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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51)화 (51/394)

51화

  

하태헌이 사전에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인지,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관계자만 모여든 게이트 주변은 잡음 없이 분위기가 좋았다.

“일정은 총 삼 일간 진행되며, 다른 일이 없는 한 대열은 이대로 고정입니다. 앞으로 10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각자 아이템 점검 잘해 두시기 바랍니다.”

선두에 나가 있는 하태헌이 브리핑을 마쳤다. 대열 중간에 위치한 나는 다른 이들이 부산스럽게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저.”

옆에 서서 가방을 뒤적이던 남자가 나를 불렀다.

“한이결 씨 맞죠?”

“네.”

“제가 저번 회의에 참석을 못 했거든요. 반갑습니다.”

자신의 이름은 김수환이며, B급 능력자라고 설명한 그가 내 손을 붙잡고 두어 번 흔들었다.

“영상 보고 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레퀴엠 길드 마스터와 친하다면서요?”

“딱히 친한 것은…….”

“에이, 소문 쫙 났어요. 게다가 용병이시잖아요. 저도 능력만 됐으면 소속 없이 활동했을 텐데. 꿈이거든요.”

별다른 반응을 해 주지도 않는데도 김수환은 조잘조잘 신나게 떠들었다. 출발할 때가 다가오자 그는 내 손 위에 초콜릿을 잔뜩 올려 줬다.

“단 거 좋아하세요? 게이트 들어가면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잖아요. 그때마다 하나씩 먹어요.”

단 거…….

그러고 보니 요즘 통 간식을 못 먹던 참이라, 그가 준 초콜릿이 내심 반가웠다.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 안에 넣자 달콤한 향이 가득 퍼졌다.

“감사합니다.”

울적했던 기분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진심을 담아 웃어 주자 김수환도 씩 미소 지으며 앞으로 간식은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좋은 사람이네. 네모난 초콜릿 조각을 입 안에 굴리는데,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하태헌은 곧바로 나를 외면했다. 뭐야.

“출발하겠습니다!”

하태헌 옆에 서 있던 길드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하태헌은 망설임 없이 게이트 너머로 들어갔다.

대열을 따라 게이트 내부로 들어온 나는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뚜벅.

새하얗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이 넓게 펼쳐지고, 그 중앙에 검을 쥔 거대한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방을 둘러싼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하게 빛나며 그 아래로 천사 날개를 단 금빛 조각상들이 보였다.

“엄청나죠? 이런 분위기를 가진 게이트는 여기밖에 없을 거예요.”

“확실히 그러네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석 벽 곳곳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과 오만한 표정의 여신상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는 게이트 내부가 맞나 싶은, 고결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태헌은 모두를 이끌고 여신상을 지나쳐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동하자, 여신상을 등지고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문 여러 개가 새하얀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는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이겠다. 몬스터 등급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니 긴장을 놓지 말도록.”

내가 서 있던 지점을 기점으로 1팀과 2팀이 나뉘었다. 나와 김수환은 1팀으로, 하태헌과 함께 첫 번째 방을 들어가게 되었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문 앞에 선 하태헌이 중앙에 박혀 있는 새파란 보석을 누르자, 새하얀 대리석 가루가 부스스 떨어지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저절로 촛불이 켜지며 문이 닫혔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스으― 스후으―

금색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로브를 걸친 미라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리를 바라봤다. 비틀릴 대로 비틀린 얼굴에 안광이 번뜩였다.

“근접팀, 앞으로.”

“네!”

“원거리팀은 힐러를 지키도록.”

사라락, 검은 먼지가 몰려들었다. 하태헌은 먼지로 만들어진 검을 움켜쥐며 코앞까지 다가온 미라를 베어 냈다. 그대로 고꾸라진 미라가 새하얀 가루로 변해 파스스 흩어졌다. 얼핏 봤을 때는 대리석 가루와 흡사했다.

나를 포함해 원거리 능력자들이 힐러를 막아서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저마다 무기를 쥔 길드원들이 능력을 퍼부으며 미라를 해치웠다. B급치고도 약한 편인 미라는 공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역시 부마스터야. 너무 멋있어….”

내 옆에 서서 전투를 구경하던 김수환이 감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쵸, 이결 씨.”

“예?”

“부마스터 너무 대단하지 않나요?”

……뭘 했다고?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물론 레퀴엠 마스터도 대단하긴 하지만, 우리 부마스터도 장난 아니거든요. 이결 씨는 이번에 처음 만나서 잘 모르시겠지만. 하하!”

그제야 나는 김수환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 사람, 하태헌 광팬이군.

김수환과 비슷한 사람은 소설에서도 여러 번 등장했다. 대부분은 여자였지만, 남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팬카페 회원 수도 많다고 했었지.

‘잠깐, 그럼… 천사연 광팬도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건가?’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저었다. 살면서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측정 시작하겠습니다.”

몬스터가 모두 죽어 가루로 변하자, 힐러들과 함께 있던 측정 능력자가 중앙으로 달려갔다. 가루 위에 손을 올린 측정 능력자가 잠시간 눈을 감았다 떴다.

“별다른 이상 없습니다.”

“저번과 수치가 똑같다는 건가?”

