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14. 숨겨진 성역
내가 얼마나 불편하든 간에, 팀은 일정대로 몬스터를 처리해 나갔다.
키아아아악!
기어 다니는 거미 몬스터를 하태헌이 베어 내자, 옆에 있던 김수환이 못 참겠다는 듯이 외쳤다.
“크으~ 너무 멋있어!”
“…….”
다행히 김수환은 내 걱정과 다르게 침울한 마음을 금방 털어 냈다. 그는 하태헌과 대화를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방금 봤어요? 한이결 씨? 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하하… 예.”
나는 대충 대꾸하며 달려드는 거미를 죽였다. 잠깐이나마 하태헌에게 신경을 좀 끄고 싶은데, 김수환이 자꾸만 좀 보라며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죠. 우리 부마스터 인기가 워낙 많잖아요? 저번에는 여직원들이…….”
“김수환 씨.”
몬스터를 다 처리하고 갖는 휴식 시간, 나는 김수환의 말을 끊어 내며 물었다.
“듣기로 부마스터는 팬카페도 있다던데. 진짜입니까?”
어차피 하태헌과 관련된 대화를 할 거라면 궁금하던 거나 물어봐야겠다. 내 질문에 김수환이 환하게 웃으며 내 강하게 어깨를 붙잡았다.
“그야 당연하죠! 관심 있어요, 이결 씨?”
“예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결 씨라면 우리 부마스터의 매력을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
“제가 게이트 나가면 초대권 보내 드릴게요. 그거 받으시면 바로 가입 가능합니다. 진짜들만 모인 카페라서 공개적으로는 찾기 어렵거든요.”
“그렇군요.”
나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권이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는 추천제였다니. 말을 꺼내 보길 잘했다.
그보다 초대권이라……. 뭘 어떻게 보내 준다는 거지?
‘예전에 비슷한 걸 받아 본 적 있기는 한데.’
관리하는 바에 들락거리던 남자가 블랙 초대권을 내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선 골프나 치러 오라고 했었지.
여기도 그런 느낌인 건가. 확실히… 다른 능력자도 아니고, 하태헌의 팬들이 모인 곳이니 평범하진 않을 것 같다.
“보내 주신다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이전부터 관심이 있어서요.”
“하하, 저야 좋죠. 이결 씨도 같은 허닝이가 된다니!”
허닝이?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김수환이 내게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카페 규칙을 읊어 줬다.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잔뜩 나왔다.
“마침 다음 달에 부마스터가 화보 찍는다고 해서 다 같이 조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이결 씨도 참여할 수 있겠어요.”
“조공이요?”
그게 뭐야.
어리둥절해하자 김수환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결 씨, 이런 거 처음이죠? 저도 덕질 막 시작했을 때는 모르는 게 참 많았는데.”
덕질은 또 뭔데.
“조공이라는 건, 음. 회원들이 다 같이 부마스터에게 선물을 준비해서 주는.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오. 선물도 해 주는구나. 굉장히 흥미롭다.
“부마스터가 겉보기와 다르게 은근 다정하시잖아요? 매번 감사하다는 말도 꼬박꼬박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준비할 맛이 나죠.”
“선물은 대체로 뭘 줍니까?”
“때마다 다른데 명품이라든가, 도시락이라든가……. 화보 촬영 때는 밥차 같은 거 보내 주기도 하고.”
다른 건 몰라도 명품이라면 안다. 요컨대 비싼 걸 줘야 한다는 건데.
‘사업적 관계에 놓인 상대방에게 선물 보내는 거랑 비슷하네. 가격이 곧 성의가 된다는 거군.’
옆에서 하나하나 알려 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나는 한이결이 된 이후 처음으로 상대방의 연락처가 궁금해졌다.
“김수환 씨, 나중에 게이트 나가면 번호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이제 같은 허닝이가 되는 건데!”
“……?”
어쨌든 알려 준다는 거지?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한이결 인생에 첫 친구로 김수환이면 나쁘지 않았다.
***
게이트에 들어온 지는 이틀째가 되자, 처리된 방의 개수는 10개를 훌쩍 넘어갔다.
그사이 나는 다른 길드원들과도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사이가 됐다.
딱히 뭘 한 건 아니고, 김수환이 가는 곳마다 나를 끌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하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가 로헌 길드원들과 친해지는 게 불만스러운지, 자꾸만 하태헌이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본다는 것이다.
“저어, 이결 씨.”
머뭇거리는 부름에 시선을 내리자 상대방이 들고 있던 수프 그릇을 슬쩍 내밀었다.
“방금 막 만든 수프예요. 드시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백다연. 원거리팀 소속 능력자로, 통성명한 이후로 계속 내 주변을 맴돌며 이것저것 챙겨 주곤 했다.
내가 수프 그릇을 받아 가자 백다연이 살짝 안도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나도 어색하지만 마주 웃어 줬다.
‘또 이러네.’
수프 그릇을 받을 때부터 등 뒤로 느껴지던 시선이 백다연과 내가 마주 웃자 한층 더 강렬해졌다. 이러다 등 뚫리겠다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
“…….”
날 노려보는 것을 들켰음에도 하태헌은 뻔뻔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 아무리 내가 못 미덥다지만, 길드원과 친하게 지낸다고 저렇게까지 싫어할 건 뭐란 말인가.
소설에서는 저렇게 쪼잔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태헌을 외면하고 수프를 떠먹었다. 내 팔자야.
