들을 차분히 바라보던 하태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이결과 나는.”
그 순간, 하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잘 대답해야 한다, 하태헌.’
그라면 이 상황을 능숙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여러 상황을 대비해 두는 성격이니까. 넌 할 수 있어, 하태헌. 믿는다.
“예전부터 아는 사이다.”
“뭐라고?”
너무 놀라서 육성으로 되물었다.
그런 나를 가리키며 하태헌이 덧붙여 말했다.
“내가 각성하기 전부터 이어 온 인연이고.”
“…….”
“지금도 여전히 좋은 관계다.”
이 미친놈이?
황망한 내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길드원들은 모두 흥미진진해하며 떠들었다.
“어쩐지. 두 분 분위기가 묘하더니.”
“각성 전부터 인연이래!”
“한이결 씨는 레퀴엠 마스터와도 친하다고 하지 않았나?”
“보통 인물이 아니네.”
나에 대한 평가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하태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퍽 찔렀다.
힐끔 내 눈치를 살핀 하태헌이 느릿한 말투로 덧붙였다.
“……굳이 밝혀 봤자 복잡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한이결에게 처음 만나는 것처럼 행동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말을 따랐을 뿐이니,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도록.”
“하. 하하.”
날 바라보는 길드원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진짜 미치겠네.’
그렇게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후, 우리는 곧바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은 하태헌이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뒤늦게 경호원들이 그 사이를 막아섰지만 어떻게든 사진 한 장, 인터뷰 한마디 따려고 혈안이 된 기자들과 구경꾼들로 주변은 금방 난장판이 되었다.
그 틈에 슬쩍 도망치려던 나는 김수환에게 붙잡았다.
“이결 씨…….”
김수환이 슬픈 얼굴로 나를 불렀다. 섭섭함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가 내 양심을 찔러 왔다.
“이결 씨가 부마스터와 친하셨다니…….”
“저, 그게… 김수환 씨. 제가.”
“그런 이결 씨 앞에서 온갖 아는 척을 한 게 부끄럽네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괜찮아요. 부마스터가 시켰다면서요. 어쩔 수 없죠.”
김수환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실망한 척 장난을 친 모양이다.
“그보다 번호 좀 주세요. 이따가 초대권 보내 드릴게요. 아, 팬카페 들어오실 생각은 아직 유효한 거 맞죠?”
“그럼요.”
다행이다. 나는 안심하며 김수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 줬다.
“다음에 만나서 부마스터 덕질해요!”
“하하, 예…….”
덕질이 뭔지 모르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자들 틈에 둘러싸여서 무표정한 얼굴로 인터뷰 중인 하태헌을 확인했다. 도망가려면 지금뿐이다.
“김수환 씨,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예? 가시게요? 왜요? 저희 회식하는데! 들렀다 가세요.”
“아뇨, 급한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 갈게요.”
“그럼 부마스터께 말하고 가시는 게…….”
“아닙니다. 이해해 주겠죠. 그럼.”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D17 구역을 벗어났다.
***
타닥, 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불 꺼진 방 안에 커다란 모니터 여러 대가 환하게 빛났다. 그 앞에 자리 잡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철컹. 끼익-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검은색 스타디움 점퍼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가까이에 있던 커다란 기계 부품을 거칠게 걷어찼다.
쾅!
“아 시발, 깜짝아. 뭐야?”
누가 들어온지도 모른 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소음에 화들짝 놀라며 의자를 빙글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리저리 뻗친 덥수룩한 머리에 커다란 뿔테 안경, 회색 후드티를 입은 그는 손님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댁은 누구야?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오는…….”
“나야.”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목소리는 낯익었다. 게다가 저 흐릿한 존재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무언가 생각하던 남자가 이내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김우진! 김우진 맞지?”
“어.”
모자를 벗고 능력을 끄자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흐느적흐느적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엄청나게 오랜만이네. 얼마 만이지?”
“몰라.”
팔에 매달려 오는 남자를 쳐 내며 김우진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태도에 남자가 히죽 웃었다.
“여전하네. 그래서? 나 보러 온 거야?”
그렇긴 하지만 저 놀리듯 웃는 얼굴을 보니 순순히 인정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김우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이드.”
