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무슨 질문이 이래?
“따라온 게 아니라, 구하려고 한 겁니다. 비행 능력이 있으니까.”
“그럼.”
하태헌이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능력이 없었으면.”
“…….”
“뒤따라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태헌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그 순간, 이성적인 판단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만약 바람 능력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다르게 행동했을까. 그건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찌 됐건 저는 그쪽을 구할 생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걸로 된 거 아닙니까?”
하태헌은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며칠 전 로헌에서 마주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미묘하고 이상한 태도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거리가 좀 가까워진다 싶다가도 멀어진다. 내가 보기에는 하태헌 본인조차 혼란을 가다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뭐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제발 말이라도 속 시원하게 해 줘라.’
답답해 죽겠네. 원체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인 거야, 소설을 읽었으니 알고 있었지만…. 그걸 내가 겪으려니 엄청나게 불편했다.
“됐습니다. 지금은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니까. 일단 나가는 길부터 찾아보죠.”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리자 하태헌의 표정이 어딘가 뚱해졌다. 잘못 봤나. 워낙 어두워서 확실하지가 않네.
새까만 검을 만들어 낸 하태헌이 나를 지나쳐 앞장섰다. 먼지들은 하태헌이 움직일 때마다 그 주변을 감싸며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이 꼭 요정을 데리고 다니는 동화 속 공주님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어둠이 가득한 복도를 걸었다. 한마디 대화 없이 묵묵히 앞을 향해 걷기만 하던 하태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왜요?”
“느낌이 좋지 않군. 아무래도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것 같은데.”
하태헌이 검을 들어 벽을 향해 휘둘렀다. 카각, 벽에 깊은 흠집이 남았다.
“여기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십니까?”
“대략 50분쯤. 정확하지는 않다.”
“50분간 몇 번 헤맸는지조차 확실하지 않군요.”
나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흔적도 남겼으니 지금부터 벽을 짚고 걸어 봅시다. 단순한 미로인지, 몬스터의 능력인지 확인해 보게요.”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마찬가지로 벽을 짚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온 사방이 어두워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초조해지면 안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동요하기 시작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돌아왔네요.”
벽을 짚고 있던 손끝에 아까 하태헌이 남겼던 흔적이 만져졌다. 걸린 시간은 15분 정도.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벽을 부숴 버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숨겨진 장치를 건드릴 수 있다.”
“그래도 계속 헤매는 것보다는 낫겠죠. 한시라도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길드원분들이 어떤 상황일지 모르는데.”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하태헌이 내게 눈짓했다.
“뒤로 물러서라.”
내가 재빨리 하태헌의 뒤로 숨자 벽으로 먼지들이 모여들었다.
쿠구궁! 쾅!
다닥다닥 벽에 달라붙은 먼지들이 일제히 폭발하기 시작했다. 쿠르르, 벽이 무너져 내리며 뿌연 연기가 발아래로 퍼져 나갔다. 흔들거리던 땅이 잠잠해졌을 때쯤에 물었다.
“뭐가 보입니까?”
벽 너머는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허공이었다. 반짝이는 가루들이 벽 너머로 날아가 주변을 밝혔다.
“아무것도 없군.”
나와 하태헌은 온통 어둠밖에 없는 커다란 공간 한복판에 서 있는 건가. 오싹, 소름이 밀려왔다.
“…혹시 모르니까 아래도 살펴볼 수 있습니까?”
빈 공간을 떠돌던 빛나는 먼지가 하태헌의 손짓에 따라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숨죽이고 하강하는 빛 무리를 바라보던 나는 희끗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방금…….”
“뭔가 있군.”
“내려가 봐야겠네요.”
마른침을 삼키며 아래를 노려봤다. 이 아래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괜찮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굉장히 내키지 않았지만, 하태헌의 말대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하태헌에게 붙어 서며 솔직하게 말했다.
“꽉 좀 잡아 주시죠. 영 불안해서.”
“…….”
앞에 있는 사람조차 흐릿하게 보이는 어둠 속. 그래도 체온이 느껴지니 불안감은 조금 수그러들었다.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던 하태헌이 곧 내 허리를 힘주어 당겨 안았다.
후웅, 바람에 나와 하태헌의 몸이 붕 떠올랐다. 무너진 벽 너머, 어둠밖에 없는 그곳으로 천천히 하강했다. 저 멀리 하태헌의 먼지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저건…….”
불빛에 비쳤던 것은 커다란 석상의 일부분이었다. 타닥. 땅에 발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촛불이 환하게 켜졌다.
“여신상?”
나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여신상을 올려다봤다. 검을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인. 게이트 중앙홀에서 봤던 여신상이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한이결!”
하태헌이 나를 껴안은 채로 급히 몸을 날렸다. 쿠구궁!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석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이 내리꽂혔다.
그르르릉.
여신상의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위로 여러 개의 석상 검이 우리를 향해 차례로 떨어졌다. 나는 급히 능력을 사용했다.
콰광! 쿠구궁!
하태헌이 나를 안은 채로 이리저리 검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강하게 내리꽂히는 검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섬찟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최소, 윽!”
콰앙!
“S급 이상, 인데요!”