간단한 식사 시간을 가진 이후, 남은 방을 처리하기 위해 하태헌은 다시 길드원들을 1팀과 2팀으로 나눴다. 나는 이번에도 하태헌이 이끄는 1팀이었다.
14번째 방 입구에 선 하태헌이 보석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맨 끝에 서서 팀원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던 나는 문에 박혀 있는 보석이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분명 하태헌이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푸른색이었는데.
“이결 씨, 뭐 해요?”
“……아닙니다. 갑니다.”
김수환의 부름에 나는 일단 문이 닫히기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왜 갑자기 붉게 변한 거지?’
아무래도 이거… 하태헌에게 보고해야겠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하태헌을 찾는데, 길드원들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몬스터가 안 보이지?”
“이번 방 몬스터가 뭐였죠?”
“독이빨 벌레요. 원래 벽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떤 방보다 새하얀 빛이 가득 차 있는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졸지에 할 일이 사라진 길드원들이 무기를 내리며 웅성거렸다.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지?”
“지금 문 안 열리죠?”
“나 참.”
역시 그 붉은 보석이 무슨 장치라도 되는 거였나.
나는 그들을 지나쳐 가장 깊숙한 곳에 서 있는 하태헌에게로 급히 걸어갔다.
“부마스터.”
내가 다가가자 하태헌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그러더니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뭡니까?”
“…….”
이 자식이. 나도 마음 같아서는 계속 무시하고 싶거든? 보고를 안 할 수도 없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알려 드릴 게 있어서요. 문에 박혀 있는 보석이…….”
끼기긱.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방금 무슨 소리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내가 말을 중간에 끊어 내자 하태헌이 재촉했다.
“보석이 어쨌다는 겁니까? 미리 말하지만 못 가져갑니다.”
“……저도 압니다. 그딴 걸 왜 가져갑니까?”
몬스터 나오는 방을 막아 내는 보석 따위, 엄청나게 찜찜하잖아. 이쪽에서 사양이다.
“보석을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라, 상태가 좀 달라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상태?”
“예. 보석의 색이 변했습니다. 붉은…….”
쿠구궁! 덜컹!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바닥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하태헌이 딛고 서 있는 바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 바라보고 있던 하태헌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새까만 구멍 속으로 훅 떨어졌다.
“―하태헌!”
“꺄아악!”
“뭐, 뭐야!”
“부마스터!”
급히 팔을 뻗었지만, 간발의 차로 그를 붙잡지 못했다.
젠장!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길드원들의 비명과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태헌!”
위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진 채, 어둠 속으로 먹혀들어 가는 하태헌을 붙잡기 위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잡아!”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하태헌이 겨우 나를 붙잡았다. 급박한 와중에도 맞잡은 손에 안도감이 들었다.
‘능력을……!’
휘이이잉!
바람을 끌어 올려 떨어지는 몸을 멈추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우리를 아래로 잡아끌어 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힘으로는 추락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엄청난 양의 기운이 사용되자 팔찌가 부르르 떨렸다.
“크윽, 좀…! 되라고!”
겨우겨우 몸을 받친 바람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하태헌도 나처럼 먼지를 이용해서 발판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내 바람과 하태헌의 검은 먼지가 힘겹게 형태를 유지하며 우리를 감쌌다.
쿠웅!
“으윽!”
“큭!”
능력이 성공하자마자 바닥에 몸이 부딪혔다. 조금만 늦었으면 즉사하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으, 괜찮습니까?”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라 하태헌의 상태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듬더듬 바닥을 손으로 짚는데, 어째 따듯하고 푹신했다.
“……비켜라.”
“예?”
목소리는 꽤 가까이 들리는데 보이는 건 없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는 하태헌은 나와 달리 앞이 보이는지, 아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비켜.”
“아니, 비키라고 해도 보이는 게 있어야…….”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바닥을 매만졌다. 둥근 굴곡이 느껴졌다. 벌린 다리 사이로도 무언가가 있다. 대체 뭐지. 엎어져 있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자, 바닥이 움찔 떨렸다.
“하아…….”
하태헌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능력을 사용했다. 어딘가에서 하늘하늘 날아온 먼지들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둡던 눈앞이 좀 밝아졌다.
“…….”
“…….”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있는 하태헌의 얼굴과 깔아뭉개고 있는 그의 몸을. 이상하게 생긴 바닥인 줄 알았는데, 그게, 그러니까…….
“……비켜라.”
“옙.”
나는 바닥인 줄 알고 실컷 주물렀던 하태헌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허둥지둥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것도 이제 보니 하태헌의 하반신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서 뒷걸음질 치자, 그제야 하태헌도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둘이 떨어지는 충격을 한 사람이 모두 받았으니 SS급 신체라고 해도 불편한 모양이다.
“큼, 그래서.”
어색한 공기에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딜까요?”
“모른다.”
하긴. 알고 있었으면 당하지도 않았겠지.
“문에 박혀 있는 보석이 붉은색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깊어도 한참 깊은 곳에 떨어졌는지, 위를 올려다봐도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밝힐 수 있는 거라고는 하태헌의 반짝이는 먼지뿐이었다.
난 두 팔을 가로로 크게 뻗었다. 다행히 양쪽으로 벽이 느껴졌다. 복도인가?
“일단 움직여 보죠. 여기서 계속 있어 봤자…….”
“왜 따라 떨어진 거지?”
하태헌이 내 말을 끊어 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