“음?”
“네가 알아봐 줄 게 좀 있는데.”
“워.”
그 말에 남자, 하이드가 짐짓 놀란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웬일이야?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필요 없었으니까.”
“지금은 필요해졌고?”
구석진 곳에서 새로운 의자를 달달 끌고 온 하이드가 김우진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뭐, 말해 봐. 내가 워낙 비싼 몸이라 외부 의뢰는 아무나 안 받아 주기는 하는데.”
마치 허밍 하듯 경쾌하게 말한 그가 후드 주머니를 뒤적여서 막대사탕을 꺼냈다. 레몬 맛과 딸기 맛. 잠깐 고민하던 하이드는 딸기 맛을 김우진에게 내밀었다. 김우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치워.”
“왜? 맛있어.”
“치우라고.”
예민하기는. 딸기 맛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하이드는 레몬 맛 사탕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달그락거리며 사탕을 열심히 굴리던 하이드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날 찾아온 거면 보통 일은 아닐 거고.”
“요즘 게이트 문제로 시끄러운 거. 알고 있지?”
“그렇기야 한데… 갑자기 게이트? 길드 들어갔다더니, 거기서 너한테 알아 오라고 시켰냐?”
김우진은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하이드가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지……. 레퀴엠 정도면 굳이 너한테 시키지 않아도 될 텐데.”
재밌는 냄새가 났다. 하이드가 흥미로 눈을 반짝 빛냈다.
“누구야? 누구 부탁인데 몇 년 만에 날 찾아와서 그런 부탁을 해?”
“알 거 없어.”
“우왁.”
불쾌한 표정을 지은 김우진이 앞에 앉은 하이드의 의자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의자 바퀴가 드르륵 밀리며 하이드가 허우적거렸다.
“치사하게! 도와주는데 그 정도는 알려 줘도 되잖아!”
“알아보라는 것 이상으로 뒤져 볼 거 다 아는데, 내가 왜.”
“그래야 재밌잖아!”
“시발, 이래서 찾아오기 싫었는데…….”
하이드를 험악하게 노려보던 김우진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니, 아니다. 야. 알려 줄 테니까 네 성에 찰 때까지 한번 알아볼래?”
“진짜? 나야 그럼 좋지. 무슨 일인데?”
“일단 근래 게이트 진행 상황이랑 정보들 실시간으로 모아. 이상 현상이 발견된 게이트 포함해서. 필요해지면 달라고 할 테니까.”
“그거야 쉽지.”
“그리고…….”
김우진은 이때까지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이결이라는 능력자가 있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한이결?”
“찾다 보면 여동생에 대한 것도 나올 텐데…. 그 부분은 더 상세하게.”
“한이결. 한이결이라…….”
어디서 들어 봤지? 머리를 긁적이며 머리를 굴리던 하이드는 이내 뉴스를 떠올렸다.
“생각났다. 그 A급 용병 맞지? 레퀴엠 마스터랑 친하다던.”
“안 친해.”
“다들 그렇게 떠들던데?”
“안 친하다고.”
김우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저래.
“뭐, 그건 관심 없고…. 한이결에 대해서 탈탈 털면 되는 거지?”
“탈탈 털…… 야.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럼 정보 터는 걸 턴다고 하지 뭐라고 해?”
“그냥 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알아 둔다는 느낌으로…….”
“뭔 개소리야?”
하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우진 이 새끼, 안 본 사이에 좀 맛이 간 거 같은데.
“에이 시발, 아무튼! 알아봐. 철저하게. 알겠어?”
“예이. 걱정하지 마시죠.”
장난스러운 대답에 김우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게? 오랜만에 보는데 좀 놀다 가지?”
“이딴 데서 뭘 하고 놀아? 갈 거야.”
김우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철컹, 쾅!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자, 의자에 앉은 채로 빙글빙글 돌던 하이드가 혀를 찼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네. 투덜거리며 김우진의 의뢰 내용을 떠올렸다.
“한이결.”
타닥. 프로그램에 이름을 검색하자 창 여러 개가 차라락 떴다. 그것을 바라보며 하이드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