그극. 그르릉.
아래를 보고 있던 여신상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머릿속이 사늘하게 식었다.
‘중앙홀에서 여신상을 살펴봤을 때도 들었던 소리야. 그렇다는 건…….’
그때도 눈알이 움직였다는 건가.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치며 하태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여신상… S+급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쿠구구궁!
바닥에 꽂혀 있던 석상 검이 천천히 뽑히더니, 여신상 뒤로 떠올랐다.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여신상의 입술이 열렸다.
『처……단.』
“으윽……!”
“큭!”
머릿속을 뒤흔드는 묵직한 음성에 이를 악물었다. 하태헌마저도 충격이 있었는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그극, 기긱.
『처단하라.』
여신상이 들고 있던 거대한 검을 빠른 속도로 들어 올렸다. 후우웅,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하태헌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콰광!
엄청난 충격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이며 파편이 마구잡이로 튀었다. 마치 고층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주변이 온통 흔들렸다. 그림자에 얼굴이 반쯤 잠겨 있는 여신상의 모습은 굉장히 기괴했다.
사라라락.
날 안고 있는 하태헌의 몸 주변으로 새까만 먼지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방패를 두르듯, 수많은 먼지를 띄운 채로 하태헌이 여신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검을 정통으로 맞은 여신상의 손목은 멀쩡했다.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SS급의 공격을 막아 내는 방어력이라니.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S+급 정도다. SS급이 아닌데도 하태헌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라면.
“방어와 관련된 능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하태헌이 차분하게 여신상을 살폈다. 방어 계통의 능력을 갖춘 몬스터는 대부분 그 매개체가 존재한다. 능력의 주축이 되는 핵을 부숴야만 공격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핵이라고 불릴 만한 건 보이지 않는군.”
쿠웅! 파지직!
머리 위로 떨어진 여신상의 검이 하태헌의 먼지에 가로막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우우웅, 여신상 뒤에 떠 있던 석상 검 일곱 개가 가로로 눕더니 화살처럼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하태헌이 쏟아지는 석상 검을 피하며 여신상의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몸집만큼, 빠르다 해도 속도 차이가 있었다.
카가가강! 여신상의 목을 노리고 검을 횡으로 그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핵을 찾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 상태일 것이다. 나는 하태헌에게 안긴 채로 여신상을 샅샅이 살폈다. 숨겨진 핵을 찾아야…….
“아.”
그때, 별 의미 없이 지나쳤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생각이 맞다면, 핵은.
“하태헌 씨.”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 여신상, 혼자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 목소리에 하태헌이 나를 바라봤다.
“……뭔가 알아냈나 보군.”
“길어 봤자 5분. 가능합니까?”
“해 보지.”
상대방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하태헌으로서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가리켰다.
“적절한 타이밍에 옆으로 빠지겠습니다. 능력은 계속 유지해 둘게요. 공격을 피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여신상이 보고 있는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최대한 정신없는 순간에 몰래 떨어져야 했다. 내 말의 뜻을 알아챈 하태헌이 여신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가강! 카강!
공격이 계속해서 막혔지만, 하태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그극, 눈동자를 한 바퀴 빙글 돌린 여신상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처단하라.』
후우웅!
석상 검 일곱 개가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온 방향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석상 검을 피하며 하태헌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움직였다.
‘지금!’
석상 검이 머리 위를 지나가는 순간에 맞춰 하태헌의 품을 빠져나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다지 높지 않아 능력 없이 가뿐하게 착지한 나는 곧장 여신상의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아, 젠장.”
부서진 돌무더기가 바닥에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하태헌을 살폈다. 여신상의 공격을 한 몸에 받아 내고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능력을 사용해야 하나. 괜히 양쪽에서 능력을 사용하다가 하태헌에게 향해 있는 기운이 불안정해지기라도 하면.
“…….”
한가하게 고민할 시간 따위 없었다. 하태헌을 계속 살피며 돌무더기를 맨손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옮기기 어려울 만큼 무겁거나 큰 파편은 없었다.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치우다 보니 양 손바닥에 아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찾았다!’
돌무더기를 대충 옆으로 치워 내자 파란빛이 반짝였다. 중앙홀에서 여신상을 살펴볼 때 발견했었던 푸른 보석. 다행히 이곳에도 같은 위치에 박혀 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게 방어력을 유지해 주는 핵이겠지. 안도의 숨을 내쉰 그 순간이었다.
“크윽!”
콰광!
“하태헌 씨!”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벽에 파묻힌 하태헌이 보였다. 여신상이 휘두른 검에 등을 맞고 날아간 것이다. 머리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태헌이 마른기침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부딪힐 때 다쳤는지 볼에 피가 흘러내렸다.
‘침착해.’
가파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더듬더듬 돌무더기에서 적당한 크기의 파편을 찾아냈다. 바닥에 박혀 있는 핵. 이것만 부수면.
“―한이결!”
섬뜩한 감각과 함께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신상의 거대한 두 눈이 보였다. 촛불 빛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그 존재가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르릉.
여신상의 검이 떠오르고, 맞은편에서 하태헌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파편으로 보석을 강하게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