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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52)화 (52/394)
  • 52화

      

    여신상이 중앙에 세워져 있는 게이트 내부 홀은 지나오면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거대한 여신상 앞으로 걸어온 나는 조심스럽게 능력을 써서 날아올랐다. 여신상 너머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길드원들이 작게 보였다.

    “이렇게 보면 평범한 조각상이긴 한데…….”

    역시 아까 느꼈던 그 섬뜩함은 기분 탓이었나. 대리석을 깎아 만든 여신상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나는 사람 근처를 맴도는 파리처럼 여신상을 계속해서 기웃거렸지만, 딱히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으음…….”

    역시 착각이었나 봐. 멀쩡한 조각상을 계속 의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능력을 끄고 아래로 내려왔다.

    “응?”

    여신상의 오른편 바닥에 둥근 무언가가 밟혔다. 허리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자 푸른 보석이 보였다. 문에 박혀 있던 보석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그극.

    그 순간, 어딘가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잘못 들었나.’

    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며 여신상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결 씨! 어디 갔다 와요? 한참 찾았는데.”

    “네?”

    내가 나타나자 김수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간단한 수프를 좀 만들었거든요. 식사 시간이라서. 근데 이제 남는 게 없는데…….”

    “아, 전 괜찮습니다.”

    딱히 허기지지도 않고. 한 끼 좀 안 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 별 상관없었다. 미안해하는 김수환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웃어 주는데, 건너편에서 무언가 휙 날아왔다.

    “아.”

    반사적으로 받아 냈다. 포장된 샌드위치였다.

    “드십시오.”

    내게 샌드위치를 던진 하태헌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은데. 괜히 신경 쓰게 만들었나 보다.

    “맞아요, 이결 씨. 나중에 배고프면 기운 내기 힘들잖아요. 그리고 이결 씨는 좀 드셔야 해요. 너무 말랐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하태헌을 보던 김수환이 엄한 표정으로 잔소리했다.

    “그렇습니까?”

    “네. 봐 봐요, 손목 가는 거. 한 손에 다 잡히네.”

    김수환이 내 손목을 잡으며 조잘거렸다. 손목은 원래 손에 잡히는 부위 아닌가.

    ‘한이결 몸이 볼품없긴 하지.’

    마르기도 하고. 남자치고 피부도 너무 하얗다. 여름에 바닷가라도 가서 일부러 태워야 하나.

    “김수환 씨.”

    딴생각을 하며 김수환의 말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데, 하태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예의가 너무 없으신 거 아닙니까? 손은 놓으십시오.”

    “헙, 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결 씨.”

    뼛속까지 시려 오는 서늘한 지적에 김수환이 당황하며 내 손목을 놓았다. 덩달아 나도 당황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

    “한이결 씨.”

    “예?”

    “따라오십시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미친. 왜 이래?’

    나는 김수환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고개를 저었지만, 하태헌은 따라오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만을 보내왔다. 하, 대놓고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결국 잔뜩 시무룩해진 김수환을 뒤로하고 하태헌을 따라갔다. 자신의 우상에게 한 소리 들은 김수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태헌 씨, 잠깐만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하태헌의 뒤를 거의 뛰듯이 쫓았다. 그가 멈춰 선 장소는 커다란 기둥 뒤, 빛이 닿지 않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었다.

    길드원들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진 것을 확인한 하태헌이 나를 내려다봤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싸늘한 눈을 보아하니 기분이 저조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김수환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새 친해졌나 보군. 쓸데없는 걱정도 해 주고.”

    “친해지긴 누가 친해졌다는 겁니까? 하태헌 씨 태도를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내 태도가 어쨌다는 거지?”

    “몰라서 묻습니까? 아까 쉬리커 방에서도.”

    “함께 게이트로 들어온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쪽이 더 부자연스럽다.”

    “변명하지 마세요. 그쪽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가 식사 걸렀다고 샌드위치를 챙겨 주는 성격입니까?”

    내 말에 하태헌이 눈썹을 까딱이더니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 잘했군. 남들은 시간 맞춰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 넌 어디서 뭐 하고 있었길래 그런 것도 못 하지?”

    “휴식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까지 보고해야 합니까? 그리고 한 끼 정도는 넘겨도 문제없습니다.”

    “가뜩이나 비실거리는 주제에 끼니 거르는 게 자랑인가?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먹어라.”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먹어? 나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싫습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입맛도 없습니다.”

    “강제로 처넣기 전에 알아서 먹어라.”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꿋꿋하게 거절하자 하태헌의 눈에 불길한 빛이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는 내 목을 하태헌이 빠르게 잡아챘다.

    “윽, 무슨―”

    “조용히.”

    하태헌의 팔을 붙잡고 힘을 주었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팔이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내가 버둥거리는 사이 샌드위치를 가져간 하태헌이 이로 포장지를 뜯어냈다.

    “자, 잠깐…….”

    강제로 먹이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거야? 이 미친!

    “입 벌려.”

    “하태헌 씨. 잠깐만요. 제가 먹을게요. 이것 좀 놔 봐요.”

    “그딴 뻔한 거짓말에 더는 안 속는다. 입 벌려.”

