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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48)화 (48/394)

48화

  

“흐응, 친구라고?”

눈썰미 좋은 차수연이 그 모습을 놓쳤을 리가 없다.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에 김우진이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이제 가자, 한이결. 볼일 끝났잖아.”

그렇기는 한데.

“어딜 가? 핸드폰 달라니까.”

“당사자가 주기 싫다잖아. 진짜 눈치 없는 여자네.”

“내가 눈치가 있건 말건, 그쪽은 뭔데 자꾸 끼어들어요?”

“치, 친구니까!”

“친구는 무슨. 거짓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둘 다 그만.”

“하지만 이 여자가!”

“이 사람이 자꾸 시비를!”

결국 교통정리는 내 몫이었다.

“조용히 해, 김우진. 너 내가 언제 나서도 된다고 했냐? 능력도 멋대로 풀고.”

“그건…….”

“차수연 씨. 번호는 제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알려 드리지 못합니다. 용건은 그분 통해서 전달할게요.”

“그분이라면…….”

내 말뜻을 바로 알아챈 차수연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혹시 사정이라는 게…… 그분 때문이야?”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렇게 안 봤는데 애인 단속이 심한 편인가 봐? 여자 번호는 저장도 못 하게 하나 보네.”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나와 같이 차수연의 말을 듣고 있던 김우진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로헌 길드 입원실에서의 해프닝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오해가 아직도…….

“참나, 어이없어서. 그런 의도로 번호 달라는 거 아니거든?”

“아니, 그거야 저도 알죠. 아는데.”

“어휴……. 완전히 붙잡혀 사나 보네. 알겠어.”

“그러니까 이게 오해가…….”

차수연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팩하니 등을 돌렸다.

“일단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간다. 다른 용건 있으면 그분! 통해서 연락하든가.”

“자, 잠깐…….”

가시가 뾰족하게 돋친 말을 마지막으로 차수연은 미련 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오해를 풀기도 전에 가 버린 차수연을 허망하게 바라보는데, 뒤에서 김우진이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인?”

“…….”

대체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풀어 가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

이후, 23층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하루가 넘도록 김우진에게 시달려야 했다. 김우진은 잔뜩 불신 어린 얼굴로 나를 닦달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말한 애인이 누구냐니까?”

“애인 아니라고…….”

“그 여자 말은 뭐야, 그럼?”

“그러니까 오해인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오해를 해?”

“…….”

안타깝게도, 김우진이 묻는 말들은 하나같이 답해 주기 애매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난감해서 볼만 긁적였다. 결국 내가 해 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어쨌든 오해야.”

“…….”

김우진이 나를 배신자 보듯 노려봤다. 이쯤 되면 나는 오히려 궁금해졌다.

‘아니, 진짜 애인이 있으면 어쩔 건데?’

물론 남자 애인 따위 필요 없지만, 어쨌든.

오해라고 말해도 믿어 주질 않으니 내가 더 해 줄 것은 없었다.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시큰둥해지자, 김우진이 날카롭던 눈초리를 슬쩍 아래로 내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 말을 안 믿는 건 아니고…….”

안 믿는 거 맞구만, 무슨.

“그냥, 나는…….”

“됐어.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나는 이해시키기를 포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간단하게 챙겨 먹고 씻으려는데, 김우진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진짜 너무해…….”

“또 뭐가.”

김우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마치 자신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내가 혼냈다는 양 잔뜩 억울한 눈빛이었다.

“나는 너 집에도 데려가 주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도 다 말했는데.”

“야, 그건…….”

“너는 나한테 숨기기만 하잖아. 역시 아직 내가 싫은 거지?”

이 말 저번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개새끼…….”

김우진이 울적한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우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김우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 행동에 당황하는 김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음,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나야말로 섭섭한데. 김우진. 너 내 말 못 믿냐?”

“어? 아니……. 믿, 믿지.”

대답하는 김우진의 표정이 어딘가 멍했다.

“나중에 상황 정리되면 말해 줄게. 그럼 되잖아. 애인 아닌 건 이제 좀 믿고.”

“어, 어…….”

사춘기 애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자 김우진이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다. 김우진은 여러모로 한창때의 고등학생 같았다. 예민하고, 감정적이고 그런.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그런 것 같은데.’

나도 같은 경험을 해서 그런가, 매정하게 내치기가 힘들었다.

턱을 놔주자 김우진이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도 징징거렸던 행동이 부끄럽긴 하겠지.

“나, 나중에 말해 준다는 거지? 나한테 제일 먼저?”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는 성의 없이 대꾸하며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둔 하태헌의 핸드폰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슬슬 연락할 때가 되기는 했는데. 대가도 말해야 하고…….

“……배 안 고프냐? 뭐 만들어 줄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김우진이 주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라 나는 냉큼 받아들였다.

“간단하게 배 채울 수 있는 거로.”

“알겠어.”

순순히 주방으로 향하는 김우진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요리 솜씨 하나만큼은 꽤 괜찮다니까.

***

다음 날 오후, 천사연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대표실로 올라가니 검은 정장을 입은 채 창밖을 보고 있는 천사연과 서류를 들고 서 있는 우서혁이 있었다.

“많이 바빠 보이십니다.”

우서혁이 보고 있으니 반말 대신 존댓말로 말문을 열자 천사연이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하지. 이 시기에 바빴던 적은 처음인데.”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항상 지루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서 좋다는 말.”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천사연이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 소파를 손짓했다. 소파에 착석하자 우서혁이 다가와 서류를 건넸다.