“예. 0.5% 정도 높아지긴 했지만…… 이 정도 변화는 종종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곧바로 뒷정리를 끝낸 팀은 방을 빠져나왔다. 문 중앙에 박힌 보석은 들어갈 때와 달리 더는 빛나지 않고 흐릿했다. 아무래도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면 보석의 상태도 바뀌는 모양이다.

1팀에 이어 2팀도 무사히 몬스터를 처리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2팀을 맡은 S급 길드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하태헌에게 보고했다.

“예상대로 B급 스켈레톤이 등장했습니다. 측정 결과도 변함없습니다.”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팀을 계속 유지하는 게 낫겠군.”

“네.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나는 순간 등줄기를 치고 올라오는 오싹한 감각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이결 씨, 왜 그래요?”

“아뇨…….”

나는 서늘한 목덜미를 매만지며 여신상을 천천히 훑어봤다. 검을 든 채 서 있는 여신상은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기분 탓인가.’

묘한 찝찝함에 여신상으로부터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내가 한참을 여신상만 바라보자 김수환이 출발해야 한다며 팔을 잡아끌었다.

첫 번째 방과 마찬가지로 푸른 보석을 누르니 땅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게이트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팀원들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섰다.

팀원과 섞여 방으로 들어가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 왔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의 주인은 하태헌이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검은 하프팜 장갑의 가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뭡니까?”

“뭘 보고 있었던 거지?”

고개를 살짝 숙인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까운 거리감에 반사적으로 손목을 빼려고 하자, 하태헌이 더욱 힘주어 잡아 왔다.

나는 주변 길드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말했다.

“놓으시죠.”

“대답부터 해.”

다행히 이번 방은 불이 켜지지 않아 굉장히 어두웠다. 여기저기에서 주변을 밝힐 만한 물건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궁, 열려 있던 문이 닫히자 하태헌의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별거 아닙니다. 그냥…….”

“말해. 별거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집요하게 구는 하태헌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불 켜는 장치 발견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도중에 방 안에 불이 밝혀졌다. 내가 황급히 하태헌을 밀쳐 내는 것과 동시에 김수환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마스터?”

“……근접팀은 뒤로 빠지고 원거리팀은 날 따라오도록.”

하태헌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명령하며 나를 지나쳤다. 그 뒤를 따르며 김수환이 내게 속삭였다.

“저기, 이결 씨. 혹시 부마스터가 뭐 시켰어요? 얘기 중인 것 같던데.”

“아뇨. 부마스터께서 제게 말 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내가 잘못 봤나 보네.”

고개를 기웃거리던 김수환이 내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가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원거리팀 일렬로.”

정면에 위치한 새하얀 벽으로부터 꾸불텅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불투명하고 흐물흐물한 몸체를 가진 몬스터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가오리와 생김새가 흡사했다.

독을 뿜어내는 B급 몬스터, 쉬리커. 이 몬스터 같은 경우에는 혈액에도 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갈수록 위험했다. 우리를 발견한 수십 마리의 쉬리커가 몸을 파르르 떨더니 새하얀 독 연기를 뿜어냈다.

취이이익―

굳이 하태헌이 명령하지 않아도 뭘 해야 할지 알았다. 나는 능력을 끌어 올려 수십 마리가 뿜어내는 독 연기를 한곳으로 모았다.

“공격.”

연한 하늘빛 장막이 앞에 세워지자마자 능력자들이 쉬리커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김수환도 손에 들고 있던 투명하고 얇은 낚싯줄을 쉬리커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검에 베인 것처럼 쉬리커가 여러 갈래로 잘려 나갔다.

시이이잇! 시이익!

독성 가득한 쉬리커의 새하얀 피가 이곳저곳에 튀었지만 연 하늘빛 장막에 모두 막혔다. 쉬리커가 모두 죽자 내가 붙잡고 있던 독 연기도 천천히 사라졌다.

“실드 거두겠습니다. 물러서세요.”

쉬리커의 능력인 독 연기는 사라졌지만 피는 그대로였다. 길드원이 모두 물러나자 실드 능력자가 조심히 능력을 거뒀다.

“이야, 고생했네.”

“역시 쉬리커는 B급치고 처리가 까다롭단 말이지.”

돌아오는 원거리팀을 구경 중이던 근접팀 반겨 줬다. 그사이, 쉬리커 혈액 근처에서 측정을 끝낸 측정 능력자가 하태헌에게 말했다.

“정상적인 수치입니다.”

“혹시 모르니 남은 방도 측정은 계속하도록.”

“네.”

나는 아까 김수환에게 받은 초콜릿을 하나 까먹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길드마다 전투 방식도 분위기도 많이 다르네.’

여러 길드와 게이트를 경험하는 편이 좋을 거라던 우서혁의 말이 이해가 갔다. 천사연이 이끄는 클리어팀은 자유롭고 개성적인 반면, 하태헌이 이끄는 클리어팀은 좀 더 체계적이고 질서가 잡혀 있었다.

‘둘 다 나쁘지 않네.’

천사연은 재밌는 대신 몸이 고생이고, 하태헌은 좀 지루한 대신 몸이 편했다. 리더의 성격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2팀, 이번 방도 깔끔하게 처리 완료했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방 밖으로 나오자 먼저 나와 있던 2팀이 보고했다. 하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휴식하겠습니다. 무기 점검하시고,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십시오.”

길드원들이 한숨을 돌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뒤로 빠졌다.

이 틈에 여신상을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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