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게이트에 대한 건?”
결국 카드 문제는 포기하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몸살을 앓느라 게이트를 나온 후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군.]
“뭐? 왜?”
[얼굴 보고 하지. 이틀 뒤에 돌아가니까 그때까지 쉬도록 해.]
돌아간다고? 나는 무심코 물었다.
“어딘데?”
천사연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나에 대해서 이렇게나 궁금한 점이 많았다니. 감격스럽군.]
“헛소리 말고.”
[하하.]
통화 너머로 천사연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듣기로는 수행원 같았다.
[이만 끊지. 그동안 보고 싶더라도 참고.]
미친놈.
나는 질색하며 곧바로 통화를 끝냈다.
‘잠깐. 결국 어딘지 못 들었잖아.’
뭐 하나 해결된 게 없네. 한숨을 내쉬었다.
벌컥-
“우리 왔…… 이결 씨, 왜 그래요?”
“아닙니다.”
때마침 커피를 사러 나갔던 민아린과 김우진이 돌아왔다. 나는 김우진에게서 커피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오늘 병실 정리하고 23층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괜찮겠어요? 하루 정도는 더 누워 계시는 게 어때요?”
“좀이 쑤셔서 못 하겠네요.”
몸살도 다 나았으니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던 민아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 휴가도 끝났으니까 여차하면 이결 씨 한정 긴급 출동해 주죠, 뭐.”
“그러실 것까지는…….”
“제가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민아린이 내 손에서 뺏듯이 핸드폰을 가져갔다. 나는 따라 하지도 못할 속도로 타다닥 화면을 터치한 민아린이 이내 핸드폰을 돌려줬다.
“제 번호 저장해 놨어요. 힐러 번호 따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시죠?”
“하하, 그럼요.”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하세요.”
민아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혼내듯 말했지만 무섭지는 않고 귀엽기만 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민아린의 번호가 저장된 핸드폰을 바라봤다. 어째 갈수록 저장되는 번호가 많아지는 것 같은데.
짐을 챙겨 병실을 나서는 내게 민아린은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지만, 내가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호출이 들어왔다. 듣기로는 막 클리어가 끝난 게이트에서 부상자가 나온 모양이다.
“다음에 꼭! 놀러 가요.”
아쉽다는 얼굴로 민아린이 떠났다.
나는 김우진을 데리고 23층 방으로 돌아왔다.
병실에서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하얀 티에 짙은 남색 블루종을 걸쳤다. 내가 옷을 갈아입자 김우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나가게?”
“잠깐 가 볼 곳이 있어서.”
“나도 갈래.”
왜 안 그러나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대답했다. 매번 거절당한 터라 별 기대 없이 날 바라보던 김우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디 가는데?”
핸드폰으로 목적지를 검색해 본 나는 김우진과 함께 길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침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올라타며 대답했다.
“G21 구역.”
***
택시에서 내린 나는 통제선 근처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인파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태로는 보이는 것도 없겠다.
“김우진. 가까이 와 봐.”
“어?”
내 부름에 가까이 다가온 김우진의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능력을 사용했다. 김우진의 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야,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내 허리 좀 붙잡아. 자세가 영…….”
“…….”
“김우진?”
의아해서 올려다보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김우진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래.
“김우진. 괜찮냐?”
“어? 어…….”
“내 허리 좀 잡으라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불안하잖아. 내 말에 김우진이 기름칠 덜 된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좀 낫네. 나는 고도를 더 높였다.
“별로야? 아무래도 둘이서는 이게 편해서.”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 싫으면 아래에서 기다리든가.”
따로따로 몸을 띄울 수 있기야 하지만, 그러면 빠져나가는 기운의 양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두 배라서 귀찮았다.
“아냐. 진짜 괜찮아.”
김우진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안색은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혹시 하태헌처럼 높은 곳이 무서운 건가?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혼자 움직여야겠다.
“……아무튼, 여기는 왜?”
“확인할 게 있어서.”
천사연은 돌아올 때까지 쉬라고 했지만, 그 말을 순순히 들을 내가 아니었다.
‘천사연이 전해 주는 정보를 속 편하게 믿기도 싫고.’
물론 그렇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 G21 구역도 혹시나 해서 와 봤을 뿐이다.
“열렸습니다!”
“게이트 문이 열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굳게 닫혀 있던 게이트가 입을 벌리며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물러서십시오.”
“안전 거리를 지켜 주십시오!”
“차수연 씨!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클리어 시간이 늦어진 이유가 뭡니까?”
오래 기다린 만큼 더욱 치열해진 기자들을 경호원들이 겨우 막아 냈다. 나는 저마다 다친 상처를 끌어안고 나오는 클리어팀 사이로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나 모자 빌려주고 너는 능력 써.”