“알아보니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게이트에 비정상적인 움직임이 감지됐다는군.”

“공통점은 있답니까?”

“아쉽게도 아직.”

나는 서류를 펼쳤다. 그곳에는 서울에 포함된 게이트가 구역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밖에서는 확인이 불가하니 직접 들어가 봐야겠지.”

“클리어해야 할 게이트 목록입니까?”

“그래, 서울에 속한 게이트의 딱 절반이지. 2개월 내로 게이트 반절을 클리어할 계획이야. 남은 반절은 이후에 처리하고.”

“깔끔하네요.”

천사연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나를 바라봤다. 왜 또 저렇게 보는 거지. 천사연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우서혁, 잠깐 나가 있어.”

“예.”

짧게 묵례한 우서혁이 대표실을 나갔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한이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천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한번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는데.”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분위기는 아까와 달랐다. 나는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애써 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해.”

“너는 어디까지 개입할 생각이지?”

“…….”

개입이라.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놨다. 직감적으로 천사연이 하고자 하는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적절한 답은 아니군.”

나는 한숨을 삼켰다.

“지난 며칠간 생각해 봤지. 네가 게이트를 신경 쓰는 이유에 대해.”

“…….”

“그렇지 않나. 그저 무소속 A급 능력자일 뿐인데, 게이트가 달라졌다고 이토록 관심을 쏟는다는 게. 직접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면서까지.”

“……나한테 쓸데없는 관심이 너무 많네.”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차분하면서도 무자비한 시선이었다.

“어차피 너도 내가 눈치챌 거라고 예상한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각 잡고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해, 한이결.”

어물쩍 넘기려는 내 태도를 눈치챘는지, 천사연이 단호하게 요구했다.

“협력 관계인 이상, 중요한 것은 알아야 하니까.”

“협력 관계 그만하고 싶어지는데.”

“이런.”

그가 짧게 웃었다. 언뜻 아쉬워 보이지만, 내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점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천사연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렵든 간에, 그가 가져다주는 정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야.”

어떤 식으로 정리해서 설명해 줘야 할지 고민됐다. 김우진처럼 적당히 넘길 만한 상대도 아니고.

“그저, 짐작하는 게 있을 뿐이지.”

“짐작이라면… 게이트가 이상해진 원인인가?”

쯧. 나는 혀를 찼다. 역시 다 눈치채고 물어본 거잖아. 성격 진짜 더럽다.

“그래. 난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유는?”

“어쩌다 보니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서.”

3개월이나 앞당겨서 꺼낸 SS급 코트. 그 과정에서 깨어난 정체불명의 S+급 몬스터. 그 직후 C13 구역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터져 나왔으니, 시기상으로는 딱 맞물렸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내 말에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연이 얼마 가지 않아 입을 열었다.

“나비 효과라고 들어 본 적 있나?”

“알긴 아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쪽 같군.”

무슨 뜻이지. 내가 눈가를 찌푸리자 천사연이 느긋한 어조로 설명했다.

“단순히 숨겨진 것을 건드렸다고 해서 이 정도로 뒤틀리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야.”

숨겨진 것? 나는 침착하게 천사연을 바라봤다.

남이었으면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넘겼겠지만, 상대가 천사연이니 절로 신경 쓰였다. 설마 SS급 코트에 대해서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원인이 너라면, 그건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닌 네 존재 자체겠지.”

그 말에 심장 한쪽이 서늘해졌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존재 자체라.”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그건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

나는 시선을 내렸다.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다.

“나야 재밌으니 뭐가 원인이든 상관없어.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군.”

“이렇게 재미없는 협박은 처음이네.”

“협박?”

천사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협박이라니. 내 앞에서는 솔직해져도 된다는 다정한 위로인데.”

“…….”

“한이결.”

그가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뿐이지. 너와 나 사이에 변한 것이 있던가?”

“그건.”

“너는 여전히 내게 묶여 있고, 널 가장 잘 아는 건 나야.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술은 아무 말도 뱉어 내지 못했다.

“원하고 있잖아.”

“…….”

“한이결이 아닌, ‘너’로 봐 주기를.”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울컥거리는 무언가를 억지로 삼켜 내며 입을 열었다.

“아는 척하지 마. 나는…….”

나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천사연의 멱살을 붙잡아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 당장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는 내게 천사연이 천천히 다가왔다. 쭉 뻗은 새하얀 손이 내 목을 훑고 지나와 목덜미를 감쌌다.

“숨길 필요 없어, 한이결.”

그가 내게 해 주는 말은 지나치게 달았다. 너무 달아서 독처럼 느껴졌다.

“타인이 아닌, 온전한 너로 봐 주기를 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니까.”

“그딴 배려, 바란 적 없어.”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천사연이 허리를 감싸 왔다. 그의 품에 안겨지니 싸한 향수가 코끝을 스쳤다.

“너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주변만 헤집다가는 아마 제일 먼저 고장 날 텐데.”

“……날 제일 험하게 다루는 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웃기네.”

“저런. 서운했나?”

나는 착잡한 숨을 내쉬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조심성이 없었는지 알게 되니 무척이나 씁쓸했다.

「너 하나가 모든 것을 망쳤어.」

잔뜩 원망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잊고 있었던 절망감이 천천히 몸을 집어삼켰다.

천사연에게 안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얼굴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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