    깔끔하게 포장지를 벗겨 낸 샌드위치가 입가로 다가왔다.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하태헌은 내가 먹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태헌 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놔주시면 제 손으로 먹을게요. 거짓말 아닙니다.”

    안 되겠다. 나는 방법을 바꿔 잔뜩 슬프고 처연한 표정으로 하태헌에게 빌기 시작했다. 최대한 진심을 담은 눈으로 놔달라 호소하자 하태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효과가 있는 건가?

    “마지막이다. 입 벌려. 이번에도 안 벌리면…….”

    “아오! 알겠다고요. 벌린다, 벌려!”

    짜증 나도록 고집 센 주인공 새끼!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최대한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술 사이로 샌드위치가 들어왔다.

    “씹고 삼켜라.”

    “…….”

    시발, 개 같은.

    마치 어린아이 가르치듯 하는 말에 얼굴이 훅 뜨거워졌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커다란 기둥이 나와 하태헌을 가려 줘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우웁, 잠깐, 천천히…….”

    “바라는 것도 많군.”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먹겠다고! 억울함을 담아 하태헌을 노려봤지만, 그는 굳건히 내 입 안에 샌드위치를 쑤셔 넣을 뿐이었다.

    우물우물…….

    “고작 샌드위치 하나 먹는 데 한 세월이 걸리는군.”

    우물…….

    안타깝게도 먹는 중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하태헌이 목을 가볍게 잡아서 삼키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입 안이 작아서 그런가.”

    하태헌이 뭐라 중얼거리든 나는 씹는 것에 열중했다. 한시라도 빨리 하태헌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내가 겨우겨우 샌드위치를 모두 씹어 삼키자 하태헌이 목을 놔주었다. 급하게 먹느라 갑갑해진 가슴을 툭툭 치는 나를 보며 하태헌이 비웃었다.

    “웃기는 꼴이군.”

    “…….”

    참자.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물었다.

    “…저한테 불만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하태헌 씨.”

    “불만?”

    “로헌 길드에서는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이제는 식사 걸렀다고 손수 챙겨 주시고. 제가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합니까?”

    “장단을 맞춘다라.”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하태헌이 대답했다.

    “맞춰 줄 의향이 있었다는 게 놀랍군.”

    “하태헌 씨라면 그 정도 서비스야 충분히 해 드릴 수 있긴 합니다만, 별로 원하는 것 같진 않네요.”

    “구경하는 재미는 있겠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의심스럽고, 믿기 어려우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런 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태헌 씨를 위해…….”

    “상관없다.”

    그가 내 말을 끊어 냈다. 미처 뱉어 내지 못한, 뭐든 도울 수 있다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네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관심 없다. 쓸 만한 놈인지만 알고 싶을 뿐이지. 그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할 거고.”

    “……하태헌 씨, 저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와 하태헌 씨가 그래도 최소한 거래를 할 정도의 신용은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태헌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으니까. 다 안다. 아는데.

    ‘그래도 씁쓸하네. 나는 진심인데.’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내가 하태헌, 그쪽을 얼마나 진심으로 응원하고 좋아했는지를.

    “하지만 이제 보니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없으니 물러서는 게 맞는 거겠지. 상대방에게 믿음을 강요하며 질척거리는 것도 웃기는 꼴이다.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내 말을 듣고 있는 하태헌에게 시선을 맞췄다.

    “계약 조건 기억하십니까? S급 이상의 아이템을 제공하면 제가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하셨죠.”

    “기억한다.”

    “바라는 것,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말 나온 김에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3개월 후에 중국 일정이 잡힐 겁니다.”

    내 말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곳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자를 만나게 될 거고요. 그자에 대한 정보를 제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확신하고 있군. 내가 예언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

    “일단은요.”

    내가 개입하면서 원작의 흐름이 많이 바뀌었으니, 못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말해 둬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만약 그때 만나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 언제든 만나게 됐을 때 제가 알려 주세요.”

    “하는 말만 들어 보면 예언자는 너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예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미래를 아는 거지?”

    “……죄송합니다.”

    시선을 피하며 사과하자 하태헌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재밌게 읽은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의 주인공이 그쪽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어떤 반응이려나.’

    잘해 봐야 미친놈 취급이겠지. 지금이랑 별반 다른 게 없긴 하네.

    “계약은 지켜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는 하태헌 씨에게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하, 그래. 계약.”

    하태헌이 짓씹듯 말을 뱉어 냈다.

    “걱정 마라. 네 말이 어디까지가 진짜일지 나도 궁금하니까.”

    하태헌이 그대로 등을 돌려 기둥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래서 계약 얘기는 사이가 좀 좋아지면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다 틀어져 버렸다.

    예언자는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중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터라 만나기 위해서는 하태헌의 도움이 필요했다. 원작대로 진행된다면 하태헌은 예언자를 반드시 만날 테니까.

    ‘귀찮게 됐네.’

    이제 대놓고 하태헌을 도와주기 힘들어졌다. 뭐, 뒤에서 몰래 도와주든가 해야겠네.

    마지막으로 옷을 한 번 더 툭툭 털어 낸 나는 느릿하게 기둥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심기가 사나워진 하태헌과 삼 일 동안 게이트를 돌아야 하는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제발 별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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