김우진의 머리에 쓰인 모자를 내가 가져와 쓰며 말했다. 김우진은 의아해하면서도 능력을 사용했다.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졌다.
그 상태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안전선 안으로 내려갔다.
“차수연 씨.”
다쳤는지 치료 받고 있는 차수연에게로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날 돌아본 차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여긴 어떻게…….”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잠시 고민하던 차수연이 힐러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 다른 분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힐러가 떠나가자 차수연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나를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잡아끌었다. 나는 눈을 가릴 정도로 깊게 눌러썼던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차수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그럴 리가.”
내 물음에 차수연이 코웃음을 치며 도도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차수연이라면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긴 하지.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운이 좋네요.”
“퍽이나.”
진심이었는데 차수연은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전이나 지금이나 유독 나를 믿어 주질 않는다. 좀 억울하네.
“뭐 때문에 온 건데?”
“게이트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차수연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눈치도 빠르셔라.”
사실 타 길드에 소속된 게이트의 정보를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차수연이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다.
“며칠 전에 레퀴엠 길드원들과 게이트를 다녀왔습니다.”
“알아. 인터뷰하는 거 봤어.”
“…….”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가까스로 펴 낸 나는 멈췄던 말을 이어 갔다.
“게이트 내부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더군요.”
“설마…….”
“네. 대부분 몬스터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숫자도 늘어났고.”
거기까지 들은 차수연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어간 게이트도 그랬는지 물어보려고 온 거야?”
“일단은요.”
고민하는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던 차수연은 이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나도 네가 겪은 그대로였어.”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여기, G21 구역은 예전부터 내가 담당해 온 게이트 중 하나야. B급인 데다 몬스터의 수가 적고 넓지도 않아서 클리어하기 쉬운 게이트였지.”
B급 게이트답게 C급과 B급 몬스터가 주를 이루던 G21 구역 게이트.
그 게이트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몬스터가 하나도 빠짐없이 강해져 있었어. 측정 능력자를 데려가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를 포함해 모든 팀원이 느꼈지. 뭔가 잘못됐다고.”
“C급은 B급으로, B급은 A급으로 등급이 올라간 거군요.”
“아마 그럴 거야. 네 말대로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숫자까지 늘어나 있었어.”
차수연이 G21 구역 게이트 클리어에 나선 것은 이번이 세 번째. 두 번이나 들어갔던 만큼,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어느 정도로 나오는지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고 한다.
“10마리가 나와야 할 곳에 20마리가 나타나고, 중간에 다른 몬스터가 끼어들고…….”
차수연이 지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마스터 말대로 힐러를 한 명 데려가서 다행이지, B급 게이트라고 우습게 봤다가 큰일 날 뻔했다니까.”
“마스터라면… 홍시아 마스터?”
“응. 원래 그런 부분에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닌데, 이번에는 꼭 데려가라고 잔소리 엄청나게 하시더라고.”
차수연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말하고 보니 이상하네. 왜 하필…….”
“짐작하고 계셨을 수도 있겠네요.”
나와 천사연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빠져나온 지 나흘째. 내가 한참 몸살을 앓을 동안 천사연이 게이트의 위험성을 마스터들에게 알린 거라면, 홍시아 마스터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가 간다.
“확실한 것은 어느 게이트가 이상해졌는지는 직접 들어가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모든 게이트가 다 변한 것은 아니니까요. 홍시아 마스터께서도 차수연 씨가 걱정돼서 힐러를 참여시킨 거겠죠.”
“…뭐어, 그 언니가 의외로 섬세한 성격이기는 해.”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얼굴에서 길드 마스터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엿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천사연을 떠올렸다.
‘아니, 이건 아니지.’
나는 무소속인데 왜 천사연을 떠올리냐. 나는 급히 천사연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말했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가 볼게요.”
“뭐? 벌써?”
“예.”
이제 할 말도 없는 데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만히 서 있는 김우진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이만 가 보려는데, 의외로 차수연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
“뭐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어이없잖아! 저번에도 그렇고. 너는 용건만 끝나면 다야?”
뭐 어쩌라는 건가 싶어서 멀뚱히 바라보자, 차수연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뭐를요?”
“뭐긴. 핸드폰!”
당당히 외치는 말에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려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 핸드폰은 조금…….”
“나한테 번호 주기 싫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왜 이러세요. 무서워.
“이게 사정이…….”
“무슨 사정?”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서는데도 차수연은 끈질겼다. 집요한 시선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데, 뒤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어져. 주기 싫다잖아.”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김우진이 능력을 풀었다. 그제야 내 뒤에 서 있던 김우진을 알아챈 차수연이 미간을 구겼다.
“그쪽은 뭐예요?”
“나는.”
차수연의 질문에 김우진이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치, 친구.”
“…….”
이왕 사기 칠 거면 뻔뻔하게 말하든가, 더듬기는 왜 더듬어.